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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는 왜 하청 노조 파괴에 열 올렸나

등록 2026-03-19 20:44 수정 2026-03-23 18:20
권아무개 전 세브란스병원 사무국장 주재로 열린 회의의 보고서. 공공운수노조 제공.

권아무개 전 세브란스병원 사무국장 주재로 열린 회의의 보고서. 공공운수노조 제공.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 지원”과 “(청소노동자) 민주노총 탈퇴”를 한자리에서 논의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이 청소노조를 괴롭히고 탄압하던 2016년 7월, 하청업체 태가비엠과 논의한 주제입니다. 회의록을 보면 출판기념회 지원, 제설장비 구입 등 평범한 업무 가운데 ‘병동 8명 민노 탈퇴 추진 중’이 불쑥 등장합니다. 하청 노조를 향한 회유와 탄압이 사무국과 태가비엠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 기괴한 느낌이 듭니다. 건물을 쾌적하게 관리하려는 열심과 그 공간을 유지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없애려는 열심이 위화감 없이 공존한다는 게요. 노조 파괴 핵심 설계자인 최아무개 전 사무국 파트장은 “조합원 8명 고발” “집회 선명하게 사진 촬영” 등 심리적 압박 전략을 깨알같이 수첩에 적었습니다. 수사망이 죄어올 땐 불안했는지 스스로를 다잡기도 했습니다. “떨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불이 꺼지게 된다.” 그의 바람과 달리 병원과 태가비엠이 주고받은 수많은 노조 파괴 문건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병원은 왜 그렇게까지 하청 노조 파괴에 열을 올렸을까요? 수사 자료를 보며 세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첫째는 ‘저임금 착취 유지’입니다. 병원은 민주노총 노조가 만들어진 이유를 아주 잘 알았습니다. ‘최저시급에 대한 불만’ ‘병원 전반 노동강도 대비·타 병원 대비 낮은 시급’ 등을 설립 배경으로 분석했죠.(‘민주노총 세브란스 침투 현황과 대응방안’ PPT 중) 그 현실을 바꾸려는 결단은 없었습니다. 변화의 열망을 꺾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죠.

둘째는 노동자의 권리 요구를 죄악시하는 시선입니다. 2017년 5월 태가비엠은 현장감독 ㅎ씨가 산업재해를 당했다고 병원에 보고했습니다. ㅎ씨가 환자 부주의로 병원 출입문에 부딪혀 다리를 다쳤는데도 “극구 치료비를 사양했다”는 겁니다. 병원과 태가비엠 쪽은 그의 태도에 흡족해하며 “민노 조합원이었다면 더 큰 문제 아니었겠냐”고 메모했습니다.(2017년 5월26일치 ‘상황공유’ 문건) 병원과 태가비엠이 바라던 노동자상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죠.

셋째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소란’으로만 보고 통제하려는 욕구입니다. 권아무개 전 병원 사무국장은 수사받을 때 “환자들이 있는 공간이어서 시끄러우면 안 된다” “병원은 진료를 보는 환경이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청소노동자들 또한 환자를 위해 쾌적함을 제공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잊은 듯했습니다.

“병원이 지금까지 조성한 판타지를 지키려고 더 격렬하게 반응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자본은 늘 깨끗하고 반들반들한 건물, 세련된 최신식 설비만을 보여주려 하죠. 거기에 빗자루 든 청소노동자는 등장시키지 않아요. 그렇게 이른바 ‘은폐돼야 할 존재’ ‘투명인간’에 가까웠던 이들이 빨간색 투쟁 조끼를 입고 나와 구호를 외치니 굉장히 용납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류한승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이 말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의 하청 노조 파괴를 실행한 최아무개 전 병원 사무팀 파트장이 수사를 앞두고 적은 메모. “떨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불이 꺼지게 된다.” 그의 바람과 달리 병원과 태가비엠이 주고받은 수많은 노조 파괴 문건이 낱낱이 드러났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제공

세브란스병원의 하청 노조 파괴를 실행한 최아무개 전 병원 사무팀 파트장이 수사를 앞두고 적은 메모. “떨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불이 꺼지게 된다.” 그의 바람과 달리 병원과 태가비엠이 주고받은 수많은 노조 파괴 문건이 낱낱이 드러났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제공


그러나 세브란스병원의 청소노동자들은 은폐라는 운명을 거부했습니다. 온갖 괴롭힘과 탄압에도 노조를 만들고 스스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각자도생이 아닌 단결을 체득했죠. 그건 노동자들에게도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동료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제가 사무실 찾아가서 관리자에게 문제 제기하고 싸웠죠. 나중에 제가 정년퇴직할 때 ‘언니 같은 사람이 남아야 하는데’라는 말을 들었어요.”(전 조합원 서아무개씨) “남을 위해 산다는 걸 생각조차 못했는데 다 같이 한목소리를 내고 싸운 경험이 너무 큰 축복이었어요. 노동자 입장에서 목소리를 냈다는, 나름 대단한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죠.”(전 조합원 박신자씨)

노동자들이 어렵게 지켜낸 노조를 꽃피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2026년 3월10일, 하청 노조에게 원청 사용자와 교섭할 권리를 보장한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란봉투법’)이 시행됐습니다. 그러나 법 개정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노조랑 대화하느니 파괴하겠다’는 사용자의 태도는 이미 관행처럼 널리 퍼졌기 때문이죠. 정부는 원청 사용자의 하청 노조 파괴를 끊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노란봉투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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