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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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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도 아닌데 왜 쓸고 닦고 꾸미냐고요?

부동산을 벗기면 드러나는 진짜 집, 내 집을 내 집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록 2022-01-26 15:02 수정 2022-01-26 22:02
정경섭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탠드 조명을 갖춘 거실. 본인 제공

정경섭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탠드 조명을 갖춘 거실. 본인 제공

집. 우리 삶의 목격자. 아카이브, 요새, 베이스캠프. 혹은 이 세계에 마련한 유일무이의 영토. ‘부동산’이라는 욕망의 이름을 한 꺼풀 벗겨내면 드러나는 집의 진짜 이름들이다. 그러니 집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은 소유자가 아니다. 거주자다. 매일 그 집을 쓸고 닦는 이들, 그 집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위로받는 이들. ‘세입자’라는 가난한 이름으론 다 설명할 수 없는 집과 그들의 관계를 임차인들에게 물었다. 임대인 갑(甲)이 소유한 그 집을, 임차인 을(乙)인 당신의 집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당신 것이 될 수 없는 그 집을 사랑하는가.

서울 용산역이 내려다보이는 레아의 거실. 본인 제공

서울 용산역이 내려다보이는 레아의 거실. 본인 제공

플로어 조명, 2인용 소파, 퀸베드와 책장…

그런 집이 있다. “생각하면 늘 겨울 생각만 나는 집. 사시사철이 겨울이었던 집. 사는 것이 한겨울 엄동설한 같았던 집.”(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 집>) 평생 ‘내 집’을 가져본 일이 없는 정경섭(51)에게도 그런 집들의 기억이 있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집,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 다 쓰러져가는 한옥집”에서 그는 자랐다.

활동가의 길을 택한 삶은 가난했다. 결혼 뒤에도 늘 옥탑방을 전전했다. 지금 그는 서울 은평구의 작은 아파트에 세들어 산다. 온종일 밖에서 전투를 벌이고 오는 그에게 이 작은 아파트는 완벽한 베이스캠프다. 특히 좋아하는 공간은 이케아에서 구입한 7만원짜리 플로어 조명 아래다. 백열등을 켜고 그 아래서 잠시 책을 읽거나 반려견 ‘요다’와 쉬는 것을 좋아한다. “공간이 규정하는 삶이 아니라, 삶이 규정하는 공간이 돼야 하는데 부동산 가격이 살 곳을 결정하는 시대에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내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겠다.” 그는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것마저 행복해서 더 가난한 이들에게 창피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대학에 오면서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덕임(39·닉네임)과 안평(30·닉네임)도 10년 넘게 ‘사시사철 겨울 같던’ 집들을 겪었다. 청춘의 셋방살이란 대개 남루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집을 구하다보면 서울엔 반지하나 옥탑방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서울에서 혼자 산 지 20년. 서울 마포구의 한 빌라에 사는 덕임의 살림은 여전히 단출하다. 거실과 침실만으로 나뉜 10평 남짓한 1.5룸 셋방이다. 2019년 이 빌라에 들어오기까지, 덕임은 복층 원룸에서 10년을 살았다. 1인용 소파를 놓을 공간도 없던 곳에서 이 집으로 이사 온 뒤 그는 생일날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2인용 소파를 사들였다. 소파는 그의 자랑거리다. “나한테 소파는 공간적으로 넉넉함을 상징하는 가구였다. 실제로 소파에 앉아서 뭔가를 하는 일은 많지 않은데 책상에 앉아 일할 때나 침대에 누워 소파를 볼 때 뿌듯한 기분이 든다.”

앉지도 않을 ‘전시용’ 소파가 놓인 이 작은 우주를 덕임은 하루 한 번 이상 쓸고 닦는다. 반지하에서 원룸으로, 원룸에서 빌라로 옮겨오며 “인생이 바뀐 기분”이라고 했다. 계약기간 동안 바뀐 집주인은 덕임의 집을 들여다본 적도 없다. 그저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빌라의 같은 집 두 채를 보유한 채 외지에 거주하고 있다. 마룻바닥과 창틀을 윤이 나게 닦으면서 덕임은 “원래 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이 집 주인 아니냐”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집주인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한, 덕임은 쭉 이 집에서 살고 싶다.

안평이 직접 맞춘 책장이 있는 서재 풍경. 본인 제공

안평이 직접 맞춘 책장이 있는 서재 풍경. 본인 제공

18년을 내리 살게 한 집주인의 선의

옥탑방과 반지하방, 고시원을 두루 섭렵한 안평은 생애 첫 정규직 직장에 취직했을 때 대출받아 1억원대 전셋집을 구했다. 서울 중심에서 떨어진 빌라여서 그 돈으로 방 세 칸을 얻었다. 처음으로 ‘방’이 아닌 ‘집’을 관리하며 살 수 있게 됐다. 큰돈을 들여 생애 첫 퀸베드를 샀다. “관짝 같은 침대에 누워 다리를 책상 밑에 두고 자던 고시원 시절이 떠올라 감개무량했다.”

