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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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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을 얕잡아 보지 마세요

복잡한 선악, 사람의 생애를 만만하게 보거나 단순·극단화해서 단죄하기 급급한 시대에 사람을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의미
등록 2023-12-02 13:59 수정 2023-12-06 10:50
잘 만든 이야기는 주인공 아닌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일본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도 다수의 등장인물을 ‘사람’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자료

잘 만든 이야기는 주인공 아닌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일본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도 다수의 등장인물을 ‘사람’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자료

“그러니까 제가 제 등장인물을 얕잡아본 거네요.”

학생이 기획한 이야기에 피드백하던 시간이었다.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의 행동이 조금 평면적이었다. 학생에게 이 사람이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한다고 넣었는지 물었다. 학생은 이야기의 그 장면에 필요해서 넣은 것이라고 했다. 학생에게 물론 필요해서 넣었겠지만 인물은 그렇게 등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피드백을 받던 학생이 한숨을 쉬며 저 말을 했다.

등장인물을 ‘도구’로만 소비하지 않으려면

순간 가르치며 배운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내가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크고 위상이 높은 말이었다. 내가 학생에게 지적한 것은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에 대한 기술적 내용이었는데, 학생이 내 말을 통해 깨달은 것은 창작자의 태도이자 윤리였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만이 스스로 잘못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음을 말해줬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이야기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설계는 압축이다. 구조와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이 설계다. 이 과정에서 설계하는 자의 필요에 따라 이야기를 배치하고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필요 없어진 것은 잘라내고 폐기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빠지는 가장 큰 유혹은 전개되는 장면의 필요에 따라 등장인물을 그때그때 도구적으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문제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은 살아 있는 인물로 구축하지 못한다. 장면의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불과하기에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소도구가 돼버린다. 사람 모습을 고양하는 방식으로 ‘압축’되는 게 아니라 사람 아닌 존재로 단순화해버린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야기를 다 만든 뒤 그 사람의 관점에서 ‘외전’ 형식으로 이야기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대체로 장면의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등장한 사람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떼어 재구성해보면 성격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이 전혀 없다. 앞 장면에서의 ‘그’와 뒤 장면에서의 ‘그’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장면의 필요에 따라 편의주의적으로 소비했기 때문에 그렇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대사가 두서너 마디밖에 없는 단역이라도 사람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동안에도 이야기 ‘밖’에서 그 사람의 시간은 흐르고 그 사람은 살아간다. 따라서 어떤 장면에 그 사람이 등장한다는 건 장면의 필요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간 흐름 속에서 그 장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장면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사연으로 이어진 게 생애라고 한다면 생애가 없는 사람은 없으며, 생애가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자기 궤도 만드는 생명들

다른 도구들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현실이나 이야기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생명력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이건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이고 이 움직임은 자기 경로를 지속적으로 설정한다. 그것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생명은 등장함과 동시에 움직이고 자기 궤도를 만들어가려 하지 설계자의 의도대로만 따르지 않는다. 종종 설계자의 의도에 반하거나 저항한다. 그렇지 않다면 등장인물을 사람으로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창작자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순간부터 아무리 그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이라 하더라도 저 학생의 말처럼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의 사연, 즉 전사(前事)를 가지고 이야기에 나온다. 이야기에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사가 무엇인지 설정하는 일이고, 그 전사와 지금 장면의 이야기 그리고 이 장면으로 촉발돼 이어지는 후사(後事)가 그의 생애로 구축됨을 뜻한다. 이렇게 생애로 구축되지 못하면 그 등장인물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게 쉬워 보이면서도 막상 창작에 들어가면 지극히 어려운 이유다.

