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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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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무는 수어

등록 2022-12-20 14:36 수정 2022-12-21 01:14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에는 ‘장애인 시민권 보장을 위한 재활법 제504조 시행’을 요구하며 미국의 장애인 활동가 100여 명이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청사를 점거한 역사적 사건이 생생히 담겼다. 점거 일수가 늘고 안팎으로 왕래도 전화도 안 돼 고립감을 느낄 법한 상황에서, 농인 활동가들이 창문 너머로 연대자들과 수어로 소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름이 돋은 채 생각했다. 수어에는 견고한 벽을 투과해버리는 힘이 있구나. 언젠가 나도 꼭 수어를 배우고 싶어.

올가을 수어 강의를 들었다. 기쁘고 설레고 슬프고 화난다고 손과 표정으로 표현하는데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몸의 여러 곳을 움직여 말하려면 외면하고 싶은 감정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일까. 시선을 온전히 쏟아야 하는 수어를 보려면 딴생각할 겨를 없이 지금 이곳에 충실히 존재하는 것부터 익혀야 했다. 이 또한 다른 감각을 깨워줬다.

농인은 잘 보는 사람

‘언젠가’ 배우려던 수어를 당장 배울 용기를 낸 건, 농사회 바깥으로 농교육 현장의 문제를 알리는 공론장 기획에 참여하면서다.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 수어민들레, 코다코리아, 한국농아동교육연구소, 한국농대학생연합회, 씨닷까지 6개 단체가 모인 첫 회의 날, 농인 참여자와 코다(농인 부모의 자녀)가 수어로 반갑게 나누는 대화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통역사만을 바라보던 답답함에 벼락치기로 수어 수업을 들어봤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고, 행사 준비로 바빠지면서 결석이 잦아졌다.

그 와중에 낯설던 농문화에 스며들며 수어의 에너지, 유머, 깊이 그리고 연극성을 사랑하게 됐다. 청인의 말투와 목소리가 제각각이듯 농인의 고유하고 다채로운 수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농학교에서는 수어로 학습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한국 농인의 공용어이자 농사회의 사회문화적 자산인 수어를 배우는 것보다 인공와우 수술과 구화 구사를 장려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이 농인으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고 살기보다 청인 중심 사회로 통합돼야 ‘정상’으로 여기는 곳이기 때문일까. 그런 상황에서 수어로 교육하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농학생의 특성과 언어, 문화를 반영하며 온전히 수어로 교육하는 학교도 엄연히 존재한다. 대안학교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수업 사례와 교육공동체로서의 일상을 엿본 날, 이런 멋진 곳이 있구나 싶어 ‘호그와트 마법학교’가 떠올랐다. 농인의 존재를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보고, 청인과 다른 논리구조를 가진 ‘보는 아이들’이 어떻게 세계를 배워가는지 탐구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수어의 힘

이날 공론장에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 무엇인지, 그것이 농교육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둘러앉아 이야기했다. 한 참가자는 “다양한 언어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교육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기대 이상의 인원이 모여 메인 수어통역이 안 보이는 사각지대가 생기자, 현장의 수어통역사 여러 명이 자발적으로 메인 통역사의 수어를 따라 했다. 곳곳에 에코처럼 퍼지던 수어 물결이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그려냈다. ‘모두를 위한 교육’을 잠시 경험했달까.

이번 행사를 주최한 네트워크의 이름은 ‘아, 파’인데, 수어로 ‘청인은 할 수 있다’라는 의미의 ‘마우스 제스처’(입 모양)를 한국어로 표기한 것이다. 장애인에게 ‘역경을 이겨내라’며 시혜적 시선으로 보내던 응원을 청인을 향해 위트 있게 비튼 표현이다. 이 말에 핵심이 있다. 교육현장부터 다양한 언어와 감각을 쓰는 이들이 함께하려면 이제는 청인이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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