처음으로 책장도 짜맞췄다. “예전 집에선 쌓아놓거나 책장에 겹겹이 꽂아넣었는데, 혼자 살기엔 조금 큰 이 집을 계약한 이유도 서재를 갖고 싶어서였다.” 탁자와 소파, 늘 갖고 싶던 커다란 야자 화분으로 서재를 꾸몄다. 물건을 첩첩산중 쌓아놓고 살던 시절이 끝나고, 내 물건을 펼쳐놓을 수 있는 삶. 그것으로 안평은 ‘내 집’의 안온함을 만끽하고 있다.

어느 집에나 집을 떠받치는 ‘대들보’가 있다. 이주현(48)에게 그 집의 대들보는 180㎝가량 길게 빠진 떡갈나무 탁자다. 방 세 개짜리 집이지만 그 집의 팔할은 거실에 놓인 이 탁자가 지배한다. 7년 전인 2015년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구 거리에서 직접 산 탁자는 두꺼운 다리만큼이나 든든하게 이주현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는 이 탁자에 앉아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술도 마신다. 셀 수 없는 친구들이 이 탁자에 앉아 그와 삶을 나눴다. 그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세 자정을 넘겨, 친구들은 이주현의 집을 “시간을 잃어버리는 곳, 시실리”라고 불렀다.

서울 합정동 복판의 전셋집이 시실리가 될 수 있었던 건, 좋은 탁자 때문만은 아니다. 2004년부터 18년을 큰 부침 없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도록 내준 집주인의 ‘선의’가 차지하는 무게가 크다. 대학에 와서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다세대주택과 빌라를 전전했던 이주현은 이 집을 보러 온 날 처음으로 “집다운 집”을 만났다. 도시에 광장이 있고 골목이 있듯, 거실이라는 공용 공간과 방이라는 사적 공간이 뚜렷이 구분되는 집의 구조가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때 가진 돈으로 합정동 일대를 다니며 집을 보면, 집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치 충격적인 모양을 한 집이 많았다. 네모반듯하고 두꺼운 벽이 있어 층간소음이 없는 튼튼한 집. 거실이 넓고 집다운 집. 이 집에 와서야 서울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게 됐다.”

집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며 기거하는 공간이 아니라 정신세계와 연결된 다른 차원의 자아”이고 “세계관이 형상화된 정서적 왕국”(김교석, <오늘도 계속 삽니다>)이다. 이주현이 세내어 사는 그 집은, 그가 뿌리내린 지난 18년 동안 그의 삶과 영혼의 모양을 따라 빚어졌다. “혼자 살지만, 사랑방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나도 외롭지 않고 친구들 누구나 찾아와 아늑한 가운데 힘을 얻어갈 수 있는 집, 그런 삶의 중심에 거실과 탁자가 있었다.” 그 탁자에 앉아 주방의 냉장고를 바라보면 친구들이 남기고 간 애정의 말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주변에서 ‘남의 집에 왜 돈을 쓰느냐’는 말을 들으며 600만원을 들여 집을 리모델링할 때도 그는 그저 ‘내가 사는 곳이 내 집’이라고 굳게 믿었다.

숱한 이들이 밥과 술을 나눈 이주현의 거실 탁자. 본인 제공

숱한 이들이 밥과 술을 나눈 이주현의 거실 탁자. 본인 제공

남이 싫어하는 조건에 반하다

집 안에서만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집은 그와 세계를 잇는 구실을 해줬다. 집주인은 수도가 동파되면 함께 녹여주거나 그가 집을 비울 때 화초를 돌봐줬다. 아파트 단지가 아닌 ‘동네’살이를 하며 서울살이에서 흔치 않은 이웃들을 만들 수 있었다. 공구가 없으면 이웃한 고물상에 가서 빌려 쓰고 작은 선물을 하거나, 솜씨 좋고 물건 좋은 가게가 어디인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나에게 ‘안전망’이 있다고 할까. 합정동과 망원동 특유의 가치지향적인 지역 생태계도 이곳에서 오래 살게 한 배경이었다.”

이주현에게 사랑방인 집이, 어떤 이에겐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요새다. 레아(41·닉네임)에게 집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사이클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공간이다. ‘익숙함’과 ‘최적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치는 레아는 2년 전 짐을 꾸려 독립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본가의 방과 지금 혼자 사는 전셋집이 최대한 자신에게 비슷한 안정감을 주도록 꾸몄다. 창의 방향도 남향으로 같고, 침대를 놓은 구조도 같다. 커튼마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색, 같은 소재의 제품으로 매달았다.

집주인과의 미묘한 신경전만 빼면, 3년차에 접어든 서울 용산의 1.5룸 전셋집에서 당분간 움직일 생각이 없다. “호텔 스위트룸도 필요 없다. 필요한 모든 물건이 내 집에 있고, 나에게 온전히 최적화된 공간이기 때문에 집에서 쉬는 게 가장 편안하다.” 그 ‘최적화’의 정점에 침대가 있다. 독립을 결심하기 전부터 그는 특정 브랜드의 킹사이즈 침대를 점찍어뒀다.

