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박인해] 산동네를 변화시키고 싶다

등록 2004-01-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서울 봉천동 ‘씩씩이 어린이집’의 박인해 선생님, 그는 왜 아직도 가명으로 사는가

박인해(39)는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른다. 그의 본명 ‘박미령’을 알고 있는 ‘씩씩이 어린이집’ 엄마들도 그를 부를 때는 ‘박인해 선생님’이 더욱 익숙하다. 한국보육교사회 직원들이 나에게 소개해주면서 일러준 이름도 ‘박인해 선생님’이었다.

한때 우리 사회 활동가들이 가명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가 “아는 이름 하루에 300명만 불어” 따위의 조사를 받으며 작명소를 차리다시피 거짓 이름을 지어낸 것까지 모두 합하면 1980년대 우리 사회에서 가명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줄잡아 수십만명은 될 것이다. 그 수십만명의 활동가들 중에서 아직까지 가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없다. 유독 박인해씨가 아직도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계속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태일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88년 서울 서초동 비닐하우스촌 ‘꽃동네 놀이방’에 처음 교사로 들어갈 때 선배 언니가 지어준 이름 ‘박인해(仁海)’를 박씨는 지금 봉천동 씩씩이 어린이집에서까지 15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혹시 학생운동 출신일까? 나는 천박스러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학은 다녔느냐?”고 물었다. 아, 이 알량한 학벌주의여….

“돈암동 산동네에서 성장기를 보냈어요.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다녔지요. 8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후기에 붙었는데, 아침에 어렴풋이 잠결에 들으니까 어머니가 등록금 빌리는 전화를 하고 계신 거예요. 일어나서 ‘내가 평소에 가고 싶었던 대학도 아니다.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굳이 대학 갈 필요 있겠나. 포기하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지요.”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조합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가 선배 언니의 눈에 들었다.

“직장인들이 모여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어요. 을 읽다가 ‘나는 이게 내 생활이었다’고 말했어요. 중3 때 집이 그나마 더 기울었어요.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등록금을 벌어야 되잖아요. 먼 친척이 청계천에서 봉제공장을 하고 있어서 거기서 ‘시다’ 일을 했어요. 방학 동안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쪽가위 들고 실밥 뜯는 일을 정말 했다니까요. 그곳에도 고개를 들 수 없는 2층 다락방이 있었어요. 에서 다락방 얘기 나오고 할 때 ‘나에게는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선배 언니가 서초동 꽃동네 놀이방에서 같이 일하자고 하더군요.”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사당동·철산동 등 서울 곳곳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이 ‘살 만하다’는 소문을 듣고 속속 서초동 꽃동네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꽃을 재배하던 비닐하우스에 칸막이를 하고 담요를 덮고 온돌을 깔아 사람들이 들어가 살다가 나중에는 아예 나무 골조로 주거용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파는 사람들이 생겼다.

“비닐하우스라고 해서 저도 처음에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그곳에서 햇수로 7년을 살았어요.”

문을 닫으면 대낮에도 컴컴한 3.5평 놀이방에서 두명 혹은 세명의 교사가 20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봤다. 봄에 들어온 아이들이 처음에는 발을 서로 맞대고 양쪽에 나란히 누워서 낮잠을 잤는데, 겨울이 되면서 아이들이 자라서 발을 서로 비껴서 포개고 잠을 잤다. 교사는 앉아 있을 자리도 없어서 아이들이 잠을 깰 때까지 문 앞에 쪼그리고 있어야 했다. 그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박 선생님은 아이들 걱정을 한다. “그때 생각하면, 아이들한테 참 미안한 게 많지요.”

놀이방이 끝나면 곧 이어서 저녁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시작했다. 밤에는 부모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동네사람들이 의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다 큰 처녀가 아이들을 보러 들어왔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그러다가 차츰 신뢰가 쌓여 주민자치회가 만들어질 때는 놀이방 교사가 자치회 총무를 맡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과 일거수일투족을 같이하면서 자연스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아이들에게 위로받으며 일했던 시간

서초동에서 겪었던 일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그냥 제 청춘을 그곳에서 다 보냈어요. 스물네살에 들어가서 서른살에 나왔으니까….” 그래도 하나만 이야기해달라고 졸랐다.

“동네에 비상이 자주 걸려요. 비닐하우스촌은 재개발 지역과 달리 언제 철거반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무기한 철거지역이거든요. 중요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놀이방 ‘이모’들이 오지 않으면 동네분들이 불안해하세요. 아이들을 놓고 나갈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터졌어요. 지금도 이 얘기하면 다른 보육교사들이 ‘너희들은 교사로서 그런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이들한테 단단히 부탁을 하고 나갔다 왔지만 아이들이 교사도 없이 노니까 어땠겠어요. 굉장히 긴장된 상황에 있다가 밥은 해줘야 해서 돌아왔는데, 정말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모가 나가서 엄마들하고 동네 일하다가 왔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많이 어질러놓고 있으면 이모가 더 힘들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 다음날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애들한테 또 죄를 짓고 나갔지요. 밥하러 돌아왔는데, 불이 꺼져 있고 애들 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다. 애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나 보다, 식은땀이 좍 흐르더군요. 아이들한테만 맡기고 나가면서 늘 불안해하던 일이 드디어 터졌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문을 딱 여니까 아이들이 그림같이 완벽하게 방을 정리해놓고 벽에 나란히 붙어 앉아 있는 거예요. 이모가 내려올 시간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래주고 싶었다’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눈물 진짜 많이 났어요. 네다섯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한테 우리가 그렇게 위로받으면서 일했어요. 지금도 그 아이들 얘기하면 그 느낌이 이렇게 와요.” 박씨는 가슴을 지긋이 눌렀다.

그렇게 시작한 일을 박씨는 지금까지 봉천동 씩씩이 어린이집에서 15년 넘게 하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박인해 선생님을 이 길에서 내려서지 않도록 계속 붙들어온 기둥은 무엇일까?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잖아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불행을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고 있잖아요.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갈수록 불가능해져요. 우리가 노력해서 아이들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바꿔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변화시켜야 하고, 지역도 변화시켜야 하고…. 그것이 지금 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보육교사들이 중심에 갖고 있는 생각이에요.”

매년 최고 연봉액을 경신한다?

씩씩이 어린이집은 봉천동 지역에 있던 씩씩이 놀이방, 재롱동이 아가방, 봉천동 애기방 이렇게 3개의 시설이 통합하면서 97년에 문을 열었다. 세개의 시설이 본래 “다른 집이면서도 같은 집 같은 분위기”여서 통합할 때 지분을 따진다는 둥 세속적 문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설장인 ‘책임교사’ 직책은 교사 세 사람이 2년 임기제로 돌아가면서 맡는다. 기득권을 오래 누리면 전횡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가장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겨우 자급자족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의 헌신성에 기초한 교사들의 낮은 생활비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박인해씨는 “매년 최고 연봉액을 경신하고 있다”며 웃는다.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