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사망자 중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 장례를 치르고 난 유골함을 봉안하는 장소다. 혹시라도 뒤늦게 나타날지 모를 연고자를 유골함이 5년 동안 기다리는 장소다. 2021년 10월20일 현재, 이곳에 봉안된 무연고 사망자 유골함은 모두 3087기. 연평균 200여 기의 유골함이 봉안된다.
이곳엔 아무런 안내판도, 표지판도 없다. 무연고 사망자라는 글씨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무연고 사망자는 살아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는데, 죽어서도 마찬가지다.
10월15일 이곳에서 ‘제5회 무연고 사망자 합동 추모 위령제’가 열렸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동자동사랑방,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등의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다.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10월17일)에 맞춰 매년 열린다.
‘추모의 집’ 문은 평소에는 늘 굳게 닫혀 있다. 유골함 봉안 때와 연고자가 나타나 유골함 반환 요청을 할 때, 단 두 경우에만 열린다. 그리고 1년에 딱 하루 더 열린다. 바로 ‘합동 추모 위령제’가 열리는 날이다. 봉안된 무연고 사망자들의 가족이나 지인 등은 이날만 기다렸다가 ‘추모의 집’ 안으로 들어가 유골함을 만난다. 하지만 올해는 위령제가 열리는 날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곳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공단은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이유로 들었다. 위령제 참석자 40여 명은 행사만 치른 뒤 떠나야 했다. 후드득 떨어지던 가을비가 위령제 시작 직전에 그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난과 관계 단절, 질병으로 인해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던 무연고 사망자들의 사연을 전한 제1384호(‘투명인간의 죽음’)에 이어 ‘서울 무연고 사망자 1216명 리포트’ 2부를 이어간다. 이번호에서는 ‘우리 곁의 무연고사’를 집중조명했다. 무연고 사망자들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 지인이었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
1216명을 연령대별로 나눠보면 60대(370명)가 3명 중 1명꼴(30.4%)로 가장 많지만, 3살 이하 어린 아기 6명, 20~30대 청년 22명 등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무연고사 또는 고독사는 우리 곁에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죽음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의 생애를 따라가봤다. 다음호(제1386호)에서는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제도적 대안을 살펴볼 예정이다. _편집자주
‘이긴다 아버님’. 사람들은 이종준(66·가명)씨를 그렇게 불렀다. 세월호 유가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서울 용산 참사 유가족 곁에서 그는 함께 촛불을 들었다.
“밥 사드릴게요.” “밥 사줄게.” 그는 거리에서 힘들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람들이 밥값을 많이 내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면 “젊을 때 벌어둔 돈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2020년 7월28일, 항암치료를 받다가 잠시 퇴원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손팻말 시위에 참석했던 그날도 10명에게 국수를 먹였다. 마스크 10장도 챙겨와 나눠줬다. 이종준씨는 따듯하고 듬직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하며 이씨를 알게 된 조미선씨는 정말 그를 아버지같이 여겼다. 집회나 서명운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이씨는 조씨의 막내딸에게 가져다주라며 샌드위치를 쥐여줬다. 명절에는 서로 선물을 챙겼다. 택배로 선물을 보낼 때면 이씨는 집 주소 대신 피시(PC)방 주소를 불러주곤 했다. 그때만 해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2019년 여름, 폐암을 앓은 적 있던 이씨는 암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했다. 조미선씨는 몇 차례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씨는 늘 혼자였다. 간호하는 가족도, 병문안 온 가족도 보지 못했다. 어느 날은 간호사가 조씨에게 슬쩍 물었다. “환자분 가족은 없으신가요?”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이종준씨가 서둘러 대화를 막았다.
평소 이씨는 사람들에게 ‘공무원 아들, 교사 딸’을 가끔 자랑했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아내 이야기며 재롱떠는 손주 이야기를 올리기도 했다. 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밥 사주는 것을 즐겼던 ‘이긴다 아버님’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혼자일 줄은 몰랐다.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는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병원비를 모아서 이씨에게 전했다. 그는 “돈을 너무 많이 보냈다”고 손사래를 쳤다. 60만원을 보낸 조미선씨에게는 “너무 많이 보냈더라”며 30만원을 봉투에 담아 돌려줬다. 남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다 2020년 9월 무렵, 연락이 뚝 끊어졌다. 전화를 걸어도, 문자를 보내도,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도 이씨는 응답하지 않았다.
