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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한] 나는 왜 정신병에 걸렸나

등록 2003-07-31 00:00 수정 2020-05-03 04:23

회사쪽의 일상적 폭행과 협박에 ‘적응장애’ 진단까지 받은 청구성심병원 노조 권기한씨

청구성심병원 임상병리사 권기한(36)씨를 만난 뒤, 나는 그 병원에 대한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기억을 모두 포기한 채, 권씨의 서러운 사연들만 적기로 결정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권씨에게 청구성심병원(서울 은평구 갈현동) 노동조합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물었다.

“98년 4월7일, 노조 총회가 병원 로비에서 열렸을 때 병원쪽 남자 직원들과 수상해 보이는 청년들이 조합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저는 다른 약속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뒤 며칠 동안 ‘내가 그때 적극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빠져나왔다’는 자책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노조에 찾아가 이정미 지부장에게 내가 할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지요. 비상대책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어요.”

극기훈련장에서의 폭행사건

1998년 5월, 병원이 주최한 극기훈련 뒤풀이 자리에서 병원 간부들이 “노동조합이 병원을 망하게 한다”면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권씨는 그게 아니라고 눈총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주임 한 사람이 권씨에게 시비를 걸더니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서너대 맞고 뒤로 넘어졌다가 일어서는데 다른 직원들이 권씨를 붙들었다. 싸움을 말리느라고 그랬다지만 권씨만 붙들고 늘어졌으니 꼼짝 못하고 계속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 조합원들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방 밖으로 끌려나와 폭행이 계속됐다. 권씨는 맞고 쓰러지고, 맞고 쓰러지기를 되풀이했다.

“한 20분 계속됐을 거예요. 나중에는 탈진이 돼서 못 일어나겠더라고요. 간호부장과 간호감독은 여성 조합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고리를 꼭 붙잡고 있었어요.”

뇌진탕, 안면부 및 흉부 찰과상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람들이 각종 자료에서 “직원 극기훈련장에서 폭행 발생”이라고 단 한줄로 읽고 넘어간 사건의 진상은 그랬다.

98년 8월6일 파업전야제가 열렸고 권씨가 사회를 맡았다. 병원쪽에서 전원을 꺼버리고 천장에서 갑자기 구정물이 쏟아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전야제를 끝냈다. 밤 1시께, 조합원들이 분임토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다시 끊겨 암흑천지가 되면서 병원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경리부장이 검정 비닐봉투에 담아온 똥물을 던졌고 소방호스에서 물이 뿌려졌다. 의자·물병·신발 등 온갖 집기들이 조합원들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이게 사실인가 싶더군요. 조합원들은 깔판을 들고 소방호스에서 뿜어져나오는 물과 날아오는 집기들을 막았지만 사람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식칼 테러도 그때 발생했어요.” 그날 밤 문화방송 9시 뉴스에는 청구성심병원 영안실 직원이라는 남자가 문신을 한 몸으로 칼을 빼들었던 모습이 생생하게 방영됐다.

98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하루 전, 병원에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권씨를 포함해 해고된 직원들은 모두 조합원이었다. “해고된 뒤 어느 날, 당직하는 동료를 만나러 임상병리과에 갔는데 총무부장, 경리부장, 업무주임, 경비까지 다섯명이 찾아왔어요. 제 멱살을 붙잡고 ‘여기는 니가 있을 곳이 못 돼’ 욕하면서 주먹으로 때리더군요.”

권씨가 신고를 해서 파출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가해자인 병원 총무부장의 진술만 주로 받았다. 경찰서에서는 “초동수사에서 쌍방과실로 왔으니까 그렇게 처리하겠다”고 했다. 당시 권씨를 폭행했던 다섯 사람 중 네명은 아직도 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비에서 주임으로, 주임에서 과장으로, 부장에서 실장 또는 부원장으로 모두 승진했다.

과장님은 왜 뒤로 넘어졌을까

병원과 이사장 집 앞에서 거의 매일 집회를 여는 등 복직투쟁을 벌이다가 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복직 통보를 받았다.

