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국힘’은 청년의 마음에서 완전히 끝났다

이태원 참사·채 상병 사망 사건에 이은 내란사태와 탄핵 부결… ‘처단’해야 할 것은 청년/시민 소모한 통치 권력
등록 2024-12-13 21:23 수정 2024-12-15 16:02
2024년 12월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탄핵안 처리 자체가 무산되자 허탈해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2024년 12월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탄핵안 처리 자체가 무산되자 허탈해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탄핵을 촉구하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은 청년들로 가득 찼다. 지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도 청년이 많았지만 이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런 시위가 벌어지면 항상 많은 수를 차지하던 4050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별로 보면 다수가 여성 청년이었지만 남성 청년이 없던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응원봉을 들고 케이(K)팝에 맞춰 몸을 흔들며 탄핵을 촉구했다. 시위 현장에서 항상 듣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듣기 힘들었다.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사자 구호에 ‘팔뚝질’하며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투표해!” “빨리 해!” “들어가!” 등 사(4)자 구호가 아니라 삼(3)자 외치기였다. 경찰들을 향해 질타하면서 먼저 ‘도발’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윤석열의 계엄’은 또 하나의 ‘5·18’

연단에서 발언하는 사람도 달라졌다. 1980년대 ‘의장님’ 스타일로 마이크를 꺾어가며 자기를 소개하고 비장미 넘치게 연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도 그랬다. 그중 가장 웅변조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연설한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의 경우에도, 연설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본회의에서 의결하지 않고 집단 퇴장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문제를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함께 참가했던 40대 중반의 평범한 생활인인 후배가 당황할 정도였다. “그래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부를 줄 알았는데….”(아마 어디선가 어느 대목에서는 불렀는데 우리가 듣지 못했을 수 있다.) 그는 “시위에 참가할 때 필수품이 달라졌다”며 “다음에 나오기 위해 응원봉과 기타 물품들을 잘 관찰했다가 꼭 챙겨와야겠다”며 웃었다.(실제로 한 친구는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근에서 아이돌 원봉을 딸을 통해 구매했고 그 김에 출퇴근 때 그 아이돌 노래를 듣고 있다고 했다.)

여의도에서 돌아오며 한 정치세력이 한 세대의 마음에서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다. 이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 정치세력은 국민의힘(이하 ‘국힘’)이다. 이 세대는 정서적으로 ‘국힘’을 계승하는 그 어떤 세력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반대를 넘어 이 정치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감각과 정서에 뿌리 깊게 자리잡을 것이다. 이렇게 자리잡은 정서적 거부감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이 세대의 집단적인 습속, 아비투스로 작동하지 않을까 한다.

비교하자면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이른바 86세대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을 계승한 그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것도 정서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물론 이 말이 저 세대에 속한 모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나아가 ‘86’ 중에서도 저 당에 들어간 이도 많다.) 이들 세대를 관통하는 것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의에서 밝혔던 것처럼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을 본 충격이었다. 총칼에 난자당하고 짓밟힌 사람들의 모습은 이 세대에 민정당을 계승한 정당에는 그 어떤 정통성과 정당성도 부여할 수 없다는 강력한 도덕적 외상을 남겼으며 그 후계자들을 지지하는 것은 단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이 정서가 아주 오랫동안 진보정당에는 큰 걸림돌이 됐다. 민주노동당이 성공적으로 시작한 적도 있었지만, 그 이후 정치적으로 결정적 고비마다 이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민정당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것이 민주당이 “미워도 다시 한번”을 매번 반복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때마다 이 세대에 속한 이들은 진보정당에 ‘미안’해하며 다음에는 꼭 진보정당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했지만, 그 ‘다음’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는 진보정당 스스로 초래한 혼란과 실책으로 그 ‘미안함’마저 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청년에게 국힘은 ‘생명 위협 정당’

한국 보수정당을 전두환의 민정당 후계자로 인식하는 86 세대처럼 이번 12·3 내란사태와 탄핵 부결은 강렬하게 지금의 청년 세대 머릿속에 각인됐다 . 이후 어떤 보수정당이 나오더라도 국힘 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한, 청년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란을 일으키고 탄핵을 거부한 정당 , 국힘 의 후계로 인식되어 거부당할 것이다 .

단지 그들이 내란을 획책하고 탄핵을 거부한 서울과 여의도에서 벌어진 일 때문만이 아니다. 계엄을 선포한 순간 전국 군부대에 ‘경계태세 2’가 발령됐다. ‘모든 휴가자와 출타자는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대대장급 이상 현장 지휘관들은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주요 부대는 탄약을 나눠줄 준비를 하고 대기 초소에는 병력이 추가 배치되며 출동 태세를 완비해야 한다. 강원도 접경지역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는 유서를 쓰게 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경험이 청년들에게 무엇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군에 있는 청년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그의 친구에게 어떤 경험으로 각인될 것인지에 대해 국힘의 정치인들이 조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자신들을 내란을 위해 소모되는 총알 정도로 여긴 윤석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탄핵하기는커녕 결과적으로(굳이 붙여준다면) 옹호한 자신들이 이들의 마음에 무엇으로 인식될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이 경험을 잊고 국힘을 지지할 일이 있을 것 같은가? 어림없는 소리다.

