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45㎏인데 혼자서 100㎏ 반신불수 환자의 기저귀를 갈다가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지 않습니다.”(코로나19 감염격리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A)
“밖에서는 진짜 저희가 어떻게 일하는지 모릅니다. (방호복을 입고) 신발에 찰랑찰랑 땀이 찰 정도로 땀을 흘리고 나옵니다.”(코로나19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간호사 B)
2021년 8월 중순 보건의료노조TV에 올라온 ‘코로나19 전담병원 현장 간호사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영상 속에서 간호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간호사 A는 “(2020년) 많은 사람이 ‘의료진 덕분에’ 캠페인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우리를 잊었다”며 울먹였다.
결국 이들 간호사를 포함해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 조합원 8만여 명은 ‘방호복 파업’을 준비했다. ‘더 이상 못 버틴다, 공공의료 확충하라!’ ‘더 이상 못 버틴다, 의료인력 확충하라!’ 의료현장의 절박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두 가지 구호를 내걸었다. 9개월간 토론했고, 투쟁기금 50억원이 모였다. 9월2일 보건복지부가 있는 세종으로 500대의 전세버스가 향할 예정이었다. 노조 파업으로는 보기 드물게 언론이 지지하고 진보단체는 물론이고 한국노총 소속 노조, 간호협회, 전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도 파업 지지 성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파업 돌입 5시간을 앞둔 9월2일 새벽 2시, 총파업이 철회됐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과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공공의료 확충과 보건의료인력 처우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노-정 교섭 합의문’에 서명했다. 정부가 계획한 ‘위드 코로나’ 체제로 전환하려면 무엇보다 보건의료인력 확충을 포함한 ‘안정적인 의료 대응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노-정 합의의 의미와 이후 해야 할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본다.
첫째, 간호사 1인당 실제 환자 수를 제도화하는 등 인력 확충과 간호사 처우 개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현재 간호등급 차등제에서 최고 등급인 1등급조차도 간호사 1명이 평균 9.8명의 환자를 보고 있고, 7등급까지 내려가면 간호사 1명이 환자 30~40명을 보는 게 현실이다.
‘나이팅게일’이 되는 게 꿈이었다가 ‘사직’하는 게 꿈이 돼버린 간호사들이 환자 곁을 떠나고 있다. 노동강도가 높은 밤근무와 교대제, 인력 부족으로 임신도 순번제로 돌아가며 해야 한다. “이대로 일하면 죽을 것 같아서 살기 위해 파업에 참가했다”는 어느 대학병원 간호사의 절규는 더는 놀랍지 않다. 도심 속 휘황찬란한 고층건물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절반 이상이 1년 미만 신규 간호사이다. 한 대학병원에는 1700명의 노동자가 저임금 비정규직이다. 과연 이런 병원에 내 생명과 안전을 맡길 수 있을까?
노-정 합의에 따라 정부는 코로나19 중증도별로 근무하는 간호사 인원 배치 기준을 9월 안에 마련하기로 했다. 또 감염병에 대응하는 의료인력에게 지원하는 ‘생명안전수당’을 제도화해 2022년 1월부터 지급한다. ‘보호자 없는 병원’인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를 전면 확대하고, 예측 가능한 교대근무제 시범사업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대통령 취임 1호 사업이 공공의료 확충이 되길둘째, 코로나19 환자 진료에 앞장선 공공의료를 확충하기로 약속했다. 박근혜 정부부터 추진했지만 단 1곳도 설립하지 못했던 ‘권역별 감염병 전문병원’ 7곳을 짓기로 했다. 전국을 70개 중진료권으로 나눠 2025년까지 1곳 이상의 공공병원을 지을 계획이다. 합의문에는 경기도 남양주, 안양, 울산 등 공공의료기관이 부족한 20개 지역과 동부산, 제천 등 공공의료기관 설립 우선 추진 지역이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예산 4조원을 들여 공공병원을 전체 병원의 30%까지 확충하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다. 이후 2015년 메르스, 최근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면서 공공의료 필요성은 더욱 강조됐지만, 공공의료 확충은 실패와 정체를 거듭했다. 이번 노-정 합의를 계기로 공공의료 확충에 새로운 동력이 확보됐다. 적절한 의료서비스가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던 사망자 비율을 뜻하는 ‘치료가능 사망률’은 경북 영양군이 서울 강남구보다 3.64배 높다. 공공의료 확충으로 이처럼 심각한 지역 의료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번 파업과 노-정 합의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은 것은 물론 대통령, 국무총리, 여야 대표가 지지를 표명하고 차기 대선 후보까지 합의 내용을 공약화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노동법상 기업별 노사관계만 보장되는 현실에서 노-정 교섭, 사회적 대화 같은 초기업교섭의 새로운 가능성도 확인했다.
이제 남은 마지막 과제는 합의문 이행 점검과 실행력 확보다. 1단계로, 정기국회에서 합의 이행과 관련한 예산 확보와 제도 정비에 나서야 한다. 특히 여당은 새로 선출될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코로나19 재난 극복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공공의료 확충 강화 추진협의체’ 등 각종 거버넌스가 내실 있게 진행돼야 한다.
2단계로, 눈앞에 다가온 대선에서 이번 노-정 합의 내용을 공약화하고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노동자 조직화와 권한 강화’ TF를 설치하고 180일 내에 대안을 만들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한 것처럼, 차기 정부도 취임 1호 사업으로 공공의료 확충 등을 추진해야 한다.
미국 진보 세력의 상징인 버니 샌더스가 의료, 교육, 돌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인프라 예산안’ 4조1천억달러(약 5천조원)를 밀어붙인 것처럼 과감히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당장 증세가 어려우면 건강증진기금과 지역균형발전특별회계의 일부 예산 등을 통합적으로 운영해 공공의료확충기금으로 활용하면 된다. 공공의료특별법을 제정해 70개 중진료권에서만큼은 국고 지원 비율을 80%로 확대하고 공공병원 설립에는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해야 한다. 인력 확충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을 개정해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분명한 철학과 의지를 갖고 담대한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
*1381호 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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