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민족민주열사 · 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로 몸 낮춘 이형숙씨의 삶과 희망
지난해 초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형숙(34)씨로부터 “노동운동 선배들의 삶을 기록하는 자원봉사를 해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올 여름까지 한달에 한명씩 모두 15명의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동안, 원고 마감날짜를 제대로 지킨 적은 내 기억으로 딱 두번뿐이다. 다달이 나오는 소식지 발행이 늦어지면 우편요금을 곱빼기로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전해듣고 어려운 재정 형편을 빤히 아는 나는 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우편요금을 내가 부담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김수정 간사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라는 엄중한 항의편지를 받았을 뿐이다. 아, 나의 그 말은 얼마나 오만방자한 것이었는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일생 동안 갚아야 할 큰 빚을 하나 남긴 셈이다.
좌절과 상처 뒤 다시 ‘꼬임’을 당하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최 노동자대회에서 2년여 만에 다시 화염병이 나타났다고 언론이 호들갑을 떨던 날, 시청 앞 한 식당에서 만난 이형숙씨는 “우리는 논밭을 뛰어다니면서 전경들과 치고받고 화염병을 던지곤 했어요. 화염병이 논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서로 그랬던 기억이 나요. 지방에서 학교를 다녔거든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막내이모에게 “우리 언니 이제 그만 좀 고생시켜라”는 말을 들으며 끌려오다시피 서울로 올라왔다. 조직적으로 연결되는 사람이 없으면 집회 한번 참석하기도 쉽지 않은 시대였다. 어떻게든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국연합’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 제 발로 찾아갔다.
“삼선교쪽에 있는 사무실이었어요. 와보라 해서 갔는데 문이 잠겨 있는 거예요. 나중에 내가 단체에 상근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때는 그렇게 서운하더라고요. 실무자들이 그런 낯선 전화를 받으면 일단 ‘와보라’고 하지 않겠어요?”
어릴 때 영세를 받은 이씨는 구로공단 근처에 있는 성당을 찾아가 ‘지오쎄’(JOC·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참여했다. 나중에는 전국본부 사무실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소상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시 ‘지오쎄’는 가난하지만 보람 있는 노동자 개인의 삶과 노동의 신성성을 중요시하고 활동 범위가 교회를 벗어나지 않는 분위기가 점차 강조될 때였다. 신부님들과 부딪치면서 이씨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큰 좌절과 상처를 겪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다. ‘이제 난 운동은 못한다. 역량이 안 되는 인간이다’라는 생각에 빠져 자취하던 옥탑방에서 6개월 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아무 일도 안 했다. 그곳에서 이씨를 끌어낸 이가 당시 전태일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이었던 정인숙씨다.
“딱 한달만 ‘영화전태일제작위원회’ 사무실 지키면서 전화만 받으면 되는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갔어요. 아무 직책도 없는 그냥 아르바이트였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시는 운동을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절대로 꼬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꼬임이 당해지데요. 아르바이트 끝난 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사람이 없으니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그냥 밀려서 그 일을 시작했지만…, 사실은 현장 조직 사람들을 만나면서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1997년에 전태일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하면서 이형숙씨가 만들기 시작한 월간 소식지 ‘사람세상’은 이씨가 기념사업회를 떠난 올해 초까지 단 한번도 발행을 거른 적이 없다.
“영화 제작 후원했던 사람 주소가 2500명쯤 남아 있었어요. 소식지 찍어와서 우리가 직접 속지를 넣고 접어서 편지봉투에 담았어요. 큰 서류봉투는 우편요금이 비싸니까. 도움받을 사람 불러서 네명 정도가 밤새 일했어요. 우리끼리 ‘야, 이걸 이렇게 무식하게 해야 되냐?’고 웃었어요. 매달 15일경에 그 작업을 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제가 15일쯤에 전화를 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했어요. ‘15일쯤에는 기념사업회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어떤 날은 혼자 그 일을 하다가 방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서 자기도 했어요.”
전태일 정신을 이용하는 자는 누구냐
처음에 책정된 인건비가 있었지만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는 못했다. 이형숙씨가 처음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했을 때 한달에 들어오는 후원회비는 고작 9만원이었으니. 이런 썩을…. 하종강 너 같은 놈들은 그때 다 뭐하고 있었냐? “인건비를 제때 받지 못한 기간이 모두 얼마나 돼요? 그만둘 때까지 계속 그랬어요?” 내 질문에 이씨는 얼른 대답을 못했다. “그래도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어요. 문화공연 한번 하면 목돈도 들어오고….”
이형숙씨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전태일 열사가 참 여러 사람한테 도움 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정치권으로 간 사람들…. 운동권이고 비운동권이고 기념사업회 관련 활동이 약력에 들어가는 시대잖아요. 노동현장에 뿌리 박아야 하는 전태일 정신과 대중적인 전태일 사이에서 기념사업회는 사업 조절이 힘들었어요. 예를 들어 ‘전태일열사상’을 국제적인 노동자상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열사로 이어지는 것이 한국 노동운동 특징이라면 전태일 열사가 바로 그 상징이잖아요. 노동자들은 전태일 정신만 이야기할 뿐 그런 걸 살리지 못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이 그렇게 분신을 했다면 진작 국제적인 상이 하나 만들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올봄 이형숙씨가 전태일기념사업회를 그만뒀다는 말을 처음 듣고 나는 ‘고생하던 이씨가 이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형편이 조금 나은 곳으로 갔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이씨가 옮겨간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는 전태일기념사업회보다 살림이 더 어려운 곳이다. 사람들은 그나마 상징적 명망이 있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그곳으로 옮긴 이씨를 보고 “큰 집에서 살다가 작은 집으로 살림을 줄여 이사간 것처럼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전태일 열사 보상금 930만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일을 바로잡으려면 기념사업회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깥에 나가서 다른 열사들 문제와 함께 전체적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옮긴 거예요. 추모제 하나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열사들이 많아요. 전태일 열사 곁을 떠났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전태일 열사가 모든 열사들의 맏형이기 때문에 결국 전태일 열사 일을 계속하는 거예요. 8년 동안 제대로 못한 일을 더욱 잘되게 하기 위해 뭔가 딱 끊는 구분이 필요했던 것뿐이에요.”
지극히 세속적인 질문을 나는 결국 또 하고 말았다. “활동비는 나와요?” “첫 달에 조금 받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못 받았어요. 받을 생각도 별로 없어요.” 이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도 있다.
열사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이형숙씨는 열사 유가족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 중의 하나다. 한달 새 네명의 노동자가 분신·자살하는 엄중한 시대에 열사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며칠 전에 ‘2004년 열사력(달력)’을 만들었어요. 열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이 일을 중단해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같은 단체가 없어져야 되는 거 아니냐고…. 오죽 가슴이 아프면 그렇게들 말하겠어요. 열사들의 부모님들은 돌볼 자식이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다른 자식의 죽음은 가슴에 묻으면 되지만, 열사 부모님들은 자식이 아직 죽은 게 아니에요. 명예회복도 해야 되고, 제대로 된 묘에 자식이 들어갈 수 있어야 되고…. 폭탄을 던진 독립투사들을 테러범이라고 하지 않듯, 열사들의 죽음을 더 이상 자살이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형숙씨가 건네준 커다란 열사력을 노동자대회 내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동안, 나는 그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졌다.
글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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