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우리는 학사경고가 누적돼 제적당했다. 유빈은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았다. 민재는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고 휴학에 들어갔다. 준우 역시 학사경고를 받고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왔다. 다인은 자퇴하려다 못하고 학사경고를 받았다. 2022학번인 예나는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이들은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불안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을 진단받았다. 하지만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에 해당하지 않아 정부와 대학이 마련한 학습지원제도에서 제외됐다. 증상을 동반한 채 일상을 사는 이들은, 가장 먼저 학점에 타격받는다.
<한겨레21> 제1회 표지이야기 공모제 당선작은 정신질환을 가진 대학생의 학습권이다. 정혜빈 당선자는 어렵게 수소문해 여덟 명의 정신질환 대학생을 만났다. 대학교와 전공은 다르지만, 저마다 자리에서 그야말로 ‘버텼다’고 했다. 그들은 교육 책임을 방기하는 대학도, 마땅한 인식이 없는 사회도 아닌 자신을 원망했다. 학점은 보잘것없지만 등록금은 매 학기 똑같이 들어간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학생이 아파하고 있다. 이제 대학이 답할 차례다. 과락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_편집자
코로나19 비대면 상황의 ‘뉴’노멀은 말 그대로 ‘새로운’ 기회로 주어지기도 한다. 우리(28·가명)는 팬데믹 상황에서 이뤄진 비대면 학습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자신에게 훨씬 더 맞는 학습법임을 알게 됐다. 외부 자극이 없는 자기 방에서 강의를 들으니 집중이 수월했고 증상을 이해하는 주변 사람들이 필기를 도와줬다. 대부분의 교수가 온라인 학습 사이트에 활자로 공지를 올리자 과제나 시험 점수도 올랐다. 예전에는 “공부를 못하는 건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경험 뒤 저도 공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대학에 들어와 불안장애를 진단받은 다인(25·가명)도 마찬가지다. “대면 수업일 때는 휴대전화로 녹음해도 앉은 자리에 따라 교수님 목소리가 잘 안 담길 때가 많거든요.” 다인은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바뀌고 나서는 녹화하거나 수업자료를 제공하는 교수가 늘어 비교적 편안하게 학습할 수 있었다. 다인도 “학점이 오른 것보다 자책에서 벗어나 기뻤다”고 말한다.
우리와 다인은 ‘정해진 시간에 교수의 말을 들으며 이해하고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것과 다른 학습법이 가능함을 안내받은 적이 없었다. 법적으로 등록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지원받을 길이 있는데도 말이다. 특별지원위원회를 통해 지원받은 성균관대 1명, 경북대 3명의 사례는 정신질환 대학생의 학습권이 어떤 식으로 보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답률이 아주 낮은 답안’이다. 전국 327개 대학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최근 5년간 미등록 장애학생 지원을 위한 특별지원위원회 심의자료를 요청한 결과, 4명의 사례가 나왔다.(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실이 요청한 교육부 자료)
성균관대의 경우 2018년 ADHD를 가진 학생이 복학 뒤 수강과목 교수자에게 학습지원을 요청했다. 대학은 특별지원위원회를 열어 진단서와 어머니의 편지, 학적부를 근거로 심의했다. 심의 뒤 학습지원이 결정됐고, 교수에겐 학생에 대한 출결 유연성과 과제 제출일 연장, 수업시간 졸림 현상의 이해, 조별 활동의 어려움 등에 따른 대안적 평가 방법을 고민하도록 요구됐다.
경북대는 2021년과 2022년 각기 다른 학생의 ADHD로 인한 교육활동 지원과 학습편의 지원을 요청했다. 대학은 특별지원위원회에서 진단서만을 근거로 학습지원을 결정했다. 강의에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근로장학사업으로 대필과 멘토링을 담당할 학생을 지원했다. 2022년에는 양극성장애와 공황장애를 가진 학생이 학습과 시험 편의 제공을 요청했다. 특별지원위원회 심의를 거쳐 교수자에게 학생 질환에 대한 설명이 담긴 편지를 발송하고, 수업이나 시험 시간에 지정석을 제공했다.
