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해 사 온 원피스. 사고 보니 비슷비슷한 청치마. 친구가 덥석 안긴 재킷…. 잘 입지도 않으면서 괜히 장롱에 모셔두길 수년째, 이젠 새 주인에게 갈 시간이다. 2024년 4월20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열린 옷 교환행사 ‘21프로(%) 파티’에 가져갔다.
21프로파티는 사단법인 ‘다시입다연구소’가 2020년 시작한 의류 교환 행사다. 평균적으로 자기가 가진 옷의 21%는 안 입는다는 연구소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서 착안했다. 햇수로 벌써 5년차, 성장이 가파르다. 20여 명에서 시작한 첫 대회 참가자 수는 올해 368명(4월20일 파티 기준)으로 대폭 늘었다. 최근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이소연씨 등이 파티를 소개하며 입소문을 탔다. 올해는 이날 본행사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단체 주도로 열릴 예정이다.
옷 교환 방식은 이렇다. 파티에 오기 전 참가 신청을 한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30분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파티 당일 옷 5벌을 챙겨가면 교환권 5장을 준다. 더 가져와도 되지만, 교환은 최대 5벌까지만 가능하다. 오염·변색된 옷은 제외다.
이날은 비 오는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행사장 안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빠르게 옷걸이를 훑는 참가자들 손이 분주하다. 덩달아 조바심이 나지만, 무작정 돌진할 수 없다. 옷을 고르려면 먼저 자신이 가져온 옷에 꼬리표를 달아 제출해야 한다.
“널 전 남친 옷장에서 강탈해 왔는데 전 남친과 헤어져서 널 보낸다.”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3번 입었네. 널 그만 보내주기로 했어.”
꼬리표는 참가자가 어떤 경위로 어디서 옷을 샀는지, 왜 내놓았는지 설명해준다.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옷 출처도 파악하고 자신의 소비 생활도 돌아볼 수 있다.
옷 스타일은 들쑥날쑥하다. 다소 난해한 패턴의 옷도 적지 않다. 처음엔 ‘뭐야, 혹시 내가 가져온 게 제일 좋은 옷 아냐?'라는 억울함이 슬며시 올라온다. 하지만 이 파티의 장점은 30분마다 새 옷이 들어온다는 점. 여유를 갖고 어슬렁거리다 보면 취향에 맞는 옷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중고라고 하면 출처도 모르는 옷, 버리는 옷을 가져오는 줄 알아요. 하지만 여기는 출처도 적혀 있고 제 또래가 가져오니까 그런 걱정이 별로 없어요. 내가 안 입던 옷을 다른 사람이 입은 걸 보면 보람도 크고요. 옷을 교환하는 보람과 즐거움을 가볍게 체험할 기회라고 생각해요.” 참가자 유선명(27)씨가 말했다. 그는 2022년부터 3년째 21프로파티에 참가하고 있다.
‘교환=공짜’라는 생각에 욕심부리면 곤란하다. 안 입으면 결국 짐이다. 실제로 이번 파티에 나온 옷 중엔 ‘작년 파티’ 출신도 왕왕 있다. 참가자들이 탈의실을 들락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이유다.
“저도 처음엔 5장 쿠폰을 받으면 꼭 5벌을 다 가져가려고 했는데요. 이것도 결국 안 입는 건 안 입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턴 꼭 입을 옷들만 들고 가려고 노력해요.” 선명씨가 말했다.
다만 아직까진 빅사이즈 의류나 남성 의류는 적은 편이다. 아내를 따라왔다는 이종혁(37)씨는 “저는 정장 스타일을 좋아하고 핏을 중시하는 편이다. 여기는 박시한(품이 넉넉한) 옷이 많아서 교환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종혁씨는 이런 행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주도하고, 정치나 영리 목적이 아닌 순수한 사회운동으로서 환경을 위해 하는 것이 놀랍다. 이런 운동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그때 아담한 초록색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유행했던 강렬한 색깔의 인조가죽 가방. 무심코 집어서 살펴보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멀리 있던 참가자가 어느새 내 옆에 바싹 붙었다. 이럴 땐 왠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남이 갖고 싶어 하면 괜히 나도 가져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동안 옷을 충동구매한 원인 중 하나였다.
