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최영현] 인쇄골목에 사랑이 피어난다

등록 2003-10-31 00:00 수정 2020-05-03 04:23

‘인쇄노동자 취업알선센타’ 일군 최영현씨, “어려운 사람은 당신 가까이에 있다”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에 들어서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80년대 초, 그 암울한 시기에 유인물 원고를 품속에 감춘 채 그것을 인쇄해줄 고마운 인쇄업자를 찾아 수천개도 넘는 인쇄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기억이 며칠 전의 일처럼 가슴에 되살아난다. 인쇄 잉크가 뿜어내는 그 골목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그때 우리를 쫓던 수사기관원들과 벌이던 숨바꼭질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와 쓴웃음을 짓는다. 우리를 숨겨준 그 고마운 인쇄업자들은 가끔 수사기관이 발표하는 ‘반국가단체 조직도’에 ‘인쇄책’이라는 살벌한 직함으로 등장해 함께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0년 동안 이사 10번 넘게 간 사연

건물마다 층층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쇄소들이 마치 거대한 공룡의 신체기관처럼 자신의 역할을 맡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 골목에서 인쇄 노동자 최영현(34)씨를 만났다. “우리가 알게 된 지 얼마나 됐지?” 내 물음에 “한 4년쯤 됐다”고 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흠칫 놀랐다. 어, 그것밖에 안 됐나? 그보다 훨씬 더 됐는 줄 알았는데…. 그와 만난 기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그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는 뜻이다.

4년 전, ‘인쇄 노동자들의 대부’라는 말을 듣는 최창준(현 민주노동당 성동구지구당위원장)씨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인쇄노동자 취업알선센타’에 처음 노동법 교육을 하러 갔을 때, 유난히 매서운 눈매에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최영현씨다. ‘저 사람과는 앞으로 오래 만나겠군’ 싶은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 그랬다. 그 뒤 지금까지 인쇄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 한가운데 어김없이 최씨의 모습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을지로 일대 인쇄 노동자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준 ‘인쇄노동자 취업알선센타’와 ‘매킨토시 기술학교’는 최창준씨와 최영현씨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취업알선센터를 운영하면서 보니까 사업주들은 대부분 경력자를 구하는데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경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매킨토시 컴퓨터 한대 값이 700만원쯤 할 때였는데,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보니 3대 정도 빌릴 수 있겠더라고요. 사무실 한쪽에 컴퓨터 3대 놔두고 기술 있는 사람이 후배들 가르치며 그렇게 시작했는데, 혹시 매킨토시 컴퓨터 회사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갔더니 처음에는 확답을 못 주다가 ‘창고에 넣어둔 옛날 것 몇대 정도는 지원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일이 커진 거지요. 어찌어찌해서 프로그램도 ‘아도브사’에서 1년간 임대 지원을 받았어요. 마침 아는 사람이 회사를 정리한다고 책상과 비품들을 가져가도 된다고 해서, 사무실 한곳을 계약했어요. 일요일에 최창준 형님하고 둘이서 일산에 사는 사람 트럭을 빌려다가 책상과 비품들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5층까지 모두 끌어올려다 놨는데, 다음날 건물주가 계약을 취소하자는 거예요. 원래 들어오기로 한 사람이 긴가민가해서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들어온다고 했으니 나가달라는 거예요. 찌는 듯이 더운 8월이었는데. 휴, 그 책상들을 또 하루 만에 다 들어내렸어요. 온 동네를 최창준 형님과 둘이서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는 건물이 하나 나왔다고 해서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고 들어갔어요.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7층이었지만 그래도 ‘남 등쳐먹고 사기치지 않으면서 뭔가 하려고 하니까 돌파구가 만들어지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뿌듯했지요. 사람들이 두세달씩 기다려서 등록할 정도로 성황이었는데, 건물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또 문제가 생겼어요. 리모델링을 한다고 뚱땅뚱땅하는 가운데에도 우리는 교육했어요. 나중에는 건물 주인이 전기를 끊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최창준 형님이 민주노동당에 가셔서 ‘상가임대차보호법’에 기를 쓰고 매달리시는 거예요. 형님이 그때부터 ‘이거는 국가적인 문제다’라고 강조했거든요. 일 끝내고 밤늦은 시간에 사람들이 찾아와 이렇게 배우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전기선을 자를 수 있나. 정말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쇄노동자 활동에 참여한 지 10년 조금 넘는 동안 사무실 이사만 열번 넘게 했어요.”



