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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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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천] “내가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

등록 2003-12-11 00:00 수정 2020-05-03 04:23

중앙과 지방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 ‘공무원노동조합 국보 제1호’ 정용천씨

세상사에 그리 밝지 않은 사람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해 갖는 의문은 우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공무원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도 공무원이다. 그렇다면 “공정거래위원회에도 노동조합이 있을까?” 물론 그곳에도 노동조합이 있다. 그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갖는 궁금증은 대개 “그 노동조합의 대표도 다른 노동조합들처럼 해고되거나 구속되고 징역을 살기도 할까”일 텐데 그에 대한 답 역시 “물론 그렇다”이다.

파면, 그리고 두번의 구속

지금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중앙행정기관본부장과 공정거래위원회지부장을 겸하고 있는 정용천(44)씨를 주변 사람들은 “공무원노동조합 국보 제1호”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정씨가 공무원 노동조합과 관련해 파면당한 첫 번째 공무원일 뿐 아니라 두번씩이나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은 드문 경력의 소유자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에서 굳이 정씨를 골라 파면하고 두번씩이나 구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동료 활동가들에게 물어봤다.

“공무원노동조합 조직을 중앙행정부처와 지방자치단체로 분리하겠다는 것이 지금 정부의 기본 방침입니다.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 조직을 분리해 서로 견제하는 체제를 갖춤으로써 노동조합 조직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구상이지요. 그런데 그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 딱 서서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정용천씨입니다. 노동조합 조직력 약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정용천씨가 가장 큰 걸림돌인 겁니다.”

필자를 만나러 오면서 정씨는 집에 3권밖에 남지 않았다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 한권을 전해주기 위해 들고 나왔다. 그 논문의 제목은 ‘한국의 노사관계에 대한 정부정책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갖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이거 참 창피한 건데요. 그 논문 쓸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논문은 하나 내야겠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부랴부랴 쓴 거예요. 그때는 나도 노동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순 엉터리예요. 하하….”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쓴 논문의 주제가 왜 하필이면 ‘노사관계에 대한 정부정책’이고 그 안에서 ‘노사관계의 본질과 유형’ ‘한국 노사관계의 실태와 문제점’ 등을 다루었겠는가 말이다. 공무원이 되기 훨씬 전부터 어쩌면 정씨에게는 노동조합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용천씨는 공무원이 된 이유가 또 각별하다.

“제가 술이 아주 약합니다. 경쟁력이 떨어져서 일반 회사는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도교수님이 도와주셔서 행정학 강의를 하면서 교수를 꿈꾸기도 했고, 사회학·법학·행정학을 공부했으니까 솔직히 고시에도 욕심이 있었지만, 그건 사실 좀 어렵잖아요. 서른살에 군대에서 제대한 뒤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고 서른두살에 행정직 7급 국가공무원 시험을 봤습니다.”

정씨는 공무원 사회 첫걸음을 1991년 12월10일 경제기획원 예산실에서 시작했다. 시쳇말로 ‘꽤 끗발 있는’ 부서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7급 시보들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시행될 것이라고 해서 정씨는 후배들을 위로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구조조정 원칙이 갑자기 바뀌더니 나이가 많은 정씨가 구조조정 대상 1순위가 됐다. 감사원으로 추천이 들어왔지만 “다른 사람 잘못을 주로 들추어내는 감사 업무는 체질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마다했다. 잠시 대기발령 상태에 있다가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국무총리실 산하로 옮긴 공정거래위원회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빨리 자리 배정을 받았다.

신출귀몰했던 투표의 추억

1995년 1월25일자로 공정거래위원회에 발령받은 정용천씨는 정말 소신껏 일했다. 당시 기업체에서는 “조사단이 오면 정용천씨만 집중 관리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본래는 1994년에 승진 대상이었는데 조직 통폐합 때문에 2년 반이나 늦은 1996년 7월에야 6급으로 승진했다.

“그때는 저도 승진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김구 선생님이 ‘내가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정말 실감합니다. 내가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계속 6급 직원으로 있어도 좋습니다.”

파면당한 정씨는 지금 자신이 일하던 정부 과천청사에 공무원신분증을 달고 들어갈 수 없다. 매일 출입증을 끊고 들어간다.

2002년 3월23일 전국에서 올라온 공무원 대표들이 치밀한 군사작전 못지않은 신출귀몰함으로 고려대학교에 기습적으로 모여 치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범식에서 공정거래위원회 직장협의회 회장이자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수석부위원장이었던 정용천씨는 초대 공무원노동조합 임원을 선출하는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다. 공권력 투입 등으로 선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선거관리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도록 정해져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으니, 정씨가 명실상부하게 공무원노조 출범의 총대를 멘 셈이다. 그날 경찰에 둘러싸인 공무원들이 팔을 내뻗으며 “폭력경찰 물러가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한동안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날 저는 행사장인 고려대 대강당에 좀 늦게 도착했어요. 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이 주로 회의를 진행했지요. 나중에 경찰들에게 붙잡혀 나오는데 어떤 동지가 ‘저 사람 비상대책위원장 맡은 사람이다. 빼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알려줘서 고려대생들이 달려들어 저를 빼냈습니다.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초대 임원을 선출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두번 소집해서 4월3일에 지역별로 선거를 치렀는데, 아침에 운동하는 것처럼 모여서 투표하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모여서 투표하기도 하고…. 대부분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지부 하나 없이 마감시각까지 완벽하게 전국에서 선거가 무사히 끝났을 때의 그 감격이란… 정말 대단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에서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었던 정씨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공무원노동조합은 그 출발이 한참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파면당할 것은 그때쯤 이미 예상하지 않았나요? 공무원 신분이 박탈될지도 모르는데, 마음의 갈등은 없었나요?” 내 당연한 질문에 정용천씨는 또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공무원노조를 사회 발전의 대안으로

“공무원노조의 당위성에 대한 신념이나 올바른 일을 한다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지도부에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준비 과정에서부터 서서히 마음에 각오를 다졌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랬을 거예요.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이 모두 함께하는 가장 이상적인 이런 조직은 세계적으로 없습니다. 중앙부처 조직의 협상력과 지자체 동지들의 힘이 함께 발휘된다면, 조금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공무원노조가 사회 발전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부가 마련하고 있는 공무원노동조합 관련법은 그런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껍데기뿐인 법이어서 옳지 않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조직실장 겸 농림부지부장을 맡고 있는 한성권씨에게 정용천씨에 대해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만일 파면당했더라면 저렇게 열심히 활동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중앙·과천·대전 청사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 있는 중앙부처에서 지부로 전환하는 조직이 앞으로 속속 나올 텐데, 그 일들이 모두 정용천 본부장이 열심히 활동한 결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나가던 다른 동료가 또 한마디 보탠다. “공정거래위원회라면 ‘경제검찰’이라고 부를 정도로 힘 있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도 있는 사람이….” 정확하게 끝맺지 않은 그 다음 말을 채우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겠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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