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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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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모] “안건모씨, 계속 그렇게 사시오”

등록 2003-08-14 00:00 수정 2020-05-03 04:23

버스회사 연·월차 모아 월간 만드는 운전기사… 도대체 몇 사람 몫의 일을 하느냐고?

월간 편집장 안건모(46)씨를 만나러 사옥으로 찾아간 날은 마침 ‘마감’ 때였다. 정신없이 바쁜 직원들에게 눈치가 보여 안씨와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쓰르라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골목길 ‘주민독서실’이 바꾼 운명

다음날 고경태 팀장이 전화를 했다. “원고가 매번 넘쳐서 편집이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는데, 좀 줄여주세요.” 원고를 줄이는 일은 새로 쓰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아까운 내용들을 잘라낼 때마다 마치 손발이 잘려나가듯 마음이 아프다. 그래, 이번에는 큰맘먹고 줄여보자. 안건모씨가 운전기사가 되기 전까지 겪어온 삶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신문배달, 무덤 뗏장 나르기, ‘개동이’(흔들) 의자 공장, 박스 공장, 자전거 공장을 거쳐 ‘노가다’ 경력만도 조적미장공, 형틀목공, 아시바공, 내선전공을 두루 다 해봤고, 운전 일을 시작한 뒤에는 시내버스를 하기 전까지 가구점, 화장지 납품회사, 환경회사 소독차, 자가용 기사를 거쳤다. 거의 반나절 동안 안씨에게 들은 많은 사연들을 이렇게 단 몇줄로 정리하자니, 속이 다 쓰리다.

가구점에서 일할 때 옆가게 경리사원을 일찌감치 마음속에 점찍었다가 퇴근길에 용기를 내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 1년쯤 뒤에는 같이 살 방을 구하러 다녔다.

“성북동 어느 부잣집에 자가용차 기사로 소개를 받아 갔어요. 지하실 차고 옆에 붙은 작은 방에 살면서 가끔 주인집 빨래도 하라는 거예요. 남편은 운전기사, 아내는 식모를 하라는 거지요. 나는 그 말 듣고 그냥 발 돌려 나오는데 집사람이 ‘여기서 일하자’고 나를 붙들었어요. 집사람은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에요. 집에서 전자제품 조립 부업을 한 적도 있어요. 그 일이 소리가 좀 나거든요. 성질 못된 내가 ‘잠 못 자게 한다’고 다 팽개쳐버리니까 집사람이 그걸 몰래 부엌에 들고 나가서….”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린 안씨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지금은 엄청 후회돼요.” 안씨의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안건모씨는 없다.

“일 끝내고 밤늦게 방에 들어가면 아기 혼자 방바닥을 헤매면서 울고 있는데 집사람은 주인집에 일하러 올라가서 없고…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짬 날 때마다 연습해서 대형 면허증을 땄지요.”

1985년 여름, 27살 되던 해에 처음 시내버스를 몰았다. “처음 운전대 잡고 도로에 나갔는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야, 내가 이걸 움직이는구나, 마치 집채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홍제동에 살 때 집 근처 ‘호방터’ 골목길에 있는 ‘주민독서실’에 들렀다. 앵글로 짠 책장들 사이에 두꺼운 안경을 낀 사내가 앉아 있었다. 구석진 곳에 꽂혀 있는 라는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첫장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미국에 대항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쿠바의 민중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 도대체 누가 미국에 대항해 승리했다는 말인가?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가? 어라, 내가 생각했던 미국이 아니네…. 을 읽었고 을 읽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감쪽같이 속고 살았구나. 박정희가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 관동군 소좌였다니…. ‘건국의 아버지’라고 굳게 믿었던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에 업은 ‘망국의 아버지’인 줄 꿈엔들 알았으랴….

