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학기에 다룰 작품을 두고 학생들과 상담하는 시간이다. 다음 학기에 함께 공부할 학생과 연출하고 싶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 학생에게 “이 작품, 그런데 대사가 좀 산만하고 장황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가장 최고의 이야기로 치는 건, 뺄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다. 등장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대사 하나, 소품 하나가 정확하게 제 의미를 가지며 군더더기 없이 제자리에 배치돼 시계 나사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작품을 볼 때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배우는 학생들이 하나의 이유만을 가지고 작품을 선정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어떤 한 요소가 마음에 들어 시작하지만 작품을 선정하고 다루면 그 작품 전체와 승부를 걸어야 한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덥석 작품을 물어버리면 보이지 않았던 것이 방해돼 전체를 하나로 잘 엮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이자 만행(!)은 자기가 제대로 읽어내고 통합하지 못한 것을 잘라내 버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극적일 수 있지만 앙상해지고 망가진다. 사실 많은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하면 “대사는 좀 산만하지만 이러저러한 요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걸 잘 살려보고 싶어서요”라고 답한다.
그런데 이 학생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자기는 바로 그래서 이 작품이 좋고 정말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작품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저런 장황하고 산만한 말이야말로 정말 살아 있는 말이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정도로 대답하는 학생이라면 더 가르칠 것이 없다.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한다. 준비가 충분히 된 것 같으니 한 학기 공부 열심히 하며 작품을 잘 다뤄보자고 약속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은 질서의 문제다. 내 머릿속에 갖춰진 질서에 잘 부합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말 아름답군” 하고 감탄한다. 여기서 초점은 ‘정말’에 있다. 이 말은 이미 내 머릿속에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들어 있는데 거기에 딱 맞는 것, 나아가 이 정도로까지 딱 맞는 게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는데 뜻밖에 그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딱 맞는 것을 만나면 정말 감탄하며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워야 할 것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러면 너무 속상하다. 결국 그 아름답지 못한 것을 추려서 잘라내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장 일차적인 방법은 잘라내고 버리는 것이다. 조각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조각의 비유를 들 수 있다. 거대한 돌덩이에서 어떤 형상을 발견하고 그 형상을 실제로 드러내기 위해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고 잘라내어 버린다. 그 잘려나간 부분은 불필요한 ‘잉여’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은 질서에 맞지 않는 것, 질서를 흩트리는 것을 잉여/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근대사회는 설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설계하는 행위는 단적으로 말해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없는지를 정한다면 쓸모없는 것을 대량으로 양산해서 처리하는 행위다. 더욱이 설계는 언제나 오류와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과도한 설계’일 수밖에 없고, 이는 설계 자체를 과잉이 되게 하며 과잉의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현대의 질서, 현대의 아름다움이란 한편에서는 무엇이 불필요하다고 잘라내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 대량생산된 쓰레기를 처분하거나 은폐하는 과정이다.
이런 설계의 미학이 곧 정치의 미학이다. 정치는 항상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며 그 설계된 위치에 권력이 명령하는 대로 모든 것이 위치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역 앞에서 이동권을 호소하며 1인시위를 하는 것은 제 위치에 있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동권을 실천하기 위해 붐비는 출근 시간에 휠체어를 밀고 지하철로 들어가는 것은 추한 일이다. 설계에 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가 광장으로 뛰어나와서 트럭에 올라 음악을 틀고 자신의 프라이드를 외치는 것은 추한 일이다. 거기는 성소수자를 위해 만든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미학화를 추구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통치권력이다. 통치권력은 정치를 억압하려 한다. 정치는 늘 불화를 야기하고, 불화는 질서를 해치고 위험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의 미학화를 추구하는 통치권력은 극단적으로 정치를 불능에 빠뜨리는 선전/홍보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설계를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나머지를 다 불필요한 잉여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화가 아닌 제거와 축출이라는 ‘최종 처리’만을 위한 전쟁이라는 정치가 그런 점에서 정치의 미학화를 추구하는 통치권력의 최종적 도착점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불필요해 보이는 그것을 과정에 필수적이자 필연적인 것으로, 나아가 핵심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사회를 다르게 보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 보면 설계가 ‘버린 돌’을 거꾸로 모퉁잇돌로 삼아 다시 건축해보는 것이다. 이처럼 추하고 불필요한 것을 아름다움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장 핵심적이고 필요한 장치로 보고 활용하는 방법이다.
앞에서 말한 학생의 경우라면 ‘장황하고 산만한 말’을 그저 장황하고 산만한 말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정말 살아 있는 말’로 인식하고 나아가 작품에서 연출로 ‘정말 살아 있는 말’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필요해 보이는 것을 장치로 활용한다는 말의 의미다. ‘활용’이라는 말에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을 아름답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야기가 아름다워지는 것이 활용이다. 그것을 쓸모 있게 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이야기가 쓸모 있게 되는 것이 활용이다.
이렇게 보면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게 활용하는 것으로서 내버려두는 것이 된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불필요해 보이는 요소와 교감하며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든 사람, 즉 ‘창작자’가 된다. 이 경우 창작은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일이 되며 정치의 미학화를 초라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창작자는 잘려나가는 것이 왜 잘려나가야 하는지를 질문하며 잘려나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저항한다. 사회의 설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추하고 불필요해서 잘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잘려나가기 때문에 추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이 발터 베냐민이 말한 정치의 미학화에 반하며 그것을 초라한 것으로 만드는 미학의 정치화를 달성하는 예술의 역할이 될 것이다.
이런 창작자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두 가지 마음이다. 하나는 잘려나가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하는 ‘연민’의 마음이다. 연민이라고 하면 연대에 견줘 하급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연민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나를 연결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존재의 절대성에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잘려나가는 것이 그렇게 잔혹하게 잘라냄에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아래로 내려다보며 불쌍한 것을 동정하는 마음일 수 있으나, 거기에 존재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보태지면 그것은 나보다 더 큰 ‘코나투스’(자신의 속성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내적인 경향성 혹은 노력)를 가진 존재로서 존경하게 된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코나투스에 의존하고 그들의 존재와 존엄에 대한 의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 된다. 연민에 감사가 더해졌을 때 비로소 창작자는 추하고 불필요하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돌을 모퉁잇돌로 삼아 그 위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집‘을 짓게 된다. 모두가 머무를 그 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될 것이다.
물론 창작하려는 모든 학생이 저 학생처럼 잘려나가는 것에 연민하고 감사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란 예외적인 저 학생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학생들도 창작할 때 자기 안에서 저런 마음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조심할 점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연민과 감사의 마음이 개인의 특별한 감수성이자 재능이 아니라 사회적인 감수성이자 역량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지 않겠는가. 부족하지만 이번 학기에도 그 역할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같이 고민해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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