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햄스터가 기운차게 이불을 걷는다.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다. 업무도 식단도 운동도 계획대로 해냈다. 완벽해! 우쭐해진 ‘햄’.
하지만 그런 날만 있으랴. 휴대전화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낸 날은 바로 자학 시작이다. “나는 살 가치가 없는 햄스터야…. 공기 아까우니까 숨도 쉬지 말자. 흡!(숨 참는 중)”
‘일이 잘됐을 땐 왕이 된 기분, 반대일 땐 폐기물이 된 기분. 완벽한 하루는 드물고 애매한 날이 더 많다.’(네이버웹툰 <흔한햄> 26화) 프리랜서 그림 작가로 살며 늘 ‘갓생’ 압박에 시달리는 햄.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스스로를 놓아버리고픈 유혹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아무도 지시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 학교와 직장에서 자기계발을 요구받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햄이 하루 계획을 못 끝내 괴로워하는 컷엔 “누가 내 방에 CCTV 달아놨냐”는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이는 작가 잇선(본명 정남선·33)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먹고살고 싶었다. 들쑥날쑥한 수입 탓에 만화 굿즈를 팔고 이메일 만화 서비스까지 해봤다. 그중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달래가며 매일 꾸준히 그리는 것. 잘해보고 싶은 나, 그러지 못하는 나. 양쪽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만화 주인공들에게 녹아 있다. 그 점이 독자의 공감 버튼을 꾹 누른다. 2024년 4월29일 서울 종로구 송송책방에서 잇선 작가를 만났다.
—만화는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요?
“본격적으로 웹툰 연출을 시작한 것은 군대 다녀온 뒤예요. 이전에도 연습장에 그림 그리는 건 좋아했지만 대학을 디자인 쪽으로 가면서 잠시 놨거든요. 군대 갔다 오니 웹툰 시장이 활성화돼 있더라고요. 한번 도전해보자 했어요. 2012년쯤일 거예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요.
“겉멋 같기도 한데요.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거니까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타협 안 하고 평소에 생각했던 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도 가감 없이 그리길 좋아했고요. 창작하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길 바랐어요. 사실 저 자신을 위해서 (만화의 세계로) 들어갔던 거죠.”
—첫 작품은 반응이 어땠나요.
“네이버 베스트 도전(정식 연재를 하기 전 자유롭게 올리는 코너)에 작품 <나 그리고>를 처음 연재했는데요. 다른 사이트에도 홍보차 올렸더니 반응이 아주 맵더라고요. 막 욕하는 분도 있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보라’며 진지하게 상처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근데 그 와중에 좋은 댓글도 있더라고요. (악플을 향해) ‘네가 뭔데 그런 말 하냐’면서 저를 옹호해줬어요. 그걸 보면서 악플에 너무 감정 이입할 필요 없구나 생각했죠.”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며 작품을 그렸다고요.
“하루 11시간씩 아르바이트해서 200만∼300만원을 벌었어요. 백화점에서 두건 쓰고 케밥도 만들고요. 올리브영에서도 일했는데 ‘친절하지 않다’고 잘렸어요. 거기선 항상 목소리를 ‘솔’ 톤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거든요.”
—힘들기도 했겠습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그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생활비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분들이 너무 부러웠고요. 항상 주말만 기다렸던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작업하고 싶어서요.”
잇선 작가의 첫 데뷔작은 네이버웹툰 <우바우>다. <우리가 바라는 우리>라는 제목답게, 동물 주인공이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면서도 스스로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가려 노력한다. 페이스북 컷툰에서 시작해 네이버 베스트 도전, 정식 웹툰 연재로 이어졌다. 가장 힘들고 어둡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 도리어 작가를 프로의 세계로 이끌었다.