“100일 만에 복직해서 다니는데 그냥 놔두지 않더군요. 제가 있는 임상병리과 생화학검사 파트에 세명이 일하다가 두명이 퇴사했는데 충원을 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 저 혼자 일하게 하는 거예요.”

외래 검사실로 보직이 변경됐지만 불이익은 계속됐다.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이 주로 하는 채혈을 맡기더군요. 제가 가기 전까지 두명이 하던 외래 채혈을 저 혼자 맡으라고 하더니, 제가 혼자 일하던 곳에는 두명을 배치했어요. 이의를 제기했더니 그것이 폭언이라면서 나중에 모두 제 징계사유에 포함됐어요.”

폭행을 가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불행한 사회에서는 폭행은 또 다른 사건의 불씨가 된다. “나를 폭행했던 병원 간부 중에 벌금 30만원 처분을 받은 사람이 있었어요. 2001년 6월, 임상병리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자기 혼자 뒤로 넘어지는 거예요. 나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병원 게시판에는 내가 과장을 폭행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비난하는 게시물이 한달 동안이나 붙어 있고…. 그 사람이 저를 상대로 형사고소를 하고 치료비·간병비 등 명목으로 1천만원이 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어요.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받고 무혐의 처리가 되기는 했어요. 민사소송은 김선수 변호사님이 맡아주셨어요. 내가 반소를 제기해서 오히려 300만원을 지급받는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도 항소심이 진행 중이에요. 그 사람을 무고로 고소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어서요….” 말끝을 흐리는 권씨의 눈가에는 ‘나 착한 사람’이라고 써 있다.

권씨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은 그 무렵부터다. “내가 당하는 일이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더군요. 2001년 9월에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열심히 다녀서 다 나았는데…. 병원에서 계속 부딪치니까 다시 또 치료를 받아야 하고….” 청소년이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해 자살하거나, 폭행을 당해 남편만 보면 무서워하는 아내의 증상이 바로 ‘적응장애’다.

이 밖에도 임상병리실장에게 출근카드를 건네주다가 직원들 앞에서 총무과장에게 “남의 출근카드를 만졌다”고 멱살을 잡히고 폭행당한 일, ‘상사에 대한 폭언’ 등 10개나 되는 사유로 정직 징계를 받은 일, 교섭회의 석상에서 간호과장이 권씨 얼굴에 물을 뿌린 일, 남자 직원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권씨의 귀에 대고 “밤에 길가다 만나면 죽을 줄 알라”고 속삭이는 일, 미팅 장소에서 권씨를 쫓아내며 손가락을 펴고 “하나, 둘, 셋 셀 때까지 나가라”고 짐승 다루듯 하는 일 등 ‘일상적 협박’이라고 자료에 간단히 표기된 온갖 사건들에 대해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지경인데, 이러한 폭행과 위협은 2003년에 들어 더욱 극렬해졌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동지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

사람이 이런 일들을 몇년 동안 당하면서도 정신적 불균형을 겪지 않으려면 조물주가 인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좀 다르게 만들었어야 한다. 청구성심병원에 남아 있는 조합원 20명 중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명이고 그 중 9명이 현재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권씨에게 “노동조합에서 탈퇴하거나 다른 병원에 취업하면 당장 벗어날 수 있는 고통을 굳이 수년 동안 이겨내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내가 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 잘못을 뜯어고치려는 일이니까요. 동지들을 두고 떠나는 것. 그것이 나한테는 더욱 힘든 일이에요.”

우리 사회는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아직 일천해서 사람들은 대부분 밝히기를 꺼리는데 언론에 이렇게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묻는 나에게 권씨는 오히려 되물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런 편견을 없애는 일 아닌가요?”

권씨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다. “처음 만나던 날, 아내가 나한테 그랬어요. 운동은 평생 하는 거라고….” 짧은 말로 그의 훌륭한 아내에 대한 많은 설명을 생략한다. ‘평생 해야 하는 운동’에서 내가 만일 내려선다면, 권기한 동지,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시오. 그 비수를 기꺼이 받으리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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