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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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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달릴까, 그건 내가 정하는 것

100마일 달리기 도전한 70살 윤명숙씨, 매일 새벽 4시 일어나 자전거·산악달리기·수영…
등록 2021-07-17 13:59 수정 2021-07-21 03:08
2021년 6월26일 양재천과 서울 둘레길 일대에서 열린 ‘브룩스 서울 100마일 위대한도전’ 달리기 대회 여성·남성 최고령 선수 윤명숙씨와 강종수씨가 함께 달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21년 6월26일 양재천과 서울 둘레길 일대에서 열린 ‘브룩스 서울 100마일 위대한도전’ 달리기 대회 여성·남성 최고령 선수 윤명숙씨와 강종수씨가 함께 달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시들어가는 노년기를 성장기보다 늘이려 애써왔다. 그러니 노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노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101살에 유명을 달리한 전설적인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은 2006년 91살에 <어떻게 늙을까>(2016)를 쓴 이유를 이렇게 썼다. “청춘에 관한 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출산 경험을 다룬 책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노년을 다룬 책은 별로 없어서다. 애실이 책으로 보여준 것처럼 ‘할머니’들의 기록이 늘어나고 있다. 이 할머니들은 정형화된 틀로 가둬지지 않는, 몰랐던 ‘미지의 할머니들’이다.
김영옥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는 ‘늙은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노인도, 노년도, 어르신도, 시니어 선배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할매나 할배도 다 온전한 자긍심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올바른 이름이 발명되기 전, 그나마 비슷한 ‘할머니’의 정의는 날로 풍부해지고 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의 김원희씨는 “유골이라면 운송비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박막례 할머니가 유튜브에서 순발력과 유머감각을 뽐낸 지 어언 4년이 지났고, 유튜버 밀라논나는 ‘엘레강스’의 대명사가 됐다.
젊은층도 할머니에게 열광한다. 김연수는 다이애나 애실의 책을 읽고 쓴 글에서 “그때 어떤 분이 장래희망에 대해 물었는데 얼떨결에 할머니라고 대답해버렸다. 얼결이라고는 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멋진 할머니들이 정말 많다. 할아버지들은, 글쎄 잘 모르겠다.”(<시절일기>)
이런 마음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무루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책의 제목을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고 달았다. “나의 쓰기가 할머니의 바느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할머니의) 손은 오래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않는 손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과감히 자르는 손이며, 끝내는 섬세하고 다정하게 깁고 이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낼 줄 아는 손이다. 나이 든 어느 날의 내 손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손이기도 하다.”
여기 다정하고 과감한 미지의 할머니들이 있다. 어느 날 내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 세계로 떠나보자._편집자주

2년 전 유튜브에서 수영대회에 최고령 선수로 출전한 93살 일본인 할머니의 영상을 본 적 있다. 다른 선수들이 진작에 결승 지점에 들어온 뒤 한참이 지나서야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며 결승점에 들어온 할머니는,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인터뷰했다.

“(속도가 느려서) 혼자 수영하게 돼 죄송합니다. 날마다 수영할 때도 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수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93살인데 100살까지는 수영하고 싶습니다.”

장래희망은 허락하는 날까지 몸 움직이는 것

나는 20대 초반부터 수영을, 3년여 전부터는 달리기와 요가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언젠가 할머니가 되더라도 ‘운동하는 할머니’이고 싶다고 늘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몇 살까지 그게 가능할지는 막연했다. 영상 속 할머니를 보고 나서야 “그 언제는 내가 정하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내 장래희망은 ‘허락되는 날까지 몸 움직이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할머니’가 됐다.

올해 칠순을 맞았지만 여전히 울트라마라톤(42.195㎞ 풀코스 마라톤보다 긴 거리의 마라톤)과 트레일러닝(산악달리기)을 즐겨 하는 윤명숙(70)씨는 나보다 먼저 이런 장래희망에 다가가는 사람 중 하나다.

2021년 6월26일 토요일 오전, 서울 구로구 양재천시민공원에서 윤명숙씨를 처음 만났다. 윤씨는 이날 양재천 일대 10㎞와 서울 둘레길 158㎞, 총 168㎞를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달려 최대 35시간 이내에 결승점에 돌아와야 하는 ‘브룩스 서울 100마일 위대한도전’ 대회의 최고령 선수였다.

