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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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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욱] “노동자들이여 공부합시다”

등록 2003-12-26 00:00 수정 2020-05-03 04:23

노동대학에서 필자를 기죽였던 조태욱씨가 KT에서 어떤 엄청난 일을 해냈던가

내가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강좌를 신청했을 때 한 후배는 인터넷 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하종강 선배의 학구열은 열번 칭찬해도 모자라지만, 지금은 배울 때가 아니라 앞으로 가르칠 내용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거기에 앞서 지금 당장 앞에 놓인 시급히 꺼야 할 불길도 너무나 많다. 미래를 여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

후배의 문제제기에 대해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다. 노동대학은 제도권 교육과 그 격이 다르다. 지금도 공권력에 맞서 쇠파이프를 다듬거나 도로변 천막에서 농성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기 위해 체계적인 공부를 해보자고 모인 곳이 노동대학이니까….

유년시절 소주 한병의 추억

지난 5월 ‘통신공룡’이라는 말을 듣는 KT가 직원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상품 판매를 함으로써 어마어마한 허위매출 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인해 KT는 통신위원회로부터 29억원의 과징금 부과처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일이 재발할 경우 개인휴대통신(PCS) 재판매사업 부문을 KT에서 분리 조치하겠다’는 경고까지 받았다.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나와 노동대학 동기인 조태욱(43)씨다. 나는 두 학기나 내리 낙제를 한 끝에 결국 수료를 포기했지만, 조씨는 4학기를 모두 마치고 지금은 노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대학원’이라는 다소 귀족스러운 이름 때문에 껄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노동대학을 마친 노동자들이 노동대학과 마찬가지로 한 학기에 20만원의 등록금을 내고 ‘자본론’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노동대학원이다.

찌는 듯 더운 8월 한여름부터 찬바람 부는 12월까지 청와대와 정보통신부 앞에서 하루에 네 시간씩 1인시위를 벌인 사람이 노동대학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조태욱씨라는 사실이 “노동대학이 자칫 한국 노동운동에 스토아학파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를 씻은 듯이 없애준다.

오랜만에 조태욱씨를 만났다. 언제나 그렇듯 내 관심은 ‘사건’보다 우선 ‘사람’이다. 어릴 적 이야기를 아무거나 기억나는 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등록금 내지 못한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서 벌도 세우고 교감선생님이 직접 ‘너는 언제까지 낼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고추 다 말려서 팔면 내준다 했다’고 답했습니다. 학교 끝나면 송아지 몰고 꼴 베러 다니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어요. 내가 어미소로 다 키운 송아지가 서너 마리는 될 거예요. 중학교 3학년 가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지만 나는 돈이 없어 못 갔어요. 여행을 못 간 학생들은 1, 2학년 소풍에 억지로 함께 따라가도록 했는데 어머니가 아침에 선생님 드리라고 4홉짜리 소주 한병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맥주를 선물하는 거예요. 좀 쪽팔리고 그래서 저는 집으로 오는 산길 소나무 숲 아래에서 그 소주를 다 마셔버렸어요. 경주를 아직도 못 가봤어요. 작년에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왔는데, 대를 이어서야 경주 수학여행 꿈을 이룬 셈이죠.”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올바른 뜻을 위해 자신의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한 사람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거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명제 - “굶주림이 발길을 진리로 향하게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소나무 숲에 혼자 앉은 소년이 해질녁까지 소주 한병을 다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난 5월에 있었던 KT 허위매출 사건의 경위를 조씨는 그 배경부터 설명했다.

“이용경 사장이 해외 자본에게 ‘KT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율을 2005년까지 15%로 낮추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그러자면 매출을 대폭 늘려야 하는데 통신시장이 거의 포화상태라 쉽지 않으니까 직원들에게 전화판매를 할당한 거죠. 친인척 우려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계속 할당이 떨어지니까 직원들이 일단 자기 봉급으로 휴대전화를 사서 책상 속에 넣어놓았다가 필요한 사람 생기면 명의변경을 해주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회사가 믿을 수 있는 직원 한 사람 앞으로 가개통된 전화 수백개를 때려넣고 직원들이 할당된 전화를 팔면 거기에서 명의변경을 해주는 식으로 운영했습니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쓴 거죠. 한 사람만 잘 관리하면 되니까요. 그걸 언론에 누군가 제보했는데 언론사에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하니까 저에게 요구했던 거예요. 회사에서 감사 받을 때나 노동위원회 심문회의 때도 ‘왜 하필 조태욱이냐?’ 자꾸 그걸 묻는데 아마 언론사에 제보한 사람이 ‘조태욱씨라면 자료를 제공해줄 거다’ 그렇게 말했나봐요.”

그 제보한 사람은 조태욱씨를 아주 제대로 봤다. KT의 통합고객정보시스템(ICIS) 전산망은 접속한 직원의 근거가 고스란히 남는 시스템이다. 누가 언제 어떤 자료에 접근했는지 나중에 회사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이 자료를 제공했다는 것이 당연히 회사에 알려질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까?

“소문만 듣고 막연히 짐작하다가 확인해보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1천대도 넘는 전화가 한 사람 앞으로 가개통돼 있고 그 요금은 모두 감면됐을 뿐 아니라 개통될 때마다 전화 한대당 10만원 이상 판매보상비도 지급됐을 테니, 회사 말아먹는 놈들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직원들이 당장 고통을 당한다는 것뿐 아니라 몇년 동안 그래왔다면 경제적으로도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혔을 겁니다.”

그 일 때문에 조씨는 결국 8월21일자로 해고당했고, 그 다음날인 22일부터 72일 동안 청와대와 정보통신부 앞에서 각각 두 시간씩 1인시위를 벌였다.

큰일 당하니 여자가 더 대담하더라

조씨의 가족들은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집사람에게는 바로 얘기했어요. 지난 ‘114안내 분사 철회투쟁’ 때도 느꼈지만 큰일을 당하면 여자들이 더 대담해집니다. 아내는 제가 한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신뢰를 보이면서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민주노동당에도 가입해 활동하고 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너무 고마울 뿐이죠. 1인시위를 할 때 많은 동지들이 휴가를 내서 결합했고 아내도 하루를 함께했습니다. 중학생·초등학생인 아이들한테는 한라산에 등반 갔을 때 얘기했어요. 아빠가 이러이러한 일로 해고됐고,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고…. 노동조합 지부장 할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 집회에 다녔고 작년 광화문 촛불시위에도 함께 갔습니다. 5학년짜리 아들아이가 ‘아빠, 그럼 우리 생활은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물어서 ‘큰 지장은 없을 거다’라고 했지요. 해고된 뒤, 전국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내서 도와주고 있어서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집안 분위기 좋아요.”

조씨가 그런 일련의 결심과 행동을 하기까지 노동대학의 학습과정이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보았다.

“결정적이지요. 제가 겪은 일도 결국은 국내 자본이 초국적 자본에게 초과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무리한 경영을 하다가 터진 사건이라는 전체적인 시각을 노동대학을 통해 갖출 수 있었으니까요. 자신을 맑고 투명하게 함으로써 흔들림 없는 전망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로또복권’에 당첨되면 전국에 노동대학 같은 교육기관을 많이 만들어서 책임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하하.”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끝냈지만 그 노동대학에서 낙제했다는 부끄러움이 계속 내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그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등록을 해야 하나….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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