더구나 청년들의 이 인식은 윤석열 정권 동안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동되며 이 정치세력에 청년들의 목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적 서사를 만든다. 그 첫 번째에 이태원 참사가 있다. 159명이 사망하고 196명이 다친 이 참사에 윤석열 정권이 보인 태도는 철저한 외면이었다. 군중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으며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은 없다는 것이 일관된 태도였다. 많은 이는 이태원 참사 현장에 참배하러 와서 주저앉아 울던 청년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한 학생의 말처럼 문자 그대로 자기도 그날 거기에 갈 수 있었고, 희생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병대 채 상병 사건이 있었다. 이태원 사건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아 벌어진 참사라면 채 상병 사건은 국가가 자신을 ‘재난 복구자’로서 존재 증명하기 위해 안전 수칙조차 무시하고 젊은 생명을 무리하게 동원하다 희생시킨 참사였다. 이 두 참사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책임을 규명하고자 한 부하 군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벌거벗겼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한국의 보수 정치는 청년들의 생명을 언제든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다. 탄핵 거부란 이들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소모하려는 권력에 책임을 묻는 대신 면피시켜준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권력 앞에 청년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벌거벗긴 생명’이었다.

당연히 이 정치세력은 청년들에게 존재할 가치가 없는 정당이 됐다. 아니,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한 정당이기에 없어져야 할 정당이다. 한때 한국의 보수정당이 제기했던 공정성에 기반을 둔 2030과 뿌리 깊은 보수 지지 세력인 6070으로 이미 기득권이 된 4050을 포위하는 ‘세대포위론’은 이번 내란과 탄핵 거부로 완전히 끝났다. 또한 젠더를 갈라치기 하는 것으로 보수 세력의 청년 기반을 만들려고 하던 전략도 적어도 이 정치세력과 그 계승 정당을 통해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이 처한 보편적 운명 ‘벌거벗은 생명’

청년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정치세력이 성공할 리가 없다. 사실 그들이 잃은 것은 세대론적인 청년들의 마음만이 아니라 ‘청년’으로 대변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윤석열 정권에서 청년은 권력 유지를 위해 언제든 일회용으로 동원하고 버려버리는 정치세력에 의해 희생되는 최전선의 이름이다. 이태원과 채 상병, 그리고 내란에 동원된 청년들만의 특수한 상황이아니라 이 정권에서 시민들이 처한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보편적 운명에 대한 구체적 이름이 청년이다.

그러나 바로 이 ‘벌거벗은 생명’이 주권자의 다른 모습이다. 권력에 의해 언제든 죽임을 당하더라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존재였기에 ‘벌거벗은 생명’은 권력에 자신의 삶/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오로지 돌려받을 것만 있다. 그는 그 권력과 협상할 필요도, 타협할 이유도 없이 순수하게 오로지 그 권력을 ‘처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처단’할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주권자다.

여기에 윤석열 정권의 가장 큰 범죄가 있다. 주권자를 참칭하며 주권자의 자리를 빼앗은 죄다. 포고령에 등장한 ‘처단’이라는 말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자신만이 이 공화국의 주권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법률은 고사하고 헌법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다. 주권자란 정치공동체의 근간인 헌법을 기초하는 자이지 그 헌법에 충성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을 주권자라고 생각하는 그가 헌법에 충실하게 계엄을 선포할 리가 없다. 따라서 내란 과정에서의 엉성함 대부분은 준비가 부족해서 벌어진 문제도 있겠지만 유일한 주권자라는 윤석열 정권의 자기 인식에서 기인했다.

그사이에 또 새로운 주권자들이 등장했다. 대통령의 직무를 법적으로 정지하는 탄핵이나 하야 없이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가 행사하겠다고 한다. 이건 아예 헌법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개헌도 하지 않고 헌정 중단을 피해야 한다며 아예 공화국 통치의 새로운 기초를 놓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계엄이라는 예외 상태를 선포하는 주권자였다면 이들은 지금을 내란 실패에 따른 예외 상태로 선포해 주권자가 되려 한다.

그러나 ‘벌거벗은 생명’은 지금이 예외 상태가 아니라 주권자인 자신들이 ‘벌거벗겨진 생명’으로 지낸 지난 통치 기간이 예외 상태였다고 폭로한다. 이태원 참사와 채 상병 사건, 그리고 내란에 동원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청년/시민이 소모된 그 시간이 청년들에게는 예외 상태였다. 저들은 마치 지금이 예외이며 곧 예외가 끝나고 보편이 회복될 것처럼 말하지만 벌거벗은 생명에게 이 예외 상태는 이 통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항구적인 것이었다.

‘예외 상태’는 ‘윤석열 통치 기간’ 전체

한 세대가 벌거벗은 생명의 보편적 얼굴이 되어 한 통치권력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며 두 가지 예외 상태의 종식을 요구한다. 하나는 지금이 예외 상태인 것처럼 위헌적이고 초법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 다른 하나는 이 통치하에서 이들이 이미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경험한 벌거벗은 삶이 미래로 항구화되는 예외 상태의 거부와 종식이 그것이다. 이번 탄핵은 벌거벗은 삶을 항구화하는 권력을 처단하는 주권자의 민주주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만 이것이 한 정치세력에 대한 거부가 될지 혹은 그 정치세력을 지속시킨 통치체제로서의 6공화국의 종식이 될지 그것 역시 이 주권자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탄핵을 통하여, 탄핵과 함께, 탄핵을 넘어.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21은 응원봉 집회 현장에서 펼침막으로 쓸 수 있는 ‘내란사태 특별판 2호’를 제작했습니다. ‘내란사태 특별판 2호’는 아래 링크를 클릭한 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products/11238822727

※한겨레21 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한 페이지에서 구독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21은 언제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https://magazine21.hani.co.kr/requestorg/gudok_request.jsp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