원래는 윤씨를 따라 168㎞를 달리기 위해 나도 이날 대회에 선수로 등록하려 했다. 하지만 울트라마라톤 또는 산악달리기 대회 기록증을 제출한 사람만 신청할 수 있었다. 참가 자격부터 미달이었다. 나는 2년 전 풀코스 마라톤에 참가해 42.195㎞를 달린 게 지금껏 가장 멀리 달려본 경험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안양천체육공원을 출발해 가양역을 지나 상암 월드컵공원 부근까지, 첫 10㎞ 구간을 윤씨와 함께 달리기로 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윤씨와 동갑내기 남성 최고령 선수 강종수씨는 다른 참가자 30여 명을 앞서 보내고 맨 뒤에서 천천히 달렸다. “패기 있는 젊은 친구들은 초반부터 속도를 내서 달려요. 그런데 제 경험에 따르면 장거리 대회에선 처음엔 천천히 달려 힘을 아껴야 끝에 가서 힘이 살아나요. 이제 나는 기록 단축보다 완주가 목표예요.”

과연 시작 지점에서 7㎞ 정도 떨어진 가양대교 위에서 앞질러 갔던 젊은 선수들과 다시 마주쳤다. “그것 봐요, 내가 다시 만날 거라고 했잖아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날 대회에서 윤씨는 완주하지 못했다. 전체 경주 코스에서 3분의 2 정도 지점인 100㎞까지만 달리고 “이제 됐다” 하고 배번(선수 등 뒤에 붙이는 번호)을 내려놨다. 체력도 부치고 산을 달리려면 해드랜턴이 필요한데 그것도 챙기지 못해 위험할 것 같아서였다. 며칠 뒤 윤씨 집을 찾아 다시 인터뷰를 청했다.

윤명숙씨가 30대 초반에 참가한 한 마라톤 대회 우승 상장과 기념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정인선

윤명숙씨가 30대 초반에 참가한 한 마라톤 대회 우승 상장과 기념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정인선

산의 아이스께끼 상인도 아는 ‘운동광’

대회가 없는 평일, 윤씨는 단순한 하루를 보낸다. 새벽 4시쯤 몸을 깨워 밖으로 나간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언덕 꼭대기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신림사거리나 서울대학교까지 내달린 뒤, 자전거를 묶어두고 관악산에 오른다. 걸어서 오르는 게 아니다. 산을 가볍게 뛰어올라 연주대를 찍고, 다시 가볍게 뛰어 내려온다.

산에서 내려오면 아침 7시 정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엔 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 수영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엔 개천 따라 12㎞를 달린다. 12㎞는 30대 초반인 내가 달려도 족히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지만, 윤씨에겐 하루걸러 하루 달려도 무리 없는 단거리다.

아침 운동을 모두 마치면 9시. 전날 해둔 밥과 찌개 등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딸이 운영하는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돕는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 8시, 늦어도 밤 9시엔 잠자리에 든다. 그래야 다음날 새벽 일찍 다시 운동을 나갈 수 있다.

주말에도 윤씨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관악산으로 향한다. 한 달에 서너 번, 윤씨가 산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날은 마라톤이나 수영 대회에 나가는 날이다. 산에서 ‘아이스께끼’ 파는 이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산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윤씨는 ‘마라톤집’ ‘몸짱’ 등으로 불리는 유명인이다.

윤씨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30대 초반이던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 서른일곱 살인 외동딸 장선영씨가 대여섯 살 무렵이던 그때, 윤씨는 맹장수술을 받는데 잘못돼 병원에 길게 입원했다. 퇴원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꼭 운동을 꾸준히 하라”고 했다. 그길로 수영장에 등록했다. 주변 권유로 달리기도 시작했다. 또래 여성들이 모인 운동클럽에 들어 탁구와 축구 등 구기종목도 꾸준히 즐겼다.

“한번 운동의 맛을 아니까 계속 빠져들게 됐어요. 몸도 건강해지고 성격도 바뀌었어요. ‘여자라서 못한다’ 하는 것도 없고 좋더라고요. 가정만 아니면 태릉선수촌에라도 들어가서 하루 종일 운동만 하며 살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이 기울었다. 서울의 이름난 대학을 나와 이름난 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자기 사업을 막 시작한 때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는 윤씨 집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한순간에 손에서 일거리가 사라진 남편의 마음 건강뿐 아니라 몸의 건강까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때 방에 틀어박힌 남편은 4년 전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다.

