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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공원, 가고파축제… 물러설 수 없는 ‘이름 전쟁’

합천군, 절차 안 밟고 공원 이름에 전두환 호를 붙여
창원시, 축제 이름에 독재 찬양한 이은상 노래 제목
등록 2024-09-14 08:21 수정 2024-09-14 16:34
경남 합천군은 일해공원 표지석을 2008년 12월31일 제야의 종 타종식 때 군민에게 공개했다. 표지석 앞면에는 전두환이 직접 쓴 ‘일해공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사진은 공개 전날인 2008년 12월30일 표지석에 글을 새기는 모습. 최상원 한겨레 기자

경남 합천군은 일해공원 표지석을 2008년 12월31일 제야의 종 타종식 때 군민에게 공개했다. 표지석 앞면에는 전두환이 직접 쓴 ‘일해공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사진은 공개 전날인 2008년 12월30일 표지석에 글을 새기는 모습. 최상원 한겨레 기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작품 ‘꽃’입니다. 이 시에서 방점은 ‘꽃’이 아닌 ‘이름’에 찍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가장 짧고 강력한 주술’이라고도 하죠. 김춘수 시인은 이를 시적 표현으로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가장 짧고 강력한 주술’

 

최근 경남 두 곳에선 ‘이름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르기 편하고 기억하기 수월하면 좋은 이름일 텐데, 왜 고작 이름 때문에 싸우는 것일까요? 정말로 이름은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강력한 주술’일까요? 경남에서 벌어지는 ‘이름 전쟁’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싸움은 경남 합천군의 ‘일해공원’ 이름을 둘러싼 것입니다.

합천군은 2000년대를 맞은 것을 기념해 2004년 68억원을 들여 합천읍 황강 근처에 ‘새천년 생명의 숲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인 2007년 1월19일 공원 이름을 합천군 출신인 전두환의 아호 ‘일해’를 따서 ‘일해공원’으로 바꿨습니다. 합천군은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런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대통령의 아호를 따서 일해공원으로 명명”했다고 일해공원 표지석에 새겼습니다. 이후 17년째 공원 이름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합천군은 ‘일해공원’이라는 지명을 공보에 고시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일해공원’으로 이름 변경을 결정한 뒤 경상남도 지명위원회 심의조차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일해공원’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면 합천군과 경상남도 지명위원회 심의·의결 절차를 차례대로 밟은 뒤 경남도가 국토지리정보원에 통보해서 공보에 고시해야 합니다. 이 절차를 끝내야만 국가기본도 등에 등재되면서 공식적으로 지명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합천군은 이 절차를 모두 무시한 채 ‘일해공원’이라는 이름을 임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아이를 낳아서 ‘일해’라고 이름 지었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17살이나 됐지만 주민등록등본에 등재되지 않은 것이죠.

합천군이 왜 그랬을까요? 합천군 관계자는 “일해공원이라는 지명을 고시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17년 전 당시에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당시 담당자들은 모두 퇴직했고 관련 서류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이름 ‘일해공원’, 바꾸기도 어려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합천군은 주민 공론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8~9월 두 달 동안 공론화를 통해 일해공원 이름 문제를 풀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7월31일까지 공론화위원회 위원을 모집했습니다. 그러나 찬성·반대·중립 각 10~15명씩 30~45명 규모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계획과 달리, 신청자가 고작 6명에 불과했습니다. ‘일해공원’ 이름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단체 모두 공론화 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데다가 일반 주민도 민감한 문제에 참여를 꺼린 결과였죠. 결국 합천군은 공론화를 포기하고 대신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 해결 방안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경남 창원시 마산역광장에는 마산 출신 시조시인 이은상을 기리는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왼쪽)와 그를 비판하는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가 나란히 서 있다. 최상원 한겨레 기자

경남 창원시 마산역광장에는 마산 출신 시조시인 이은상을 기리는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왼쪽)와 그를 비판하는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가 나란히 서 있다. 최상원 한겨레 기자


이름 관련 두 번째 싸움은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산 출신 시조시인 이은상(1903~1982)과 그의 대표작 ‘가고파’ 때문입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는 1932년 이은상이 고향 마산을 그리며 지은 시조입니다. 이를 가사로 사용한 가곡 ‘가고파’는 마산을 대표하는 노래로 애창되죠.

창원시는 창원시의회 의결을 거쳐서 2024년 7월31일 전국 최대 가을꽃 축제인 ‘마산국화축제’ 이름에 ‘가고파’를 삽입해서 ‘마산가고파국화축제’로 바꿨습니다. 바뀐 이름은 당장 10월26일~11월3일 열리는 제24회 축제부터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3·15의거기념사업회,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민주화운동단체들은 “가고파는 이은상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라며 축제 이름에 ‘가고파’를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 단체는 “이은상은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전국 유세를 다니며 독재자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 때는 유신 선포 지지성명을 냈으며, 전두환 때는 전두환에게 찬사를 보내고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이승만은 마산의 자존심을 짓밟은 대표적인 친독재 부역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들 단체는 축제 이름에 ‘가고파’를 넣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축제 이름을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축제가 시작된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마산국화축제’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2005년부터 2018년까지는 ‘마산가고파국화축제’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2019년부터 2023년까지는 다시 ‘마산국화축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이은상과 가고파를 둘러싼 논쟁의 끝판왕은 마산역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3년 2월6일 국제로타리클럽(3720지구)은 마산역광장에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를 세웠습니다. 같은 해 11월14일 3·15 정신 계승 시민단체 연대회의, 민주노총 경남본부, 한국철도노조 부산경남본부 등은 시비 옆에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를 세웠습니다.

 

마산역 앞에 선 두 개의 씁쓸한 이은상 비

 

시비는 ‘청사에 빛나는 노산 이은상 선생’ ‘평생을 문학과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 등의 표현을 쓰며 이은상을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반대로 수호비는 ‘이승만 자유당 영구집권 음모 동조’ ‘쿠데타 협력 유신 지지 학살자에 아첨’ 등 이은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비와 수호비는 마산역광장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름은 그저 이름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강력한 주술’인 것이 맞겠죠?

창원=최상원 한겨레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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