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이 돌아오니 지난 선거 때 겪은 일이 떠오른다. 당시 방문진료를 하던 재식(가명)님은 조현병 정신질환 증상이 있었고 당뇨가 심해져 아래 다리를 절단한 뒤 집에서 홀로 지내고 계셨다. 구청 의뢰로 만나기 시작해 당뇨 관리 등 전체적인 건강관리를 도왔다. 거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홀로 지내는 탓에 대소변 처리 등 일상관리가 어려웠다. 주 3회 몇 시간 찾아오는 장애인활동지원사가 최소한의 돌봄을 해줬다.
잘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찾아가는 의사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가끔 반지하 방 안에서 종일 담배만 태우며 죽을 것 같다고 전화를 주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지역에서 공동체 활동을 함께 하는 동료 청년 둘과 함께 찾아가 재식님을 휠체어에 태워 반지하 계단을 올라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잠시나마 죽고 싶은 마음을 달래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1년여 인연을 이어오던 중 선거가 다가왔다. 재식님은 ‘뜬금없이’ 투표하고 싶다고 하셨다. 모르는 체할 수 없어 지체장애인 투표를 도와주는 제도가 있는지 알아봤다. 정확한 시간을 약속하고 지상까지 올라가면 투표장에 모시고 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만 반지하에서 올라가는 이동은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왠지 재식님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장식하는 일이 될 것도 같아서 매번 산책하는 방식으로 함께 가보기로 약속했다. 역시 세 명이 재식님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근처 동주민센터가 아주 가깝지는 않았고 찻길이라 휠체어로 가기에 편하지 않았지만 산책하는 기분으로 달려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막상 주민센터에 가보니 투표소는 2층에 마련돼 있었다. 계단을 오르긴 무리였다. 관계자에게 말하니 거동이 불편한 분을 위한 투표소가 1층에 있다고 했다.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눈치였다. 1층에서 재식님이 투표소에 들어가는 걸 끝까지 도와드렸다. 함께 간 우리도 번갈아 2층에서 사전투표를 했다.
상상치도 못했던 난관이 발생했다. 재식님은 비밀투표 원칙이 무색하게 커튼 밖에서 기다리는 나에게 큰소리로 “선생님, 어느 당이 어느 당인지 전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거대정당의 이름은 조금씩 바뀌었고, 비례대표 정당 투표지엔 심지어 이름도 없었다.
재식님은 호기롭게 투표장에 들어갔지만 익숙하지 않은 정당 이름들 그리고 비례명부에서 자취를 감춘 거대정당의 이름에서 혼란을 느끼셨나보다. 나는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저 밖에서 “자기들끼리 제도를 바꾸고 이름을 바꿔서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하고 모두 들리게 하소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름이 비슷해요.” 재식님은 투표를 마쳤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셨다. 한 표를 행사해서 뿌듯했지만 투표용지를 보고 적잖이 당황하신 게 분명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투표율의 현실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거동 불편한 몇 분이 투표 못한다고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럴 거면 투표를 왜 하느냐고 묻고 싶다. 민의를 반영하기 위함이라면 국민이 배제되지 않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면서도 복잡한 제도 변화에 헷갈리는 분도 많을 텐데 유권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제도의 변화를 잘 알릴 필요도 있어 보인다.
유권자 모두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투표장을 찾는다. 재식님처럼 거동이 어려운 사람들은 더 큰 결심을 하고 참여할 수밖에 없다. 재식님뿐 아니라 방문진료를 하며 만나는 분 대부분은 투표장에 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새삼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확인했다. 목소리가 큰 사람, 권력을 가진 무리, 부유한 사람, 힘이 있는 사람이 만든 제도에 결국은 다들 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 거동이 불편한 사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 힘이 없는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기 어려운 제도. 권력투쟁에서 어떻게든 이기려는 노력만큼 투표 기회를 소중히 생각하는 유권자를 위해서 마음을 써주길 바랄 뿐이다.
홍종원 찾아가는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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