“참고 살자”고 혼자 다짐했건만…

안씨는 “그 주민독서실에서 만난 책들이 나를 어둠 속에서 끌어냈다”고 했다. ‘주민독서실’은 나중에 ‘겨레사랑주민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두꺼운 안경의 사내는 지금도 양천구에서 여전히 독서실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내 임금계산을 해보니까 기본급 이틀치가 비는 거예요. 운수노동자협의회에 찾아갔는데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을 해주더군요. 그때부터 근로기준법, 단체협약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회사에 연·월차 휴가 보내라, 왜 안 보내냐, 그때부터 혼자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버스 노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일에는 관심없고….”

그렇게 혼자 시작한 싸움을 안건모씨는 지금까지 10년 넘게 하고 있다. 92년에 안씨가 일하던 버스회사가 다른 회사에 팔린다고 기사들에게 모두 사직서를 내라고 했다. 노동조합은 뭘 받아먹었는지 조합장이 나서서 기사들 사직서를 받았다. 안씨는 홍보물을 만들어 동료들에게 나눠주면서 “절대로 사직서를 내지 말자”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20여명의 기사들이 모였지만 회사에서 한 사람씩 불러 꼬드겼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단 한 사람 안씨만 혼자 해고통보서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93년 8월 ‘동해운수’에 취업했다. 처음에는 그냥 참고 다니려고 애썼다. 아내가 너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참고 살자. 참고 조용히 일만 하자.’ 그렇지만 기사 숙소에 쥐가 돌아다니고 휴식시간도 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씨를 그냥 참고 일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안씨는 ‘동해운수’에서 온갖 일들을 겪으며 10년째 다니고 있다.

98년에는 버스 운전기사들의 모임 ‘버스일터’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다가 무지막지한 테러를 두번씩이나 당하기도 했다. 숲에 끌려가 각목으로 집단 폭행을 당하다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철조망을 몇개나 넘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겨우 탈출했다. 택시기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안씨를 태워줄 생각을 않고 모두 도망갔다. 밤늦은 시간에 집 앞에서 각목을 든 괴한들에게 포위돼 기절하도록 얻어맞고 머리가 터져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 사건의 범인들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많은 일들은 안씨가 ‘글 쓰는 노동자’가 된 뒤 스스로 기록한 여러 글 속에 나와 있으니 이곳저곳에 있는 안씨의 글들을 찾아 읽어보기를 권한다. 안씨가 ‘책 읽는 노동자’에서 ‘글 쓰는 노동자’로 한 걸음 더 내딛게 된 것은 의 광고 덕이다.

“96년 어느 날 오전반 일을 끝내고 ‘한겨레신문’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조그만 광고를 봤어요.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 1년 구독료 1만원’이라고 돼 있는데, 솔직히 ‘햐, 이렇게 싼 책이 있어?’ 하는 생각으로 신청했지요. 그 에는 진짜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어요.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쓰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읽기만 하던 나에게 쓰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했어요.”

와, 정말 많은 데서 일한다!

그렇게 과 인연을 맺기 시작해 지금 그 책의 편집장이 됐다. 안씨는 버스 현장에서 10년 동안 싸워 따낸 연·월차 휴가를 이제 을 위해 쓰고 있다.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마감 때는 휴가를 빼서 이틀 정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한다. 올해 연차 휴가는 벌써 다 썼다.

인터뷰를 마칠 때 으레 하는 질문을 했다. “생활의 원칙이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물어보면 참 할 말이 없어요. 그게 노동자와 지식인들 차이인가 봐요. 지식인들은 그런 걸 잘 정리해서 말하더라고요. 전적으로 글을 쓰는 일에 매달려볼까 하는 욕심이 들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노동자 정체성을 잃을 것 같아서….”

사람들은 안씨에게 “도대체 몇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거냐”고 묻는다. 취미생활도 다양해서 축구, 바둑, 등산도 꽤 잘한다. 고양시 ‘여성민우회’ 풍물패에서 장구를 친다. 안씨가 “왜 여성민우회가 남자를 차별하냐? 성차별 하지 마라”고 요구해서 그렇게 됐다. 고양신문 편집위원, 버스일터 편집장, 고양시민회, 민주노동당 활동도 한다. 안건모씨 계속 그렇게 사시오.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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