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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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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엄마, 살릴 수 있던 시간들

‘가정폭력처벌법’ 만들며 알게 된 젠더폭력 통계의 놀라운 사실 여성 대상 폭력은 언제쯤 ‘기타’에서 ‘공식’이 될까
등록 2021-12-04 12:01 수정 2021-12-05 23:25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딸입니다.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사형을 선고받도록 청원드립니다. 피의자인 아빠는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엄마를 죽여도 6개월이면 나올 수 있다고 공공연히 말했으며 사랑하는 엄마를 13회 칼로 찔러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딸이 아빠를 사형시켜달라고 한 이 청와대 청원글은 올라오자마자 삽시간에 전파됐다. 전 국민이 알게 된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이다. 2018년 10월22일 아침 7시16분,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여성이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린다는 신고를 받고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소방대원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씨는 숨진 상태였다. 15초 동안 칼로 무려 13번 이씨를 찌른 뒤 사라진 범인은 전남편이었다.

피해자들이 기댈 언덕이 없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혐오범죄에 대한 대책은 지워지고 ‘화장실 점검’만 경찰청 대책으로 남았다는 자조 섞인 평가가 있다. 젠더폭력은 젠더렌즈가 있어야 보인다. 동서고금, 인종, 계급, 지역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오래된 범죄 중 하나인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호소한 곳이 결국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다. 지난 2년 동안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국민청원 40%가 젠더 이슈, 그중 성폭력 이슈가 63%로 가장 많았다. 모든 범죄 중 성폭력이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게 아니라, 유독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가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씨의 딸이 남긴 청원글은 기댈 언덕 없는 피해자에게 단 하나 남은 자력구제 방식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피해자는 결혼 기간 25년 동안 지속해서 폭력을 당했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범죄인 만큼, 누적된 피해만큼, 가해행위마다 피해자가 보호받을 촘촘한 형사사법체계가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피해자 처지에선 경찰에 에스오에스(SOS)를 쳤지만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고, 국회도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찰·경찰 같은 권력기관을 피감기관으로 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같은 상임위원회에서는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사안에는 집중적으로 질의하지만, 그것이 대책까지 완결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현안이어서 스포트라이트를 세게 비춘 만큼 그림자도 깊다.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이 이제라도 제대로 진단되지 않으면 이 사건의 종결도 ‘화장실 점검’만 남은 강남역 살인사건의 결론처럼 ‘아파트 주차장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다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112 신고접수 보관 기간은 딱 1년

유족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 김아무개씨가 경찰에 신고된 이력은 2015년 2월, 2016년 1월, 2016년 4월, 이렇게 총 3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권미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경찰청에 자료를 요구해 받은 ‘살인사건 혐의자에 대한 가정폭력 신고접수 내역’을 유족 증언과 비교해보니, 경찰청 기록에 남은 것은 총 2건이었고, 그마저도 1건은 신고 내용에는 없고 사후에 근무일지에서 기록을 찾아냈다는 것을 확인했다(표1 참조).

이런 일은 왜 일어났을까? 112 신고 이력 관리가 안 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일인이 여러 번 신고해도 개별 사건으로 처리하기에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출동함에 따라 현행범을 체포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112 신고접수 내용 보관 기간이 1년뿐이어서 지속성과 반복성을 핵심으로 하는 가정폭력은 현행 112 신고체계에선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2015년 2월 신고된 날 경찰은 가해자가 재범 위험이 크다고 판단까지 해놓은 상태였다(22쪽 그림 참조). 경찰은 가정폭력 재발 가능성, 행위 위험성 등을 고려해 A(위험), B(우려) 등급으로 선정하고 필요에 따라 방문 또는 전화 모니터링을 하는데 이 사건의 담당경찰은 피해자가 안전한 상황인지를 주기적으로 체크하지도 않았다. 피해자가 자주 전화번호를 바꿔 연결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가해자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 하는 피해자는 당연히 전화번호를 자주 바꿀 수밖에 없으니 경찰은 그 밖의 다른 연락망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이 범죄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실제 피해자 이씨는 휴대전화 번호를 10여 차례 바꾸고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 등 6곳의 거처를 전전했다. 결국 그는 죽어서야 전남편의 폭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경찰 범죄통계, 관계에 ‘배우자’, ‘성별’조차 없어