—<우바우>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그때 1∼2컷 만화가 페북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였어요. 그래서 ‘오케이, 나도 간다’ 하고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죠. 어떤 흐름에 올라탄 느낌이었어요. 근데 그걸로는 연재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왜냐면 흑백이고, 어차피 연재가 안 될 것 같아서 험한 말도 쓰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좋게 봐주셔서 연재됐어요. 운이었던 것 같아요.”
—웹툰 창작을 지속하게 된 계기였다면서요.
“그때 이미 스물다섯이라 일 구하면 나이 많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거든요. 그런데 수중에 든 건 없고요. 그때가 대학 복학 마지노선이었어요. 대학에 돌아갈지 만화에 매달릴지 결정해야 했죠. 그때 네이버웹툰 쪽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너무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친구랑 막 울었죠. 그러고 1년8개월 동안 연재했어요.”
—사업자를 내고 굿즈를 만들던 시절도 궁금해요.
“연재 끝나고 <우바우> 등장인물인 ‘펭이’로 인형을 제작해 팔았어요. 그러고 차기작 준비를 했는데 굿즈 수익금을 다 쓸 때까지 차기작이 (발탁이) 안 됐어요.”
—연재 경력이 있어도 그렇게 힘든가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차기작의 어려움이 커요. 한 번 정식 연재를 하면 예전처럼 도전만화에서 조금씩 쌓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플랫폼과 곧바로 원고를 주고받거든요. 거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걸 갖고 가야 하죠.”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 새 원고를 그려야 한단 건데, 생활 압박이 컸겠습니다.
“그때는 잠을 못 잘 정도로 먹고살 고민을 해야 했어요. 생활하려면 알바를 구하거나 다른 수익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면 그림을 못 그리잖아요.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아서 방법을 찾다가 ‘책을 직접 팔아보자’ 했습니다. <뚜리빼> <모지리> <이상한 다이어리> 등 연재가 불발된 작품을 독립 출판했죠. 그때쯤 메일링 서비스도 시작했어요. 마침 영수증 크기의 짧은 글을 뽑아주는 ‘문학 자판기’가 유행했거든요. 저도 구독자들에게 이메일로 짧은 만화를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한 달에 5천∼7천원씩 받고 매일 이메일을 보냈죠.”
—결과가 어땠나요.
“처음에는 (인기가) 대단했어요. 금액으로 따지면 정식 연재랑 비슷한 수준으로 메일을 받았어요. 마침 독립만화 시장이 활성화됐을 때라 텀블벅을 통한 책 판매도 괜찮았죠. 그런데 오래가진 못했어요. 정기결제가 아니라 매달 구독 신청을 해야 했거든요. 귀찮은 방식이라 조금씩 안 하는 경우가 생겼죠. 거품이 굉장히 빨리 빠졌어요. 독립출판 시장도 침체하면서 책 수요가 줄었고요. 다시 플랫폼 연재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죠.”
잇선 작가가 다시 플랫폼 연재로 발을 들인 작품은 카카오웹툰 <이상징후>다. “현실을 지옥처럼 느끼는” 이들이 강력한 탈출구를 욕망하면서 이상한 생물로 변하는 콘셉트다. 직장 내 갑질 문화와 야근, 학교폭력 등 한국 사회의 병폐가 주인공들을 ‘이상징후’로 내몬다.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은 버섯으로 변해 종일 누워 있다. 일 중독이 심한 사람은 문어로 변해 여덟 개의 팔로 빠르게 일한다.
—<이상징후> 속 캐릭터들은 작가님과도 닮았나요.
“내가 딴짓을 많이 하는구나, 하면 당연히 버섯이고요. 일 중독에 시달리는 것 같으면 문어사람이요. 사람들이 워커홀릭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사실은 계속 일에 시달리는 거예요. 저도 그런 기질이 있거든요. 그 외에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싶어서 뼈다귀사람을 그렸고요. 느리게 살고 싶어서 거북이를, 그러면서도 작업을 빨리 끝내고픈 조바심에 토끼를 그렸어요.”
