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나… 추궁받을까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한 일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 만인가, 동료들이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듣는다. 비슷한 경험을 한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생의 낭떠러지와 마주했던 약물중독자에게 이 시간이 소중하다. 어떨 땐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2023년 5월18일 오후 1시 부산시 연산동 (재)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마약본부) 영남권 중독재활센터 사무실에 한부식 김해 다르크(약물중독재활센터) 리본하우스 센터장을 포함해 약물중독자 8명이 둥글게 앉아 부산 지역 ‘약물중독자 자조모임’(Narcotics Anonymous, 이하 NA)을 시작했다. NA는 ‘먼저 회복한 중독자가 회복을 시작한 중독자의 롤모델이 되고, 약물을 끊는 데 서로 도움을 주는 치료재활 프로그램’이다.
먼저 10여 분간 ‘NA 프로그램’을 낭독했다. ‘중독자란 누구이고’ ‘왜 이 모임에 왔는지’를 되새긴 뒤, ‘NA 프로그램의 효과’ 등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이다. 임상현 한국NA 대표는 “우리가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처음 온 사람도 이 모임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NA는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 압구정, 당산, 인천, 경기 남양주 등 모임도 7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NA는 139개국에서 매주 6만7천여 개(2016년 기준)의 모임 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부산NA 모임은 매주 월요일에 진행된다. 모임 때마다 주제가 즉석에서 정해진다. 이날 주제는 ‘나는 왜 중독자가 되었나’ 이다.
“중독자 ㄱ입니다. 처음 타이에서 필로폰을 접했어요. 매스컴에서 필로폰 한다고 들으면 인생 막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가 ‘아이’라고 소개해서 필로폰이라곤 생각도 못했죠.” 핑계나 변명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여긴 심판을 내리는 법대 아래가 아니다. ㄴ씨도 “남들한테 멍청해 보이는 게 싫었어요. 친구가 ‘메스암페타민’이라고 말해줬는데, 그게 필로폰인지 몰랐어요. 한번 피우고 나니까 친구가 ‘이게 필로폰이라는 마약이다’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충격도 받았는데, 한편으론 마약은 조폭이나 돈 많은 사람만 하는 거니까 내가 좀 우위에 선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많은 중독자가 ‘마약이 무엇인지’ ‘약물중독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중독되면 어디서 어떻게 치료받아야 하는지’ 중독자가 되기 전에 잘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ㄱ씨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약과 일을 병행할 수 있더라고요. 아니 그게 된다고 믿었던 거 같아요. 나중에 여권을 보니 수년간 대만에 스무 번 넘게 갔더라고요. 전혀 몰랐어요. 가자마자 호텔에 가서 약만 하다 돌아와 대만에 갔다는 사실도 잊었던 거죠. 저는 스모킹 방식으로 필로폰을 했는데,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 상태가 안 좋아요. 그런데 약을 하면 과대망상에 빠지잖아요. 제 외모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셀카도 많이 찍었더라고요. 지금 보니 정말 추합니다. ‘나는 (약을) 컨트롤할 수 있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약물) 중독 때문에 생긴 착각이었다는 걸 이제 깨달았어요.”
ㄴ씨는 “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엄마 탈을 쓴 악당’이라고 생각했어요. ‘쭈라’(약물 사용에 따른 편집증)가 온 거죠. 엄마가 (나를) 병원에 보낼 때도 중독이라는 걸 인정 못 하겠더라고요. NA 모임에 오고 12단계 듣고 하면서 내가 중독자임을 인정하게 됐어요. 뒤늦게 알았죠. 내가 약 때문에 평생 바라던 교사 꿈도 버려야 한다는 걸요.”
NA 프로그램에는 ‘12단계 회복 원리’(표 참조)가 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ㄱ씨처럼 ‘중독자 자신이 약물 조절 능력이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전세계 NA 모임’(WSO)이 작성·배포하고 ‘한국NA’가 번역한 안내서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사실을 교묘히 꾸미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 완전히 패배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회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중독자 ㄷ입니다. 일이 바빠서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약 생각을 안 할 수 있다는 건 좋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공허함이 너무 커요.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게 행복인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약을 하기 전엔 행복하다는 감정이 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뭔가 생소하다고 해야 하나….”