피해자가 국가와 최초로 맞닥뜨리는 기록인 112 신고 관리가 이 정도라면 경찰청의 그 밖의 통계는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가장 정확하게 보려면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 입력된 사건기록을 봐야 하는데 이 자료는 관련법에 따라 수사, 공소, 공판, 재판 집행 등 형사사건의 처리와 관련된 업무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며 경찰청에서 제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과 관련된 주무 부서를 모두 의원실로 불러 사건 발생부터 검거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점검했다. 그래야 어디에서 구멍이 뚫리고 사각이 생기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경찰청 범죄예방정책과, 성폭력대책과, 여성청소년과, 112팀, 수사기획과가 한꺼번에 의원실로 왔다. 이렇게 다수의 부서가 한 번에 의원실로 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오신 분들도 의아해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을 인지, 처리, 종결하는 소관 업무를 말하면서 피해자 관점에서 비어 있는 퍼즐을 하나씩 맞춰갔다.

일단 ‘경찰청 범죄통계’에는 범죄유형별로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고용자, 피고용자, 이웃, 지인, 친구, 애인, 동거친족 등 총 15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중에 배우자는 따로 없었다. 통계를 만들 때 배우자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를 안 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이 사건에서 피해자와의 관계는 ‘전 배우자’다. ‘동거친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인’ ‘지인’도 아니기에 ‘기타’로 입력됐을 가능성이 크다. 통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조차 표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일반 살인사건’으로 표기됐을 확률이 높다. ‘범행동기’는 공식 통계에서 이욕·사행심·보복·가정불화·현실불만 등의 항목으로 관리되는데, 이 사건의 동기는 이 중 ‘가정불화’로 표기됐을 것이다. 다른 범행동기는 가해자의 동기를 문제 삼는데 유독 ‘아내 폭력’은 쌍방을 같이 문제 삼는다. 실제로 범행동기 현황 통계를 보면 ‘기타’와 ‘미상’이 58%(‘경찰청 범죄통계’, 2020년)나 차지한다. 통계 자료로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경찰 통계의 대다수 지표에서 ‘기타’에 해당하는 수가 가장 많다. 항목이 다양하지도 않고 중복 표기도 되지 않기에 경찰은 모호하면 모두 ‘기타’를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범죄사실을 유형화해서 입력하는 것을 ‘범죄통계원표’라고 하는데 이는 1962년에 도입되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정 한 번 되지 않았다.

범행동기에 ‘기타’와 ‘미상’이 58%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법률상 ‘가해자·피해자 분리’를 하게 돼 있는데, 이 조치는 결국 가해자는 집으로 가고, 피해자는 집 밖을 전전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가해자·피해자 분리는 ‘가해자 격리’ 조치로 하고 이것이 강제적 성격을 가지도록 경찰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 형법처럼, “때린 사람이 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담아 후배인 김서정 비서가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강화 3법’을 만들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자료 요구-언론 제보-법안 발의까지 눈물겨운 순발력이었다. 그는 늦은 퇴근길에도 이른 아침 출근길에도 더 나은 법조문을 고민했을 것이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가장 오래된 폭력의 고리는 피해자 보호가 법률체계와 형사사법시스템에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것부터 끊어질 수 있고, 문제제기를 우리가 했으니 마무리도 우리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더불어 112 신고 시스템을 개선해서 신고 이력 보관 기간을 늘리고 신고 이력을 명시하도록 했고 이는 관계 부처 합동 가정폭력 방지 대책에 즉시 반영됐다(표2 참조).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회복을 위해 형사조정절차 같은 ‘회복적 사법절차’가 있음에도 가정폭력은 굳이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조항에 ‘가정 보호’를 넣어서 보호 대상이 피해자인지, 아니면 (폭력으로 점철된) 가정 그 자체인지 모호하게 한다. 이 모호함 때문에 피해자가 최초로 맞닥뜨리는 기댈 언덕인 수사기관이 망설이면, 피해자는 죽거나 자력구제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방법이 없다. 노인·아동·여성에 대한 폭력은 노인의 관점, 아동의 관점, 여성의 관점으로 봐야 보인다. 제대로 보고 정확히 기록해야 이 무수한 범죄가 ‘기타’ 아닌 ‘공식’이 될 수 있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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