패스트패션은 그런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대표적 산업 트렌드다. 최신 유행을 반영한 옷을 대량으로 싸게 만들어 소비심리를 일으킨다. 철 지난 옷들은 곧바로 폐기된다. 전세계 탄소배출량의 10%가 의류산업 생산-유통-폐기 과정에서 발생한다(유엔 집계).
파티 참가자들도 공통적으로 패스트패션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팔리지 않은 옷더미가 해안가에 가득 쌓여 있는 사진을 보고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론 유행 타지 않는 옷만 사자고 마음먹게 됐다.”(유선명씨) “패스트패션에 비판적이다. 친환경 옷 브랜드도 있다지만 그것도 결국 사야 하잖나. 옷 구매 자체를 줄일 방법을 찾다 21프로파티를 알게 됐다.”(김서연씨)
‘당근마켓’ 등 중고 옷 거래도 이런 흐름을 근본적으로 막진 못한다. “중고시장에선 옷을 파는 사람이 계속 판다. 언제든 되팔 시장이 있으니까 새 옷도 한두 번 입고 내놓게 된다. 반면 옷을 교환하면 옷을 내놓은 사람이 다른 옷을 가져가기 때문에 의류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정주연 다시입다연구소 대표의 말이다.
다시입다연구소는 ‘패션기업 재고 폐기 금지법’ 제정을 위한 입법 서명도 받고 있다. 패션기업이 브랜드 희소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판매되지 않은 재고 의류를 소각 등으로 대량 폐기하는 일을 방지하는 법이다. 이미 유럽연합(EU)이 2023년 12월 법 규정 마련에 합의했다.
행사장 한편이 시끌시끌하다. 참가자 박혜정씨가 가져온 옷을 친구들에게 미리 선보이고 있다. 평소 친구들과 옷 교환을 꿈꿨다는 혜정씨에게 21프로파티는 좋은 핑곗거리다.
“친구들에게 옷을 주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어요. 근데 각자 취향이나 사이즈가 다 다르니까 무작정 주기가 어렵더라고요. 이런 행사를 기회 삼아 서로의 옷을 소개할 수 있어 좋아요.” 혜정씨의 분홍색 니트는 벌써 친구가 ‘득템’해 갔다.
혜정씨의 친구 손모아씨도 옷을 가꿔 입는 습관이 몸에 뱄다. “제가 입은 재킷은 고등학생 때부터 입던 거예요. 단추만 새로 달아도 느낌이 다르죠. 이 신발은 신은 지 10년 됐고요. 꼭 유행 따라 바꾸지 않아도, 내가 가진 걸 잘 리폼해서 입으니 나만의 스타일이 생기더라고요. 요즘은 옷을 오래 보관하는 노하우도 많이 알려져 있어요.”
옷 교환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교환 파티도 주말 장터처럼 흔해질지 모른다. 다시입다연구소도 참가자들이 파티를 직접 열 수 있게 간단한 준비도구(키트)를 판매한다. 김서연(24)씨 역시 조만간 파티를 주최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새것에 집착하고 무작정 유행을 좇게 하는 문화죠. 하지만 옷은 오래돼도 입을 수 있고 해지면 해진 대로 멋있어요. 21프로파티는 옷을 보는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패션에 기여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곧 유학 갈 예정인데 거기서도 21프로파티를 열어보고 싶어요.”
2021년부터 파티에 참여했다는 그는 올해 아예 서포터스로 자원했다. “내 옷을 누군가 가져갈 때 짜릿하고” “지난번 행사 때 본 사람을 또 만나면 반가웠던” 경험이 컸다.
서연씨가 말하는 짜릿함은 파티 말미쯤 내게도 찾아왔다. 한 참가자가 한 아름 고른 옷더미 속 익숙한 갈색 스커트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 아까워하던 마음이 무색하게, 누군가 내 옷을 입어준다는 것만으로 한껏 들떴다.
파티가 끝난 뒤 손에는 다시 옷 가방이 들렸다. 두 벌은 친구와 가족에게 줄 선물, 세 벌은 청바지와 니트다. 부들부들한 옷을 좋아해서 계절에도 안 맞는 옷을 가져와버렸지만, ‘새 옷’이 주는 설렘은 썩 만족스럽다. 마침 벽에 붙은 헝겊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다시는 기회입니다. 옷들에게 기회를!”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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