사람이 집에 반할 때 거기에는 별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 사랑에 빠지듯 단박에 반하는 것이다. 레아는 오감으로 이 집을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정방형’으로 난 집을 두고 먼저 살던 거주자는 “집이 불편하게 빠졌다”고 했지만, 그는 정방형의 집 모양이 본가의 생김새와 닮아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게 집값 떨어뜨리는 이유가 될 용산역의 기차 소리는 그에게 쾌적한 백색소음이고, 고가도로를 오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는 반짝이는 도시의 별빛이다. “자다가 기차 소리 때문에 깰 때도 많은데, 그마저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안전감과 안정감을 주는 게 내 집이라면, 지금 이 집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덕임이 꼭 갖고 싶었던 소파를 둔 거실. 본인 제공

덕임이 꼭 갖고 싶었던 소파를 둔 거실. 본인 제공

비 오는 날의 우산, 눈 오는 날의 베이스캠프

‘영끌(영혼을 끌어모아) 투자’하는 ‘부동산 광풍’의 시대는 자꾸 우리에게 묻는다. 영끌하는 대신 ‘영혼을 지키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진짜 ‘내 집’이란 어떤 곳인가. “가지고 있다가 값 오르면 팔고 나올 ‘부동산’이 아닌, 비 오는 날의 우산으로서의 집. 눈 오는 날의 베이스캠프”(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 집>)로서의 집 말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집을 더 사랑하기 위해
사르트르의 뒷모습 액자가 걸린 기자의 집 거실 벽. 엄지원 기자

사르트르의 뒷모습 액자가 걸린 기자의 집 거실 벽. 엄지원 기자

함께 보면 좋은 것들

어둡고 낡은 집에 혼자 살 때, 고래 뱃속의 요나(혹은 피노키오) 또는 남신의주 유동의 박시봉이 된 것 같았다. 적당히 눈에 띄는 곳들을 꾸미고 적당히 후미진 곳들을 가려두었다. 친구들은 “낡은 집을 예쁘게 관리하고 산다”고 했지만 늘 꺼림칙하게 숨겨둔 곳들이 있었다. 집은 클수록 좋은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나’라는 사람에 맞춤한 집을 찾아 나답게 가꿔가는 일은 난제다. 독립해 혼자 살게 된 뒤 몇 년 동안 버리고 사고, 버리고 사는 일의 연속이었다. 자연스럽게 나 또한 이 시대의 ‘집꾸미기’ 열풍에 열정적으로 동참해 숙제를 풀어가고 있다. ‘나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를 꼽아봤다.

넷플릭스 메이크오버 프로그램 <퀴어 아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메이크오버 프로그램 <퀴어 아이>. 넷플릭스 제공

<퀴어 아이> ‘멋쟁이 5인방’, 5명의 게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는 넷플릭스의 메이크오버 프로그램. 스타일만 바꿔주는 게 아니라, 마음 고쳐먹는 법, 혼자서도 밥해먹는 법, 집 꾸미는 법을 가르쳐주는데 한 인간의 내면이 외면으로 드러난다고 믿는 ‘댄디즘’의 신봉자로서 매회 ‘아멘’을 외치게 된다. 무엇보다, 그럭저럭 괜찮은데 5인방에게 혼나는 출연자의 집 상태를 보면서 우리 집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

유튜브 채널 <마세슾>. 유튜브 갈무리

유튜브 채널 <마세슾>. 유튜브 갈무리

<마세슾> ‘마이 세이프 스페이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의 안전 공간이 필요하다’를 모토로 크리에이터 마세슾이 여러 소품을 만들거나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보는 것만으로 안구가 정화된다. 우리 집 상황은 잠깐 잊을 수 있다.

<디렉토리 매거진> ‘직방’이 만드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요즘 흔한 ‘오늘의 집’이나 ‘꿀하우스’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집의 형태와 보증금, 월세 규모 등의 카테고리에 따라 밀레니얼세대의 주거 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온·오프라인으로 모두 발행된다.

<오늘도 계속 삽니다>, 김교석 지음(위고) 1인 생활자가 어떤 가재도구 또는 가구를 구비하면 좋은지 실용적으로 알려주는 에세이. ‘집의 안온함’과 ‘일상성’을 가꿔가는 영역에선 전작인 <아무튼, 계속>에 이어 권위자라고 할 만한 저자여서 믿고 읽을 수 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지음(라이프앤페이지) 여성의 주거 생애사를 탁월하게 묘사한 에세이. 글을 읽다보면, 내가 살아온 집들을 되짚고, 앞으로 살아갈 집을 그려보게 된다.

<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한겨레출판) 전남 곡성에서 태어난 작가 공선옥이 그의 옛집 같은 “세상의 서향집에서 옹색하게 살며 쓴 옹색한 글들”. 그와 함께 세상의 변방을 끝없이 서성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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