잘 만든 이야기는 항상 주인공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외전처럼 그로부터 파생되는 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나 <강철의 연금술사>를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면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대다수 등장인물이 자기 생애를 가지고 살아가며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 즉 ‘사람’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람을 사람으로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흔히 말하듯이 ‘디테일’이다. 이야기에서 디테일은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향해 어떤 과정을 그리는가에 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만남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이야기의 한 등장인물이 속물이라고 치자. 속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속물의 그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뻔하다. 그러나 그 속물이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속물이라는 그 사람의 역할과 성격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가보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는 것이 이야기의 디테일을 만드는 데 더 결정적이다.(제1481호 ‘이야기 만드는 일, 말에 풍경을 만들어주는 일’ 참조)

정지아 작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관찰하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이는 창작의 대가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 미야자키 하야오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거의 다가 관찰에 기초하지 않는다”며 사람을 관찰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 관찰을 싫어하는 인간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요컨대 만화를 만들기 위해 만화만 보고, 공연을 만들기 위해 공연만 관람하고 참조하니, 거기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창작의 대가들은 사람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사람을 관찰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 관찰을 싫어하는 인간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판한 바 있다. 대원미디어 제공

창작의 대가들은 사람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관찰하라고 당부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사람을 관찰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 관찰을 싫어하는 인간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판한 바 있다. 대원미디어 제공

관찰이 없으면 이야기도 없다

관찰은 새로운 언어-이야기가 탄생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연극과 이론은 모두 어원적으로 보는 것, 즉 관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관찰이 없다면 구체적인 이야기(연극·드라마)도 없고 추상적인 이야기(이론)도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에 따르면, 근대 초기 일본이 서구의 개념어를 번역하며 ‘theory’를 지금처럼 ‘이론’이라 번역하지 않고 ‘관찰’이라고 말했다. 이론의 대당 개념인 ‘practice’는 ‘실제’라고 번역했다. 즉, 지금 우리가 ‘이론과 실천’이라 부르는 것을 ‘관찰과 실제’라고 인식했다.

지금 세상은 사람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단순화한다. 바꿔 말하면 사람을 얕잡아보는 게 동시대의 인간 인식과 세상살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이든 사람을 긴 호흡으로 깊이 있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결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단순화해서 인식한다. 인간은 ‘결국’ 속물이거나 동물이고 그 외의 이야기는 기만에 불과하다. 그러니 점점 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인식이 선악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을 따라간다. 그 결과 사람을 그 사람의 과정을 통해 이해하려는 것, 그 자체를 불필요한 일이라 여기는 것을 넘어 위험시한다. 선악 판단으로 단죄하는 정의의 실현을 지체시키는 행위로 말이다.

그래서 이른바 ‘참교육’ 유의 이야기가 대중의 인기를 끈다. 선악은 단순하며 점점 더 극단적인 것이 된다. 악을 단순화하지만 얕잡아보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식이 그 악을 극단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악을 극단화할수록 그 악을 이해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악을 극단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자칫 악을 서사화해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비판받는다.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도 단순해야 한다. 시간을 들여 제도 안에서 절차에 따라 악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지루하고 정의를 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과 정의는 즉각적으로 실현돼야 한다.

물론 이야기에는 이것이 허용된다. 이야기는 1:1 축적의 지도가 아니기 때문에 과정을 압축해 빠르게 진행시켜 극적 긴장감을 높여야 한다. 압축의 한 방식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 방식은 오히려 사람을 얕잡아볼 수 없게 그 밀도감을 상승시키는 방식으로 압축하는 것이다. 단순화가 아니라 밀도감 상승이며, 이것을 보통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축하고 서사를 촘촘하게 만든다고 표현한다. 이야기 안에서 정의 실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에서는 비슷하지만 아무리 밀도감을 높인다고 하더라도 압축 자체를 조심해야 하는 장르가 있다. 정치다. 정치에서 악을 극단화해 즉각적으로 단죄해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은 정의 실현을 얕잡아보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정치의 목적은 악을 응징할 뿐만이 아니라 정의가 사회에 정착되게 제도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물론 즉각적인 복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 정의 실현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전쟁은 무능한 정치의 결과다. 지금 하마스에 대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이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단순화 대신 밀도감 높이기

정의에 갈급한 사람들이 무엇보다 인정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정의 실현은 결코 즉각적일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정의 실현은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정착’된다. 정의의 지체에 사람들이 지쳐 정의 실현을 위해 정치가 아닌 전쟁에 의존하는 이야기에 환호한다고 해서 정치가 거기에 부화뇌동한다면 그거야말로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것을 넘어 사람들을 위험하게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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