ㄷ씨는 약물 금단증상의 고통을 다른 중독자들과 공유했다. 우리나라 약물중독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조성남 국립법무병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약물중독은 뇌질환입니다. 중독자가 단약(약물을 끊음)하면 도파민(행복을 느끼는 데 관여하는 호르몬) 저하로 일상생활에서 쾌감과 즐거움을 느낄 수 없어 살맛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또다시 약물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어요. 1년 내지 1년6개월 이상은 지나야 뇌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ㄷ씨는 “병원에서 상담도 받아보고 다른 프로그램도 많이 참여해봤지만 저에겐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제가 다른 일을 제쳐두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이곳에 오는 이유가 다른 분들이 단약을 이어가면서 이겨내는 경험담을 들으면 뭔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예요. 저도 최대한 노력하는데, 행복이라는 거, 언젠가는 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들 파이팅했으면 합니다”라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NA 프로그램의 2단계가 ‘프로그램의 힘을 믿 는 것’이고,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이 바로 3단계다. “중독자 ㄴ입니다. 단약한 지 7개월 정도 됐어요. 처음에는 회복 의지가 강했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자꾸 부딪치더라고요. 엄마 일을 도와드리는데 요즘엔 일을 안 나간 적이 많았어요. 엄마한테 ‘해이해진 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으니 화나더라고요. 뭘 해도 제약을 받으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내가 가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고 불효막심 한 짓을 했으니 이겨내야지 하면서도…. 그 7개월이 짧지가 않은데, 노력해도 알아주지 않고….” ㄴ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집으로 돌아온 중독자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였다.
한부식 센터장은 “중독자들이 교도소를 나오거나 치료를 시작하면서 집에 가는 경우가 있는데, ‘뭐라도 이제 일해야 할 것 아니냐’ ‘일할 거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마라’ 등 가족도 약물중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몰아붙입니다. 중독자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중독자가 스트레스를 받고 다시 약으로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중독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거든요. 인간 관계를 맺는 게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라고 설명했다. 한 센터장은 2006년부터 회복 중인 약물중독 당사자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면,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소외될 것을 두려워했다. (…) 동료들은 진정 우리를 이해한다.” (<익명의 약물중독자들>)
“중독자 ㄹ입니다. 저는 약물을 끊고 처음에 요거트에 곤약을 넣어 먹었어요. 하루에 세 번씩 먹고, 주말에는 열 번씩 먹었어요. 곤약이 배 속에서 부풀어 오르면 배가 너무 아파 데굴데굴 구를 때까지 먹었어요. 한 2년을 그렇게 먹다가 요즘은 컵라면을 또 그렇게 먹었어요. 그래야 마음이 안정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중독은 자기학대가 아닌가 싶어요. 얼마 전이었어요. 예전에 재판할 때 썼던 반성문을 다시 한번 써봐야겠더라고요. 인터넷에서 양식을 찾았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뭘 느꼈는지는 술술 잘 넘어갔는데, ‘피해자에게 하는 말’ 대목에서 막히더라고요. 내가 당했으면 당했지, 누구한테 피해를 준 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피해자가 바로 ‘나’인 거예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미안합니다’라고 용서를 구했어요.”
NA는 195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했다. 1935년 결성된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AA·Alcoholics Anonymous)의 회복 원리를 본떠 ‘NA 12단계 회복 원리’를 만들었다. <익명의 약물중독자들>도 중독자들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만들었다. 약물을 끊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
조성남 원장은 “NA가 회복에 효과 있다는 사실은 학술적으로도 검증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 (NIDA)는 남노르웨이병원 연구진의 ‘약물중독 치료 후 자조 프로그램의 높은 효과’(2006년) 논문을 인용해, ‘자조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약물 없는 상태가 될 확률이 12.6배 더 높았다’고 소개한다. “또 약물중독자가 NA 모임에 참여하면 회복은 물론 일생 동안 약물을 끊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날 모임은 ‘봉사활동 안내’에 이어 ‘평안함을 청하는 기도’를 모두 낭송하면서 마무리됐다. 모두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신이시여,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안함과 어쩔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부산=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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