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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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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아키라] 전태일을 아느냐? 스즈키를 아느냐?

등록 2003-09-18 00:00 수정 2020-05-03 04:23

일본에서 운동 시작한 스즈키 아키라, 그가 한국에 와 ‘노동건강연대 성수동팀장’이 되기까지

노동문제 관련 행사가 끝난 뒤 벌어지는 뒤풀이 자리에 여느 남자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사내가 몇년 전부터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저는 ‘스즈키’라고 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말을 듣고 그가 일본사람인 것을 알았다. 외국 인권단체의 연수 프로그램이나 자신이 쓰는 논문 때문에 가끔 그렇게 한국 노동자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사라지는 외국 사람들 중 하나이겠거니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그 뒤 몇년 동안 산업재해 관련 행사나 집회가 열릴 때마다 그의 모습은 빠짐없이 보였다.

대만 할아버지에게 받은 강렬한 느낌

지난해 11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렸던 노동자대회에서 동분서주하는 그를 만나 “나중에 에서 인터뷰 한번 하자고 할 테니까 그때 시간 좀 내줘요”라고 일찌감치 부탁했더니, 그는 특유의 공손한 표정으로 “아, 예 예”라고 답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머리를 갸웃갸웃하며 걸어갔다. 모자를 쓴 그의 뒷모습이 ‘내가 지금 제대로 알아듣고 대답한 것인지 모르겠네’라고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를 만날 때마다 다짐을 받다가 10개월이나 지나서야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스즈키 아키라(鈴木明·42)씨의 고향은 ‘높은 산이 많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 나가노다. 부모님은 모두 교사를 지내셨다. ‘반장을 많이 하는 모범생’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82년에 메이지(明治) 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에도 학생운동이 있을까?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일본에도 학생운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일본 학생운동 내부 투쟁이 너무 격렬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거든요. 전공이 일본사였으니까 자연히 역사 서클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선배가 ‘집회가 있으니까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 집회에 처음 참석하면서 ‘이제 나도 학생운동판에 한 걸음 집어넣는구나’라고 생각했지요.”

메이지 대학에서 계약직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대만 출신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용역업체가 그를 해고하려 했을 때 학생회는 민족차별이라고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뒤 계속 일본에 살던 사람이었어요. 학생회에서 할아버지 체험을 듣는 강연회를 열었는데 그때 정말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는 처음이었거든요.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됐어요.”

일본 교과서가 ‘침략’을 ‘진출’로 바꾸었을 때는 교과서 검정기관을 규탄했고, 나카소네 정부의 군사대국화 정책과 일-미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활동을 펴기도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운동에서 스즈키씨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점점 커졌다. 새로운 후배 활동가를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졸업하지 않고 계속 학교에 남았다. 다른 학생에게 지도를 맡기는 것이 더 좋은 상황이 됐을 때 대학을 떠났다(아,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똑같았을까). 츄오(中央) 대학 법학과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지만, 부모님 두분이 모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을 더 이상 계속하기는 어렵고 이제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현장으로 들어갔거든요.”

250여명의 이주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다

이쯤 되면 일본 얘기인지 우리나라 얘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노동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산재직업병센터’라는 민간단체에서 일할 사람을 구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권해서 그곳에 들어갔다. 처음에 맡은 일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 노동자의 산업재해 보상을 돕는 일이었다. 1990년에 그 일을 시작해서 1997년 한국으로 올 때까지 그의 도움을 받은 노동자는 모두 250명쯤 된다.

1989년에 마산의 ‘한국수미다 노동조합’이 일본에 원정투쟁을 왔을 때는 1990년 2월 아버지가 쓰러질 때까지 한국에서 온 노동자 4명과 함께 일본 본사 앞 농성장을 지켰다. 1993년 가을에 과로사 문제에 관한 한·일 공동세미나가 일본에서 열렸을 때 한국 병원노동조합연맹의 간부로 세미나에 참석한 최경숙씨를 처음 만났다. 그 다음해에 최씨가 일본 지방자치단체노동조합 국제국에 1년간 연수와 있을 때는 원진레이온 사건에 대한 강연과 과로사 문제에 관한 2차 한·일 공동세미나 준비를 함께 하면서 가까워졌다.

1995년 한국에 잠시 들어와 민주노총 창립 전야제 행사에 참석했을 때, 처음 보는 역동적인 장면들과 민주노조를 기원하는 노동자들의 열기를 직접 느끼면서 한국 노동운동을 체험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1997년 기어이 한국에 들어와 우리말을 열심히 배우면서 노동과건강연구회 등에서 틈틈이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1999년에 강제로 통원 치료 처분을 받은 대우국민차 소속 산재 노동자 이상관씨가 자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스즈키씨는 ‘산재 노동자 이상관 자살 책임자 처벌과 근로복지공단 개혁을 위한 공동투쟁’에 참여했다. 155일 동안이나 계속됐던 그 투쟁기간에 스즈키씨는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 천막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98년 5월에 스즈키씨와 그보다 3살 연상인 최경숙씨가 결혼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만큼 두 사람이 친해지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결혼 생활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라고 하니까, “요리는 주로 경숙씨가 제 입맛에 맞춰 해주시니까 먹기가 아주 쉬워요”라고 한다. 내가 “해주시니까라고 표현하는 것은 높임말인 거 알아요?”라며 웃었더니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그것은 제가 감사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요즘 주로 하고 있는 활동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장 꺼내서 준다. ‘노동건강연대 성수동팀장’이 그가 가진 공식 직함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산재추방운동을 밖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제화노조·인쇄노조와 함께 활동하게 돼서 매우 기쁩니다. 노동부가 중소 영세사업장 산업안전 지도사업을 한 지 10년 됐어요. 이제 성수동 지역에서 개선 모델을 만들면서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건 ‘비자’

그는 그 일을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수준만 보장되면 된다고 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흔살을 훌쩍 넘긴 그가 청소년처럼 순수한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는 동료의 문제이고 동료의 문제는 자기 문제라고 깨닫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들기 위해 주체로 나서는 것이지요.”(이런 말은 산업안전보건활동에 관한 용어사전이 있다면 집어넣어야 한다.)

한국에 와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비자 문제라고 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경숙씨에게 왜 일본으로 따라가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결혼하면 남자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며 그렇게 말했어요. 토요일 업무시간이 지나도록 둘이 계속 직원과 싸우고 있으니까 안에 있던 여직원이 나와서 ‘제가 처리하겠다’고 해서 비자를 받을 수 있었어요.”

사무실을 나서며 노동건강연대 실무자들에게 “스즈키씨에 대해 한마디만 해달라”고 졸랐다.

“집회에 가면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경외심으로 자세와 눈빛이 달라지는 사람이에요. 외국에서 온 노동자가 ‘한국 노동운동의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그 사람이 전태일 정신을 아느냐? 사람들이 죽어가며 쌓아올린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아느냐?’고 말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전태일 정신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죽어가며 쌓아올린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아십니까?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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