애타던 지인들은 백방으로 이씨를 수소문했다. 방형민씨는 ‘이긴다 아버님’이 서울 구로동에 산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2020년 11월 어느 날 무작정 ‘이종준, 구로’라는 키워드를 넣어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그의 이름이 떴다. 금천구청이 올린 무연고 사망자 장례 공고문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생년월일도 같았다. 2020년 9월, 이미 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진 뒤였다.
이종준씨는 무연고 사망자가 되어 안치 나흘 만에 서울시립승화원에서 공영장례를 치렀다. 그는 혼자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미혼이었다. 아내도, 아들딸도, 손주도 없었다.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형민씨는 이종준씨를 마지막으로 돌본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2019년 여름께 병원에서 병원비 때문에 동주민센터로 연락했고, 의료급여 수급권자가 될 수 있도록 서둘러 행정절차를 밟아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하지만 이씨는 한사코 국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병원을 가지 않고 그냥 고시원에서 조용히 살다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사회복지사가 전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는 고시원에서 혼자 살았다. “무슨 돈으로 생활하고, 사람들에게 밥도 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갑자기 며칠씩 안 보이실 때가 있었어요. 돈이 없으면 안 나타나신 것 아닌가 싶어요.” 조미선씨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본인이 많이 안 가졌어도 그렇게 베풀고 사람들 손을 잡아줬는데, 마지막 고통스러운 순간에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고 돌아가셨을 때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았다는 게 너무 죄송하더라고요.”
이종준씨의 지난 삶은 평소 나눴던 몇 가지 대화의 조각들로 미뤄 짐작할 뿐이다. “아버님이 그런 말을 하신 적 있어요. 어릴 때 엄마가 재혼하셨는데 계부가 자기를 많이 구박했다고. 그래서 10대부터 길바닥에 나와서 살았다고. 그래서 결혼도 못하고 사신 게 아닌가 싶어요.” 뒤늦게 아버지 같은 그의 죽음을 알고 나서 조미선씨는 눈물로 몇 날 며칠을 지새웠다.
이종준씨 유골은 공영장례를 치른 뒤 경기도 파주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됐다. 뒤늦게라도 유골함을 모셔와 장례 치를 방법을 찾았지만, 가족이 아니라 쉽지 않았다. 장사법에 연고자는 친족관계로 한정돼 있다. 하지만 ‘이긴다 아버님’을 애도하는 이들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그가 사회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4·16연대 등이 공문을 보내 증명하고 장례주관자로서의 권리를 호소했다.
실제 보건복지부 ‘장사 업무 안내’ 지침에는 “장사법 제2조 16호에 구체적으로 예시된 사실혼 관계, 장기간 동거하며 간병이나 돌봄을 제공한 관계 등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친구, 이웃, 같은 종교활동 및 사회적 연대활동 등에 따라 장례 주관을 희망하는 경우” 지자체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서울시 공영장례 조례 개정되길”2021년 4월16일, 조미선씨와 방형민씨 등은 그의 유골함을 ‘무연고 추모의 집’에서 모시고 나왔다. 일부러 4월16일이라는 날짜를 선택했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며 ‘뼈 한 조각이 생명’이라는 걸 배웠거든요. 반드시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서 따듯하게 장례 치러 보내고 싶었어요.” 조씨 등은 이씨의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비는 그를 아는 153명이 각각 1만원씩 모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이들 이름으로 입금했다.
2021년 5월1일, 추모식이 열렸다. “아무도 외롭지 않게”라는 문구가 쓰인 펼침막이 붙었다. “세월호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익숙해진 문구인데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표현한 것”이라고 방형민씨는 말했다. 조미선씨는 이씨의 사연을 알리기까지 망설였지만, 인터뷰를 결심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서울시 공영장례 조례가 개정돼 연고자가 아닌 제3자도 장례를 치를 수 있기 바란다.”
이씨는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 나무 아래 잠들었다. 평소 이씨가 존경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는 곳이다. 2021년 9월13일, 이씨의 1주기를 맞아 조씨와 방씨 등은 다시 봉하마을을 찾았다. 바리바리 제사 음식을 차리고, 이씨가 묻힌 자리를 기억하려고 나무에 매달 표지도 준비해 갔다. 봉하마을 정토원에 올라가는 길에는 붉은 상사화가 피어 있었다. 아무도 외롭지 않게 꽃무더기 지어서.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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