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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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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시대에 맞선 축복의 언어를 배워라

각자도생의 정글 사회에 돌파구는 없을까…
퀴어축제 성소수자 축복한 이동환 목사가 가르쳐준 깨우침
등록 2022-12-02 06:18 수정 2022-12-06 05:09
성소수자 축제에 참석해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회 재판에 기소된 이동환 목사가 2020년 8월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성소수자 축제에 참석해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회 재판에 기소된 이동환 목사가 2020년 8월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더하고 뺄 것 없는 저주의 시대다. 정치인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공론의 공간에선 저주가 난무한다. 한쪽에선 성직자가 비행기가 떨어져 대통령이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글을 공공연히 올렸다가 징계받고, 다른 쪽에선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정치 무당”이라는 극언까지 나오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 간 상대 당 의원을 저주한다. 여기에는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은 고사하고 자기 입이 더럽혀질까 걱정하며 건사하려는 마음 따위는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문제는 이런 저주의 말이 ‘정의’의 이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저런 말을 하면 지지하는 사람들은 “뭐가 문제냐, 바른말을 했는데!”라고 옹호하고 상대방은 “저 말 자체가 저들의 상태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반발한다. 이쪽에선 환호를 이끌어내는 말이 상대쪽에선 더할 나위 없는 모욕과 혐오의 말이다. 한쪽에는 바로 그 말이 더할 나위 없는 정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다른 쪽에는 그 말이 빼도 박도 못하게 그가 얼마나 불의한 자인지를 보여준다.

정의에 대한 상반된 믿음, 실체냐 절차냐

같은 말을 두고 이렇게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는 큰 이유는 그 말이 정의 실현의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의’다. 많은 사람이 공정에 목매는 것도 한국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정의로운 것은 공정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공정을 넘어 정의를 추구하는 것,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 적극적인 조처를 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앞의 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정의론에 입각해 있다. 비행기가 떨어지기를 바라거나 상대방에게 극언을 퍼붓는 것은, 정의를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부정의한 방법을 쓰더라도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정의는 절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공정을 넘는 정의를 부정하는 쪽에서 보면 정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절차적 문제일 뿐이다. 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결단코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오직 개인이 자기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정의가 오로지 절차적 문제가 됐을 때 가장 정의로운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자신이 오롯이 책임지는 것이다. “누가 가라고 했냐? 가서 벌어진 사고이니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나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바로 그렇다. 이 말에서는 개인이 선택해 벌어진 일에 다른 이의 연민이나 연대를 바라는 건 나약한 짓이고 나아가 그가 나약한 존재임을 방증한다. 이런 나약한 자를 방치하거나 동정해 끌려가는 것이 사회를 부패시키고 부정의하게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넘어 냉혹과 냉소가 정의다.

<불안한 현대사회>의 저자 찰스 테일러가 말한 완전히 상대주의적 주관주의에서는 개인의 선택은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한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그가 져야 한다. 선택에 대해서도, 책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관여하거나 개입할 여지 따위는 없다. 물러서는 것만이 도덕적이고 정의롭다. 망하더라도 냉정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정의롭다. 오히려 개입하는 자가 상황을 망칠 가능성이 크다. 각자도생해야 한다.

구당 작가가 <밀양을 살다> 유해정 작가의 강의를 듣고 그린 그림. 송전탑 개발로 파괴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구당 작가가 밀양을 위해 그림 싣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구당 작가 제공

구당 작가가 <밀양을 살다> 유해정 작가의 강의를 듣고 그린 그림. 송전탑 개발로 파괴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구당 작가가 밀양을 위해 그림 싣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구당 작가 제공

환대를 무력화하는 냉소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장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이 ‘환대’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뿐만이 아니다.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도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함을 잘 안다. 환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환대를 기대할수록 책임지지 않는 비겁하고 나약한 자라는 낙인이며 돌아오는 것은 네 책임이라는 냉정한 답변이다.

이 말의 실체는 저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의는 선택에 따라 책임지는 것인데 다수의 경우에 책임의 결과는 그 사람의 파멸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 오로지 파멸하는 것으로 책임질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파멸돼야 책임이 완수되고 정의가 실현된다. 지금 다수의 사람이 열광하는 이야기는 응징당한 이야기를 넘어 망한 이야기, 파멸한 이야기다. 그것도 죽지 않고 파멸해야 한다.

환대를 무력화하는 이 저주의 시대에 돌파구는 없을까? 여기서 나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사람이 있다. 이동환 목사다. 잘 알려진 대로 감리교 소속의 이동환 목사는 2019년 인천퀴어축제에서 축복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단 법정에 소환돼 3년간의 재판 끝에 2022년 10월 정직 2년의 처벌을 받았다. 재판하는 동안의 비용을 모두 이동환 목사가 부담해야 한다는 경제적 처벌도 같이 내려졌다.

