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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옥] 속기사는 왜 깜짝 놀랐을까

등록 2004-02-12 00:00 수정 2020-05-03 04:23

‘비상식적인’ 기존 정치에 대한 서울시의회 심재옥 의원의 ‘상식적인’ 도전 이야기

글/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민주노동당 지구당 사무실 같은 곳을 찾아갈 때는 항상 마음이 무겁다. 나는 일찍이 포기해버린 삶을 아직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이른 아침 사무실에 나와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 홍보물을 만들거나 발송하고 집회에 나가 피켓을 들거나 서명을 받는 온갖 일들을 하는 그 사람들에게 “한달에 얼마나 받느냐?”고 함부로 물어보다가는 ‘내가 당신들처럼 돈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오?’ 하는 눈총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한테서는 냄새가 나”

서울시의회 심재옥(39) 의원을 만나러 가면서 내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것은 추운 날씨 탓이 아니라 그런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공덕동 굴다리 앞 허름한 건물 4층에 자리한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사무실 앞에 올라서니 문에 종이가 한장 붙어 있다. “하종강 선생님 누추한 곳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기자님도 어서 오세요.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상근자 일동”. 이렇게 작은 마음 씀씀이에도 울컥 목젖이 젖는 여린 마음을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뒤에 사무실에 들어선 류우종 사진기자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제가 사진으로 찍었습니다”라며 무척 감격한 얼굴이다.

그동안 심재옥씨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인상부터 자신있게 말했다. “어린 시절에 어렵게 살지는 않았지?” 내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무척 어렵게 살았어요. 내가 바로 결식아동이었어요. 그게 고생이라는 생각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고 자랐어요. 내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딸만 넷인 살림을 어머니가 온통 책임지셨지요. 식당 일을 주로 많이 하셔서 어머니의 옷에는 항상 비릿한 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엄마한테서는 냄새가 나’ 그렇게 말했다가 어머니가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이 빨개지신 적이 있는데, 한참 자라서야 그게 참 철딱서니 없는 짓이었다고 후회했어요. 챙겨줄 사람도 없이 하도 굶어서 ‘나는 아마 서른살 되면 병들어서 죽을 거야’ 그런 생각하면서 살았다니까요.”

‘나의 인생은 아마 불행할 것이다’라는 사춘기 시절 나의 막연한 예감은 심재옥씨의 경험에 비추면 차라리 사치에 불과했다.

충남 서천 장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느라고 서울로 왔다. 식품영약학을 선택한 것은 취직이 잘되는 학과였기 때문이다.

“도시락 회사에서 영양사로 일했는데, 아주 열악했어요. 식단 짜고 칼로리 계산하는 일 말고 시장 보는 일부터 설거지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어요. 일이 몰리는 주말에는 48시간을 쉬지 않고 일했는데 전무란 사람은 ‘너는 지금 일을 배우는 과정이다. 우리가 돈도 받지 않고 가르쳐주는 것이니 고맙게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어요. 나중에 노동법 공부하면서 ‘이 사람을 언젠가 찾는다면 내가 한번 혼내줘야지’ 생각했지요. 땟국이 잔뜩 묻은 영양사 가운을 집에 놔뒀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오셨다가 그걸 보시고 가슴 아파서 우셨대요. 평생 식당 일을 하시면서 자기 딸은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엄마가 그 옷을 빨면서 그렇게 펑펑 우셨대요….”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한 심 의원은 허겁지겁 일어나 커피를 타러 가는 척했고, 류우종 기자와 나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잠시 동안 딴청을 피워야 했다.

격무로 다리 관절이 아파져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잠시 쉬다가 초등학교 ‘잡급직 과학실험보조원’ 일을 시작했다. 타이핑을 시키는 교장선생에게 “나는 과학실험 보조원이지 타이피스트가 아니다”라고 따져 결국 교장이 사과를 한 일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상사한테 짓눌리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퇴근길에 최루탄 공격을 당하는 시위대를 만나면 약국에서 휴지를 사다가 나눠주고 그러다가, 신문에 난 요만한 광고를 보고 ‘청년학교’라는 곳에 스스로 찾아가 등록을 했는데….”

내가 말을 끊고 물었다. “혹시 어느 신문이었는지 기억나요?” 심 의원이 지체없이 답했다. “당연히 이지요.” 묘한 동류의식으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데 심 의원이 덧붙였다. “한홍구 선생님을 그때 처음 거기서 뵈었어요.” 이래서 세상은 살맛이 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구로 지역에서 노동야학 활동을 했다. 그 ‘울림야학’이 나중에 ‘노동자종합학교’로 탈바꿈할 때, 심씨는 과학실험 보조원으로 월 7만원쯤 받으며 한푼두푼 모은 20여만원을 몽땅 그 공간을 마련하는 데 털어넣었다. 학교에 사표를 내고 ‘노동자종합학교’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결단이었으리라. 나는 묻지 않아도 답을 뻔히 아는 질문을 했다. “그때부터 어렵고 눈물 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

달달 떨면서 받은 돈 1만원

“직장도 없어 보이는 애가 만날 꼬질꼬질해서 다니니까 언니가 한번은 ‘너 왜 이렇게 사니….’ 펑펑 울면서 만원을 주는 거예요.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달달 떨면서 그 돈을 받았어요. 차비가 없었거든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 물어보자. 심씨가 그때 한 결단이 그의 인생에 보탬이 되었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었는가? 우리 사회에는 유익했는가, 아니면 해로웠는가?

그 뒤 심씨는 경제단체노조협의회(경제노협),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전문노련), 전국공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익노련)의 조직 담당 간부를 두루 거쳐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 여성국장 및 정치국장을 하다가 서울시의회 102개 의석 중 유일한 민주노동당 의원으로 진출했다.

노동조합 상급단체 간부 시절, 내가 아는 심재옥 동지는 남성 간부들에게 존경 반, 두려움 반의 대상이었다. 여성문제에 대해 무지한 활동가들은 심 동지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무렵 우연히 나를 만난 심재옥씨가 “하 소장님, 안녕하세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지나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심 국장이 저렇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을 보니, 소장님 정말로 훌륭하신 분이군요. 다시 보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서울시의회 의정 활동을 하면서 심 의원은 숱한 화제를 뿌렸다. 내가 보기에 세간의 그 화제들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기존 정치에 대한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도전의 결과다. 서울대공원 청소용역노동자, 장애인 이동권, 지하도상가관리조례, 서울시농업기술센터 존폐, 청계천 복원, 재건축조례, 성미산 살리기, 학교급식조례에 관한 활동들뿐 아니라 오갈 곳 없는 중국 동포의 국적 취득을 도운 일 등 의회 안팎의 많은 활약들 중에 단 하나도 이곳에 제대로 옮기기에는 너무 버겁다.

최우수의원의 ‘영예’도 초라하다

궁금한 이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거나 심 의원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실시한 서울시 의원 102명에 대한 1년간의 평가에서 심재옥 의원이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된 것을 언론들은 ‘영예’라고 보도했지만, 비상식적인 정치에 대한 그의 상식적인 도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예가 오히려 초라하다.

의회 속기사들은 높은 책상 위에 기계를 올려놓고 그 위에서 손작업을 한다. 노동자 건강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도 텔레비전에서 수없이 그 장면을 봤지만 그냥 지나쳤다. 심재옥 의원은 속기사에게 “팔이랑 어깨 안 아파요?” 그렇게 묻는 사람이다. 속기사가 답했다.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런 것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만나요.” 25년 동안 허울 좋은 노동운동을 했다는 내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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