일 연락 와도 수영장 가는 시간과 겹치면 안 가

집안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제활동이 윤명숙씨 몫이 됐다. 식당일부터 청소일까지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지금도 집 근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내 예식장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다.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 일이 바쁜 와중에도, 윤씨는 지금껏 아침 운동 시간만은 다른 데에 양보하지 않았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의 아주 큰 식당에서, 내가 손이 워낙 빠르니까, 정 안 되면 와서 밥 푸는 일이라도 좀 해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런데도 아침 수영장 가는 시간이랑 겹쳐서 못 간다고 했죠. 일이 아무리 바빠도, 운동도 회사에 출근한다고 생각하며 꾸준히 해야 해요. 그러면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력이 좋아져요. 그리고 새록새록 뭔가 하고 싶은 게 계속 튀어나와요. 그래서 그 매력에 빠지는 거예요.”

윤씨에게 2년여 전 피부암이 발병해, 지금까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건 딸 장선영씨와 통화하며 뒤늦게 전해 들었다. 어느 날 발바닥에 티눈 같은 게 생겨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게 악성 흑색종이었다.

“보통 사람은 아프면 쉴 것도 같은데, 본인께서 별것 아니라고 계속 대회에 나가시더라고요. 나중에 암 진단을 받고 나서는, 너무 무리한 일정이 병을 악화한 게 아닌지 안타깝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워낙 오랫동안 달리기에 대한 열정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셨다는 걸 옆에서 평생 지켜봤잖아요. 그러니 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진 않고 ‘정말 힘들면 중도에 포기해도 좋으니 절대 무리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해요.”(장선영씨)

얼마 전 30대에 접어들고 나에게 생긴 큰 변화 중 하나는, 주변에 운동을 시작한 여자 친구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친구가 30 평생 안 하던 것을 습관으로 만들기 쉽지 않다고 했다. 이런 친구들에게 전해줄 ‘꿀팁’이 없느냐는 물음에 윤씨는 “혼자서 운동만 하지 말고 꼭 대회에 나가는 경험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윤씨는 매일같이 몸을 움직인 지 10년쯤 지난 2000년대 초반 아마추어 대회에 처음 나갔다. 셀 수 없이 많은 대회에 나갔지만 그중 첫 바다수영 대회를 완주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수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을 때 처음 3㎞ 바다수영 대회에 나갔어요. 그것도 오리발 없이 맨발로. 완주한 그때 그 좋았던 기분을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기념사진을 크게 빼서 아직도 갖고 있어요. 오리발 신고서라도 3㎞ 수영해봐요. 너무 힘들잖아요. ‘아이고, 처음에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생각이 절로 나요. 근데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니까 그게 재밌어서, ‘다음엔 안 해야지’ 해놓고 그새 까먹고 또 다음 대회 등록을 하는 거예요.”

어려운 고비 넘겨 버릇하다보면

과정의 고통스러움을 잊게 하는 완주의 짜릿함 말고도, 윤씨가 젊은 ‘초보 운동러’들에게 대회 참가를 권하는 이유는 또 있다.

“살다보면 넘어야 할 고비가 얼마나 많아요. 대회에 나가려 훈련하고, 또 실전으로 달리는 경험을 계속 쌓으면서 그 고비를 자꾸 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10㎞를 달린다면 5㎞가, 풀코스(42.195㎞)를 달린다고 하면 30㎞ 지점이 제일 힘들어요. 그 고비를 넘겨 버릇하다보면 어느새 운동이 내 것이 돼 있을 거예요. 30대, 40대에 시작하면 분명 20대에 시작하는 것보다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해야 해요. 지금 시작해도 내 나이까지 뛰면 40년은 뛰는 거니까요.”

몇 살까지 달리고 싶은지 물었다. “글쎄요. 어떤 사람은 80대까지도 할 거라고 하던데, 아이고 나는 자신 없어요. 탁구나 축구는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면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 그만뒀는데, 그래도 달리기는 혼자라도 마음만 있으면 계속할 수 있네요. 100㎞ 넘는 장거리 대회는 힘겹지만 50㎞나 38㎞라면 충분히 할 수 있죠.”

정인선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ren@coindes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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