—무기력한 버섯사람도 마음속으론 생기 있는 삶을 원하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답답해하고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한 것 같아요.
“캐릭터를 너무 밉게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한 사회가 그에게 영향을 주는 거니까, 가령 일 중독이라도 나름대로 살려다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으니까요. 약간의 연민이 드는 느낌으로 그렸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항상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흐름이 자연스러워야죠. 독자가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려면 캐릭터가 화를 내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는 대개 캐릭터의 생활이랑 밀접하거든요. 그 당위성을 찍고 넘어가려면 그 사람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어요.”
—등장하는 캐릭터가 다 내 모습 같을 순 없을 텐데, 나와 다른 캐릭터를 그릴 땐 어떻게 하시나요.
“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있잖아요. 다혈질인 사람도 자기 안에 침착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반대도 가능하고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내면을 자기 일처럼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 속 부잣집 캐릭터를 보고 처음엔 ‘겨우 그런 거로 고민하나’ 하다가 어느새 감정 이입해서 내 일처럼 ‘어떡하지’ 하는 것처럼요. 각각의 캐릭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 <우바우> <흔한햄> 잇선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후늉후늉 우는 햄스터, 슬퍼 마 혼자가 아니야’(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12.html) ◆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잇선의 작품이 가진 매력 포인트 세 가지를 꼽는다면 펜 선이 도드라지는 그림체와 귀여운 캐릭터, 약간 우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서사다. ‘후기늉’ 같은 근본 없는 의성어와 의태어는 덤.
작품을 알고 싶다면 연재 중인 네이버웹툰 <흔한햄>부터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컷툰으로 간단하게 볼 수 있고 분위기도 비교적 밝고 쾌활하다. 의지박약에 유튜브 좋아하는 햄스터의 갓생 살기 프로젝트다. 분명 주인공은 햄스터인데, 왜 내 모습이 보이지?
좀 울적한 기분이라면 <우리가 바라는 우리>로 시작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컷툰이라 한 컷씩 넘겨 읽기 편하다. 청년 세대의 가난과 불안한 마음, 진로 고민 등이 담겼다. 여러 주인공이 조금씩 자기 상황을 헤쳐나가는 서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는 마음이 든다. 연재 당시 독자는 무려 23만 명. 선풍적 인기로 오늘날 잇선 작가를 있게 해준 작품이다.
상상을 즐기는 타입이라면? 옴니버스식 작품 <이상징후>를 추천한다. ‘너무 바빠서 손이 여덟 개였으면 좋겠다’ 유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실제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변할까? 상상하는 재미를 더한다.
이 외에 <뚜리빼> <모지리> 등 독립출판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다소 어둡고 우울하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킬킬거리게 되는 블랙 유머 장르라고 감히 말하겠다.
<우리가 바라는 우리> 2015년 4월11일∼2016년 12월28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구독자 23만 명을 모은 인기작. 약칭 <우바우>로 불린다. “시궁창 같은 삶이라도 바라는 건 많다”는 작품 설명답게 서열주의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부단히 찾으려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상징후> 2021년 7월18일∼2023년 2월12일 카카오웹툰에 연재. 현실이 지옥 같을 때 사람들에게 ‘이상징후’가 나타난다. 무기력한 버섯사람부터 뭐든지 빨리 끝내는 토끼사람까지, 내면 깊숙이 숨겨뒀던 욕망이 기상천외한 현상으로 발현된다.
<흔한햄> 2023년 12월29일∼현재 네이버웹툰에 연재.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노동의 삶. 공장과 식당에서 녹초가 되어 일하고 나면 내면의 질문이 고개를 든다. 이러다가 내가 원하는 삶은 언제 살지? 주인공 햄스터가 자아실현과 생계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며 성장하는 이야기.
*‘한겨레21이 사랑한 웹툰 작가’ 21명을 인터뷰한 ‘21 라이터스 ④’는 한겨레 네이버스토어에서 낱권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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