경북대는 특수교육법과 교육부 지침에 따라 자체 규정을 마련했다. “특별지원위원회 심의에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최대한 지원하자는 의견이 모여서 규정을 세웠다. ‘차후 4주 이상 치료를 요하는 경우’ 등이 기준이다.”(경북대 장애학생지원센터 관계자) 한 학생은 의료기록을 가져올 수 없는 상황이라 학교 상담센터와 연계해 검사받도록 하고 검사 결과를 근거로 심사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지적된다. 학생이 먼저 신청해야 지원할 여지가 생기고, 학생이 자신의 정신질환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부담을 느끼고 포기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질환을 앓아도 어느 대학교이냐에 따라 학습지원이 천차만별인 셈이다. 김동일 교수(서울대 교육학)는 일차적으로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누구를 장애학생으로 볼 것인지 판단하는 절차와 전문인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보니 학습지원을 결정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 어렵다.
그나마 고무적인 점은 2022년 10월 특수교육법이 개정돼 장애학생지원센터장의 자격과 특별지원위원회 위원의 자격에 대한 조항이 신설됐다는 것이다. 2018년 ‘장애인식개선교육’이 법정의무교육으로 지정된 데 이어 장애학생지원센터 담당 업무에 포함됐다.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장애를 지닌 학생의 학습지원을 가로막는 벽이기 때문이다.
외국 대학의 사례를 살펴보면 사실상 모든 장애를 위한 학습지원 체계와 전문인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은 중앙의 대학장애지원센터와 단과대학별 코디네이터(관리자)를 뒀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은 접근성서비스팀에 중앙·현장 접근성 고문과 학습, 보조공학, 상담 등 분야별 담당자를 뒀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장애고문서비스팀에 장애유형별 고문과 도서관·경력·컴퓨터 등 분야별 담당자를 두고 단과대학별 담당자를 지정했다. 케임브리지대학은 장애지원센터에 장애·지원 유형별 고문, 코디네이터, 매니저 등을 뒀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 우리와 다인이 다녔다면 어떤 지원을 받았을지 알아봤다. 오슬로대학은 정신질환 등의 사정으로 맞춤형 지원이 필요한 학생이 입학하면 지원요청신청서를 학부에 보내 각 학생의 신청서를 개별 심사한다. 신청서 작성법, 맞춤형 지원 등 상세한 정보를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고 온라인 신청도 할 수 있다. 오슬로대학 ‘교육의 질 사무소’ 쪽은 “신청 과정에서 장애 진단 확인 서류를 요구하지 않는다”며 “대신 학생이 장애나 특별한 필요성 때문에 자신의 학업에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나 불이익이 있는지 설명하는 문서를 내게 한다”고 설명했다.
노르웨이는 ‘대학 및 전문대학 관련 법률’ 제4장 3조에서 “장애 및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학생은 동등한 훈련과 교육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학습환경, 교수, 교재 및 시험에 적합한 맞춤형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한다. 노르웨이 교육부가 정의한 지원 대상은 신체적, 심리적 또는 학습 문제와 관련된 장애가 있거나 특별한 필요가 있는 학생이고 정신질환이 있는 학생도 포함된다.
강득구 의원(국회 교육위원회)은 사각지대에 놓인 정신질환 대학생을 찾아내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각 대학에서 운영하는 장애학생지원센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학생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것이다. ‘학습에 대한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 about Learning) 관점에서 정신질환 대학생들의 질환 성격에 맞게 촘촘하게 학습활동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서는 국가와 대학의 지원체계를 지금보다 훨씬 강화해야 한다.”
정혜빈 제1회 표지이야기 공모제 당선자·대학생 hbwork15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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