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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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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기] 가슴 아프되 당당한 퍼포먼스

등록 2003-10-03 00:00 수정 2020-05-03 04:23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김학기씨… ‘손 절단의 추억’에서 재활 성공에 이르기까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서울 구로시장 허름한 건물의 지하실로부터 시작된다. 바닥에 깔린 비닐장판은 물기로 번들거렸고 A4 복사용지에 출력해간 교육자료는 단 몇분 만에 습기를 먹고 눅눅해져서 종잇장이 축축 늘어졌다. 그런 곳에 손발이 잘리고 허리를 다친 노동자들이 열서너명쯤 모여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교육준비를 마저 하고 있는데 사무실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회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크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 위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야, 임마. 너는 잘된 거야! 팔 하나 잘리고 4천만원 받았잖아! 네가 앞으로 평생 노동자로 살면서 돈 모으면 현찰로 4천만원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애? 너는 잘된 거야. 행복한 줄 알고 살라고.”

돌아보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팔이 없다. “나는 팔 잘리고 한푼도 못 받았어! 너는 4천만원이나 받았잖아! 너는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지?” 산재사고로 팔을 잘린 뒤 4천만원을 보상금으로 받고 절망에 빠져 있는 노동자에게 그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4천만원이면 서울 변두리 허름한 당구장 하나를 인수할 수 있는 돈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이 나였다면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났을 것이다. 사지가 멀쩡한 내가 팔 잘리고 4천만원을 보상금으로 받고 절망에 빠져 있는 노동자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은 없다. ‘아, 위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그날 이후 나는 감히 산재 노동자를 위로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버렸다.

10년 전 그날 그 자리에 김학기(37)씨가 있었다. 한쪽 손의 손가락을 대부분 잃었지만 얼굴이 해맑은 청년 하나가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단체의 감사를 맡았다”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김학기씨가 인천 지역에 이사와 새로 세운 단체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그와 마주 앉았다. 그가 다친 경위를 자세히 듣기는 그를 알게 된 지 10년 만이다.

“부산에 있는 제지회사에서 보일러기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난 1992년 1월4일이었는데, 현장에서 원료 말리는 스팀 기계를 다 고쳤으니 보일러를 다시 가동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보일러 켜고 현장에 가서 밸브를 열어주는 것이 제 일인데, 가서 보니 기계에서 나온 원료가 다음 롤러로 연결되지 못하고 잔뜩 쌓여 있는 거예요. 나는 밸브만 열어주고 보일러실로 돌아가면 되니까 그때 그렇게 했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교대 근무자들이 아직 다 나오지 않아서 인원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그거라도 내가 좀 치워주면 동료들 수고를 덜겠다 싶어서 불량을 걷어내고 다음 롤러에 연결시켜주느라고 툭툭 치는데 순간적으로 종이원료와 함께 손이 롤러에 말려들어갔어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도 못 듣는 거예요. 나 혼자 아무리 손을 빼려고 해도 안 빠져서 차라리 팔이 빠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팔의 피부와 근육이 막 비틀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 다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이 올 때까지 5분에서 10분 정도 걸렸을 거예요. 수건으로 팔을 둘둘 말고 회사 앞 지정병원에 갔더니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부산에 있는 가장 큰 병원에서도 팔을 손목 위에서 절단하자고 했다. 아무리 근육이 상했다지만 손가락들이 그냥 붙어 있는 손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서울 고대구로병원까지 왔다. 다리 근육과 피부를 팔에 이식하는 수술을 7번이나 받으면서 다행히 팔목 위 절단은 면했지만 오른쪽 손가락을 대부분 잃었다.

IMF, 산재노동자들의 기구한 운명

“부모님께는 처음에 연락을 안 드렸어요. 고대구로병원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알고 오셨는데, 너무 죄송한 거예요. 이제 다 키워주셔서 군대에서도 제대했고… 힘든 일 다 지나고 이제부터 부모님께 잘해드릴 때가 됐는데… 그걸 못하게 됐다는 생각 때문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고대구로병원에 있으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병원에 있는 산업재해 노동자들과 함께 ‘둥지회’를 만들어 병원 잔디밭에 모여 앉아 노동법도 공부하고 토론도 하면서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와 인연을 맺었다.

“병원 방문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병원에 다니면서 명함 뿌리는 브로커들이 워낙 많으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요. 한달 가까이 지났을 때, 어떤 환자가 말은 하지 못하면서도 도와줬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는데, 뭔가 가슴에 팍 느껴지더라고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내가 다쳐서 오히려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보다 더 많이 다친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고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서울에 세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 아들이 결혼한다고 방을 빼라고 해서 쫓겨날 판이 됐는데, 생활정보지를 보니 인천에 가면 서울 전세방 보증금으로 내 집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구입자금의 세배나 되는 은행융자를 끼고 작은 연립주택을 분양 받았는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경제위기 사태가 터지더니 은행 이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회장 임기를 마치고 생업에 뛰어들었다.

작은 트럭을 사서 인천 아파트단지들을 돌면서 과일장사를 열심히 하는데, 근로복지공단이 “IMF 체제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대책”을 내세우면서 산재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치료 종결 조치와 척추환자들에 대한 불이익 조치가 횡행하더니 마침내 치료를 거부당한 산재 노동자들이 자살하는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장에 몇번 올라가 참여했는데, 어느 날 갔더니 천막 다 철거당하고 42명이나 연행되고 쑥대밭이 된 거예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내가 달라붙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 트럭을 농성장에 박았어요. 그 차를 유족들 숙소로 쓰고 다른 사람들은 천막에서 자고…. 나중에 투쟁기획팀장을 맡았어요.”

“손을 감추고 장사할 생각은 없다”

사람들은 근로복지공단 경비실 옥상에서 김학기씨가 머리띠를 두 눈에 감은 채,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비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한다. 결국 김씨는 그 투쟁으로 1999년 11월에 구속됐다가 70일 만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는 지금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부평역사 쇼핑몰 지하 2층 256호에서 ‘퍼포먼스’라는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액세서리 가게를 열게 된 계기는 또 이렇다.

“산재 노동자 재활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번 직접 겪어보고 싶었어요. 다시 맡았던 산재노협 회장 임기를 마치고 안산 재활훈련원에 들어가 금속공예와 귀금속기능사 자격 두개를 땄어요. 전공과 사업을 꼭 연결지어보고 싶더라고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사에 불리한 점은 없느냐고 물었다. “왜 없겠어요. 초등학생들은 제 팔을 보고 스스럼없이 ‘아저씨, 왜 다쳤어요?’라고 묻기도 해요. 그렇지만 아가씨들은 제 손이 보이면 얼른 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손을 감추고 장사할 생각은 없어요. 가게 이름을 ‘퍼포먼스’라고 붙인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장애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이에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김학기씨의 삶 그 자체가 훌륭한 퍼포먼스다.

글·사진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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