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서울 잠실야구장이 철거된다. 돔구장으로의 재건축을 위해서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KBO) 출범과 함께 개장한 잠실야구장은 뭇 야구팬들의 ‘처음’이자 프로야구의 상징과도 같다. 경기장 외벽의 ‘야 구 장’이라 적힌 예스러운 폰트에서부터 그곳만 가면 세월이 고인 듯 1980년대 로드뷰 느낌이 물씬 난다.
또 하나의 야구장이 있다. 세계 유일의 여자프로야구리그인 미국 여자프로야구(WPBL)가 열리는 미국의 로빈 로버츠 스타디움이다. WPBL은 동부의 두 팀(뉴욕 하이츠·보스턴 헌터스)과 서부의 두 팀(로스앤젤레스 퀸스·샌프란시스코 파이어벨스)으로 구성됐지만, 경기는 중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로빈 로버츠에서만 열린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잠실야구장과 비교하면 남의 집 담벼락, 주차장 등 훨씬 정겨운 뷰를 자랑한다. 최대 2만5천 명까지 수용 가능한 잠실야구장과 달리, 여기는 최대 5천 명이 전부인 미니 구장이다.
여기서 뛰고 구르고 땀 흘렸던 여자들의 리그가 2026년 9월22일 막을 내렸다. 72년 만에 부활한 것치고는 너무 짧은, 두 달간의 여정이었다. 44년 전, 잠실야구장이 남자 야구선수들에게 ‘프로’에의 길을 열어줬듯, 여자 야구선수들에게 로빈 로버츠가 그런 곳이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세계 10개국 선수들이 로빈 로버츠로 모여들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KBO를 통해, 사람을 착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항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KBO 원년에서부터 세상이 ‘프로복음’으로 넘쳐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는 정언명령,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멸시, ‘프로는 끝까지 책임진다’에 담긴 야근을 생활화하자는 풍토….
흥미로운 것은 그가 쓴 총 11호에 이르는 프로복음 가운데 여자가 직접 호명된 마지막의 두 개다. 10호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와 11호 ‘프로주부 9단’. 전자는 아름다운 외양을 가꾸기 위해 ‘여자여, 옷을 사 입어라’라는 광고 문구고, 후자는 ‘살림도 육아도 프로로 하라’는 주입식 교육이다. 여자는 프로가 되기 위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코르셋이 작동하고, ‘주부’라는 자리로 한정된다는 방증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여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착즙 노동자’로도 편입되기 힘든 현실에 쓴웃음이 난다.
소설이 예언서였는지, KBO가 출범한 지 44년이 흐르고 책이 나온 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 한국에는 여자프로야구가 없다. 미국에서는 72년 만에 부활했지만, 거기서도 선수들이 엄밀한 의미의 ‘프로’라고 보긴 어렵다. 경기당 급여가 300~500달러로, 팀당 15경기(정규시즌 기준)를 모두 소화해도 우리돈으로 600만~1천만원 정도다. 야구로 돈은 받지만, ‘전업으로서의 야구’는 아직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먼저 그곳에 간 김라경·박주아·김현아가 있어, 후배 여성들도 따라서 꿈을 꾼다. 여자선수 최초의 유소년 야구 국가대표인 최서윤은 얼마 전 시비에스(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서 세 선수를 자신의 롤모델로 언급하며 WPBL 진출이 꿈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야구로서 내 인생 승부를 볼 거다”라는 앵커의 질문에 “네”라고도 했다. 그는 국가대표로 세계대회에 출전하고도, 국내 소년체전에서는 ‘남자부’라는 허들에 가로막혔다.
김라경·박주아·김현아가 야구로만 입에 풀칠하며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10년 후 최서윤도 WPBL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2032년 개장할 잠실 돔구장에는, 여자 선수도 시구자가 아닌 플레이어로 서길 바란다. 지나친 기대가 아닌, 프로의 자격이 성별로 나뉘는 세상에 대한 나의 반항이다.
이슬기 칼럼니스트·유튜브 ‘이슬기의 비트윈’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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