최영현씨가 주변 동료들로부터 남다르게 받는 눈총이 하나 있다. 이상할 정도로 장애인 문제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일감이 생겨서 사람들을 급히 불러모아 ‘손일’(수작업)을 시켜야 할 때 최씨는 곧잘 장애인들을 부른다. 장애인들은 아무래도 일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일거리를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깔아주면’ 훨씬 빨리 끝날 수 있는데도, 최씨는 굳이 “자본주의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우리가 먹고살 정도만 된다면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고 동료들을 설득하면서 장애인들에게 일을 맡기고 또 그 사람들의 인건비는 자기 몫을 떼어서라도 철저하게 챙겨준다. 그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장애인 관련 단체나 연구소에 찾아가 일을 거들고 틈틈이 수화를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그 깊은 집착의 뿌리는 무엇일까?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못 보내준다고 했지만 몰래 시험을 치렀어요. 등록금하고 책값이 38만원 나왔는데, 그 돈 만들겠다고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신발공장에 취업했지요. 졸업식장에도 못 가고 열심히 일했는데도 등록금 마감날까지 그 돈을 못 벌었어요. 그때 월급이 10만원 남짓밖에 안 됐거든요. 신발공장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내 기술이 있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인쇄기술을 배우자 맘먹고 인쇄소에 취업해서 회사 옆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학교 갈 준비를 했는데, 하루는 어느 병원 주보를 찍다가 고아원과 노인 수용시설을 방문한 얘기를 읽었어요. 주소를 보니까 우리 집 바로 옆인 거예요. 그 길을 매일 다니면서도 전혀 몰랐던 거지요. 그래서 한번 가봤는데, 아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나도 못 살지만 나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 그렇게 많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던 거예요. 팅팅 분 라면을 라면 따로, 국물 따로 해서 주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그 라면조차도 모자라는 거예요. 음식을 절대로 남기지 않는 습관은 그때부터 생겼어요. 배가 좀 불러도 저는 다 먹어치워요. 이 사회에 어려운 사람들이 나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 그렇게 많이 사는데도 나는 그걸 까맣게 모르고 살았구나, 공부는 나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한다, 나까지 굳이 공부를 해서 얼만큼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때 공부를 접었어요. 내가 신나서 할 수 있는 일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오더라구요.”

‘모범적인 사업장 한 군데’…

노동법을 붙들고 20년 넘게 살아온 내 앞에서 최씨는 “노동법이나 사회를 보는 지식이나 능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10% 정도밖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절실한 진실로 다가서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최영현씨는 최근 그간의 활동을 잠시 접고 인쇄현장으로 돌아갔다. 영세 하청업체가 대부분인 인쇄현장에 모범적인 사업장 한 군데를 제대로 만들어 그것이 널리 퍼지도록 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가 세운 확실한 목표다. 현장을 떠나 있는 몇년 동안 기계들이 많이 바뀌어서 새 기술을 익히느라고 내년 봄까지는 자신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웃었다.
“지난 토요일에도 나는 저녁 7시까지 일했어요. 주5일 근무제를 빨리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영세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해야 돼요. 모두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최씨는 그날 오후 종묘에서 열리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쟁취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하러 떠났고, 저녁 뉴스에는 그 대회에 참석한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의 이용석 광주지역본부장이 분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씨의 꿈 ‘모범적인 사업장 한 군데’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