2019년 축복식 이후에 나는 이동환 목사와 주간지 <시사IN>에서 대담을 나눴다. 그 대담이야말로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극단주의자에게 납치돼 양극화로 치닫는 세상에서 사람들 간의 결속을 재건하는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돌파구를 그의 축복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담을 시작하기 전 위로의 말을 전하는 와중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축복은 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복을 내려줘요.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복은 오직 하나님만이 내려줄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면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치지 않고 안녕하라고 빌어주는 것, 그것이 축복이에요. 이건 성직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자격 따지지 않고 안녕과 평화를 비는 마음

그가 말한 축복은 상대주의적 주관주의의 시대에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물러나며 무관심해지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축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 축복이 복을 내려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대방을 가려야 한다. 그가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한다. 복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복을 주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된다. 그래서 상대의 자격을 따져야 한다.

반면 이동환 목사가 답답해하며 한 말처럼 축복이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주는 것이면 그 복을 받을지 말지는 축복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복을 받고 싶다면 복은 그에게 가고 그렇지 않다면 복은 그 사람을 떠난다. 이는 이동환 목사의 말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리스도교의 성경에서 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집의 평화를 위해 빌어주라고 말하면서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의 평화가 그 집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없어 평화가 돌아올 때 물러나며 그 집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 그것까지가 아마 축복일 것이다. 그가 평화를 거부했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처럼 축복의 핵심에는 그가 누구이든 평화를 바라는 마음, 그가 평화롭지 못하면 그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환대를 기대할 수 없는 각자도생의 세상으로 나가니 얼마나 걱정되는가. 그가 누구이든 그의 안녕과 평화를 걱정하는 마음이 바로 축복이다. 돈을 벌고 출세하고 권력을 갖는 힘을 주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말이다.

이동환 목사와의 대담은 그 뒤 ‘폭로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이동환 목사에게 배우고 학생들에게 전해준 축복에 대한 이야기는 환대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에 ‘불가능성 가운데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으로서의 작품을 열망하는 학생에게 좋은 영감을 줬다. 우리는 간섭하고 판단하지 않되 걱정하고 안녕을 바라며 삶을 돌보는 방법으로 개입할 수 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걱정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삶은 여전히 두렵지만 두근거리는 것이 되며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지구는 살아갈 만한 곳이 될 것이다.

고맙게도 학생들은 자신의 영감을 그림으로, 이야기로 구현해내고 있다. 지난 2년간 청강대에서 쭉 함께 공부한 구당 작가는 기록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밀양을 살다>의 공동저자인 유해정 작가의 강의를 듣고 이런 장면을 그렸다. 우리 삶 전체를 압도하는 것으로서의 송전탑, 그 개발로 파괴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땅을 빼앗기고 서울을 위해 지방이 파괴되는 것을 넘어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을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당하지만 그 파괴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 서로를 걱정하고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기서 나아가 2022년 클립스튜디오 세계 공모전에서 입선한 작품 <지구로 가자>에서 주인공 베네디크는 어떻게 살더라도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지구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거기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힘든 것은 상관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는 삶이다. 그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용기를 낸다. 그리고 영혼을 각자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 곳에 보내주는 역할을 맡은 헤르메스는 그 용기를 축복하며 환대를 기대할 수 없는 지구로 그를 보내며 따뜻하게 챙겨입으라고 신발과 모자를 씌워주며 “지구로 가자”고 말한다.

파멸에 저항하고 축복을 나눌 때

저주가 정의로 도착된 시대다. 여기서는 파멸 말고는 정의로운 것이 없다. 이 환멸과 파멸의 시대에 사람을 견디게 하는 것, 바로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 안녕을 바라며 빌어주는 마음인 축복이다. 축복이 있다면 저주를 견딜 수 있다.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말한다. 주인공이란 저주에 혼을 뺏긴 자가 아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저주가 주인공이 되고 만다. 이것이 서로의 파멸만을 기원하며 저주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한국 정치에 주인공이 없는 이유다. 주인공이 없으니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저주의 말만 ‘포르노’처럼 배설될 뿐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이 시대에 온몸으로 맞서는 언어이며 몸짓이다. 축복하는 자는 상처받지 않을 수 없으며 저주받는 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시대의 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축복의 의미를 나에게 알려주고 나를 일깨워준 사람. 나를 통해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지구로 가자”는 용기를 내고 “나비야 우얄꼬, 인자 니 밥은 누가 주노”라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게 한 사람. 이동환 목사가 축복한 것은 2019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있던 분들뿐만이 아니다.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우리’ 교실이야말로 그의 축복을 한가득 받았다. 그 사람, 이동환의 안녕을 이제 축복받은 ‘우리’가 걱정하고 저주로부터 보호하며 축복해야 할 때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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