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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인간’의 타자인 ‘우리’여 연결하라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3부작 마지막권 <포스트휴먼 페미니즘>
등록 2024-05-03 16:01 수정 2024-05-08 21:01


한국에서 유목적 주체 이론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1954~ )의 포스트휴먼 3부작 가운데 마지막권이 번역돼 나왔다.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윤조원·이현재·박미선 옮김, 아카넷 펴냄)은 <포스트휴먼>(2013), <포스트휴먼 지식>(2019)의 뒤를 잇는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론의 결정판이자 관련 페미니즘 이론의 정전 반열에 올릴 만한 중요한 책이다.

브라이도티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주류 백인 이주민으로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8년부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 여성학과 교수로 일해왔다. 다국적자이자 학자 겸 운동가로 살아온 브라이도티의 경험은 ‘유목적 주체’ 이론 수립의 바탕이 됐다. 유목적 주체는 그저 장소를 이동하는 정체성이라기보다 중층적이고도 혼종적인 주체성을 가리킨다. 타자를 만들어 배제하는 단일한 ‘인간’ 주체의 선명하고 납작한 세계관과 다르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에서 태어나 다양한 타자와 연계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다분히 정치적·비판적 기획이었다.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브라이도티의 주체와 타자에 대한 관심은 더욱 확장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생태·기술 의제까지 포함한다. 저자는 지금의 세계가 ‘포스트휴먼 곤경’에 처했다고 보는데 이는 인공지능, 로봇공학, 나노기술 등 4차 산업혁명 기술과 기후위기 한가운데 놓인 절박한 현실을 가리킨다. 이 시대에 “지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개념”은 도전에 직면했다. 휴머니즘의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서구 문화 속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포스트휴먼은 정신/문화, 인간/비인간의 근대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하는 사유의 혁신이다.

새로운 주체들은 여성, 성소수자(LGBTQ+), 식민화된 사람, 토착민, 유색인, 다수의 비유럽인 등을 포함한 ‘우리’ ‘타자들’이며 지금껏 ‘인류’ ‘휴먼’으로 인정받지 않은 이들이다. 브라이도티는 페미니즘이 단순한 휴머니즘을 넘어선다고 보는데, 휴머니즘은 타자의 해방을 지지해왔으나 ‘남성/인간’을 중심으로 한 모순과 한계 또한 분명했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는 페미니즘이야말로 휴머니즘과 연관성을 유지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은 인류 중심주의와 인간 예외주의라는 교만과 거리를 두며 인간과 비인간 타자를 연결한다.

주의할 것은 ‘포스트휴먼’이 인간 몸의 생물학적 한계를 과학기술 긍정주의로 극복하는 트랜스휴먼과 다르다는 점이다.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은 생명 산업, 생명 자본과 엮인 “기업화된 생물학”(매릴린 스트래던)에 기반한 트랜스휴머니즘과 거리를 둔다. 개인적인 특권과 성공, 사치스러운 생활 양식과 소비 행태에 의존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도 비판적으로 개입한다.

나아가 브라이도티는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경유하여 질적 도약을 시도한다. 비주류인 탈식민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교차성 이론, 토착 페미니즘 사상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물론, 바이러스·신체 일부 조직이나 공기·물·흙 같은 ‘물질’까지 새로운 정치학에 참여하는 역동적인 공동 행위자로 인정해 생태 정치학의 범주를 확장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우리’는 지구라는 공동의 집에 함께 존재한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저항의 터전으로 변모시킨다.

“페미니즘을 계속 동원하지 않는다면, 우주 탐험 기획이 은하계적이라 해도, 가부장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화성에서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프도록 지겨운 일이 될 것이다.”

에코페미니즘, 신유물론, 생태비평, 장애연구, 퀴어 친족관계 등의 개념을 총동원해 페미니즘을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선구자로 입증하는 이번 책은 암울한 현재를 직면하는 사유인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을 보여준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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