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위드 코로나’가 시작됐습니다. 이제 야구장에서 ‘치맥’도 할 수 있고 밤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있으며 교회에서 대면 예배도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집회입니다.
경찰은 2021년 11월1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를 원천 봉쇄하려 버스를 동원해 ‘차벽’을 쌓았습니다. 민주노총은 장소를 옮겨 결국 집회를 열었지만, 정부는 집회 주최 쪽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처벌할 방침입니다.
앞서 민주노총은 7월 강원도 원주에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본사 앞에서 공단 협력업체 소속인 고객센터 직원들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였는데, 원주시는 집회에만 예외적으로 4단계 기준을 적용해 1인시위 외의 모든 집회를 금지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집회 현장에서 다른 곳보다 더 빠르게 퍼지기라도 하는 걸까요?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본권리입니다. 우리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이는 자신의 권익을 주장할 다양한 무기를 가졌지만, 사회적 약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궁지에 몰렸는데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을 때 집회는 절박한 처지를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플랫폼노동자, 택배노동자,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 영세 소상공인, 프리랜서가 코로나19 유행 이후 과로와 저임금에 시달리거나 해고에 내몰리며 생존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집회를 열지 말라는 건 벼랑 끝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방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생명권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자의적 기준으로 집회의 자유만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도무지 형평성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월10일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야구장에는 2만 명 넘는 관중이 모였습니다. 11월11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아랍에미리트(UAE)전에 입장한 관중은 3만 명이 넘습니다. 대규모 관중이 모인 스포츠 응원과 노동자들의 집회가 다를 게 무엇인가요? 왜 한쪽은 합법으로 장려되고 다른 쪽은 불법으로 처벌받나요?
마스크를 착용한 실외 집회는 실내 활동과 비교할 때 감염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실제 2020년부터 열린 민주노총 집회를 매개로 코로나19가 전파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집회에만 유독 가혹한 것은 단언컨대 과학보다는 이데올로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권리를 주장하는 집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이 작동한 것이지요.
집회·시위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온 주범은 다름 아닌 언론입니다. 오래전부터 언론은 안보를 위협하고 시국을 혼란스럽게 한다며 학생과 노동자의 집회에 빨간색을 덧칠해왔지요. 공안정국이 끝나고 민주화도 됐지만, 언론의 ‘데모’ 알레르기는 21세기에도 여전합니다. 집회의 자유를 유예해야 할 만큼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북괴’에서 ‘바이러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신종 감염병은 언론이 혐오하는 대상인 노동자와 그들의 집회를 봉쇄할 좋은 핑곗거리가 돼주었습니다.
언론은 길어지는 팬데믹(감염병 대유행)과 불황의 책임을 떠안길 ‘공공의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그 적은 한때 성소수자였고, 중국 동포였으며, 지금은 노동조합입니다. ‘상인들 “매출 반토막인데 민노총 집회 열불 나”’(<동아일보> 2021년 7월23일), ‘이 와중에 총파업 민주노총, 민폐노총이란 말도 부족하다’(<조선일보> 10월20일), ‘주말 2만 명 ‘꼼수 기습 집회’…민주노총의 민폐’(<아시아경제> 11월15일) 같은 기사는 제목만 봐도 섬뜩한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보수언론만 그런 게 아닙니다. 노동자의 편이라는 진보언론 <한겨레>조차 ‘코로나 위기 속 민주노총 집회, 공감 얻기 어렵다’(2020년 11월24일), ‘민주노총 ‘원주 집회’, 자제하는 게 옳다’(2021년 7월23일) 같은 사설로 집회에 반대한 바 있습니다. 공영방송 KBS도 ‘민주노총 집회 강행…경찰과 몸싸움’(7월23일) 등의 리포트에서 집회 배경과 맥락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감염 확산을 우려하는 내용만 전하기도 했습니다.
방역은 본래 민주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와도 거리가 멉니다. 방역 당국은 때로 불가피하게, 때로 손쉽게 자유와 인권을 유보하는 선택을 내립니다. 이때 언론마저 방역이라는 일방적 가치 기준을 무작정 좇아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모이지 말라고 눈을 부릅뜨는 건 언론이 할 일이 아닙니다. 방역 수칙 안에서 어떻게든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집회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공동체에 전달할 수 있는 대안적 창구를 언론이 마련해줘야 합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호해 ‘방역’과 ‘민주주의’라는 때로 상충되는 두 가치의 균형을 찾는 건 언론의 몫입니다.
우리 언론에 이런 수준의 고민을 기대하는 건 한가한 이상론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다수 언론이 사회적 약자의 현실과 권리에 철저히 무관심하니까요. 지금은 언론이 노동자를 집회로 내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목놓아 외쳐도 언론이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시대의 뉴스는 재택근무로 달라진 생활양식을 고민하며 국외여행 재개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상층 화이트칼라의 삶을 전하는 데는 빠르지만, 실직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빈곤층의 위급한 현실을 담아내는 데는 인색하지 않던가요?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광고주가 선호하는 ‘먹고살 만한’ 독자와 시청자에게 집중됐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집회 보도는 오늘날 언론이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알리바이 뒤에 숨어 ‘재난 약자’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을 드러내는 언론이 어디인지, 똑똑히 기억해둬야 하겠습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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