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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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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운동장의 주인

등록 2025-08-22 09:55 수정 2025-08-25 10:32
2025년 7월31일 저녁 경남 창녕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첫 경기의 하프타임, 인천 가림초 선수들이 경기에 뒤진 상황에서 감독의 작전 지시를 듣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2025년 7월31일 저녁 경남 창녕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첫 경기의 하프타임, 인천 가림초 선수들이 경기에 뒤진 상황에서 감독의 작전 지시를 듣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만화 ‘슬램덩크’는 나의 농구 교과서다. 14살 때 이 만화를 보고 농구에 빠졌다. ‘슬램덩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북산고와 산왕고의 경기 후반전 10분50초다. 20점 차로 뒤진 절망적 상황에서 북산고 3학년 센터 채치수는 산왕고 센터 신현철과 일대일 대결을 포기하고, 같은 학년 슈터인 정대만을 위해 스크린을 건다. 산왕고 수비수의 이동 경로를 막아 동료의 득점 기회를 만들어주는 움직임이다. 이 스크린에 정대만은 수비의 방해 없이 3점슛을 던져 성공시킨다. 입학 직후부터 잘난 척 경쟁하며 서로 다투기만 하던 채치수와 정대만이 2년 만에 한 첫 협력 플레이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주먹을 툭 친다. 이 장면은 내게 팀스포츠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상징이 됐다.

스포츠는 몸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한다. 운동을 거듭할수록 내 몸이 어디까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정직하게 알게 되고, 그렇게 확인한 자신의 한계 앞에 겸손해진다. 내적 수양이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같은 운동을 하며 함께 만들어놓은 최적의 폼과 움직임을 잘 따라 해야 운동에 최고의 효율을 내면서도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역사의식이다. 팀스포츠는 여기에 관계와 연대에 대한 배움을 더한다. 채치수와 정대만처럼 팀원은 단 하나의 움직임이라도 팀을 위한 의미를 담아 움직여야 한다. 팀원들이 그렇게 앞다퉈 ‘부품’이 되어 움직일 때, 팀은 유기체가 되어 팀원 수를 단순 합산한 능력치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열리면서 여성 인권이 사회 쟁점이 되고 여성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시작은 여자배구였다. 김연경의 리더십이 인기를 끌며 ‘여배’ 인기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2021년 열린 ‘2020 도쿄올림픽’ 4강 진출 이후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다만 이때까지 여성들은 관중으로 남아 있었다.

2021년 방송을 시작한 텔레비전 예능프로 ‘골 때리는 그녀들’이 열풍을 일으키면서 여성들은 관중석에서 뛰쳐나와 직접 플레이어가 됐다. 팀을 이뤄 공을 차고 서로 몸을 맞대어 도움 플레이를 하며 함께 이기고 함께 지면서 울고 웃는 팀스포츠가 주는 기쁨을 마침내 여성들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여성에게 기회와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건데, 이제는 어쩌면 관계와 연대에 민감한 여성이 처음부터 남성보다 팀스포츠에 더욱 어울리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더라도, 난관을 마주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는 멘털을 얻었고 함께 넘어갈 친구를 얻었으니까요. 이렇게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생활한 것 자체가 저에게 재산이 된 것 같아요.” 일본 사쿠요고등학교 여자축구부 주전 중앙수비수인 18살 후지이 이로하가 한 말(1578·1579호 통권합본호 ‘축구를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축구’ 기사. 2025년 8월28일 공개)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문제는 여성들이 애써 만든 이런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 여자축구 시스템이다. 소녀들은 여전히 학교 운동장에서 소년들의 눈치를 보고 있고, 전국 최대 규모 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의 잔디 상태는 최악이었으며, 학원 스포츠는 물론이거니와 최상위 리그인 더블유케이(WK)리그에서도 해체되는 팀이 속출한다. 한겨레21이 일본 여자축구 현지 르포르타주까지 보태 한 권을 통째로 ‘여축’을 주제로 만든 제1578·1579호 통권합본호에서 현장을 깊숙이 전한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한겨레21 1578·1579호 통권합본호 기사 함께 읽기 

1부 경기장에 투사된 한일 여자축구 격차

2부 여학생 선수만 강요받는 가시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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