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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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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 1천여 건물이 품은 근현대사

등록 2021-07-12 03:17 수정 2021-07-13 11:30
일제강점기에 서울 이태원초등학교 언덕 쪽에서 바라본 용산기지 북쪽(현 메인포스트) 모습. 김천수 제공

일제강점기에 서울 이태원초등학교 언덕 쪽에서 바라본 용산기지 북쪽(현 메인포스트) 모습. 김천수 제공

안정적인 내 집 혹은 셋집 마련이라는 ‘보통사람’들의 꿈을 담은 공공주택이 나온 지 32년 됐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 사람에게는 공공주택이 보이지 않는다. 국토교통부는 공공임대주택 비율을 2019년 기준으로 전체 주택의 7%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진짜’ 공공주택의 재고는 4~5% 수준이라고 말한다.
안정적인 주거 공간, 내 집을 마련하는 발판, 부동산시장의 완충제(또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었던 공공주택의 가능성은 32년 전보다 커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원인을 파고들수록 우리가 처음 꿈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할 뿐이다. 그나마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찾으려는 시도가 아직 남아 있다. 절박한 보통사람, 집 없는 사람이 여전히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안이 나왔다. 미군으로부터 돌려받는 서울 용산기지에 대규모 공공주택을 공급하자는 것이다. 제안자들은 돌려받는 용산기지 300만㎡ 가운데 20~30%만 사용하면 공공주택 5만~10만 채를 공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용산은 빼어난 입지를 갖추고 교통이 편리한 곳이어서 공공주택 공급이 실현된다면 그 효과가 폭발적일 것으로 예상한다.
제안자들은 용산기지 공공주택이 대규모 정부 투자로 만들어지는 용산공원의 공공성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입지에 높은 품질의 공공주택을 대량 공급하면 공공주택에 대한 편견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본다. 공공주택은 땅과 건물을 모두 정부가 소유하므로 나중에 공원으로 전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관건은 오랜 논란을 겪으며 특별법으로 정해진 용산기지의 ‘공원’ 용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다. 용산공원 조성 관계자들은 공공주택 건설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편에선 용산기지의 반환 절차가 더딘데 언제 공공주택을 공급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용산기지 안 공공주택 10만 채 공급이라는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_편집자주

서울 용산미군기지는 용의 형상을 닮은 용산(龍山)과는 전혀 무관한 둔지산(屯芝山, 둔지미)이 자리잡은 곳이다. 목멱산(남산)에서 분기한 낮은 둔지산이 한가운데 펼쳐져 있어 조선시대 행정구역 이름도 ‘둔지방’이었다. 목멱산 아래 둔지산은 한양 도성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 한강으로도 완만하게 이어진다. 서쪽으로 진짜 ‘용산’과의 사이에 만초천(덩굴내)이 흐른다. 지금도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복개되지 않은 만초천 지류가 흐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둔지산에는 원단, 풍운뇌우단(일명 남단) 등이 있어 역대 왕과 신하들이 국가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 일대는 수백 년간 수많은 길손이 거쳐간 이태원을 비롯해 대촌, 신촌, 단내촌, 정자동 등 옛마을을 품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의 대륙 침략 거점

그러나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둔지산 일대를 군사기지화하면서 이태원과 둔지미 일대 마을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약 118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용산병영’을 건설했다. 오늘날 용산미군기지 역사도 여기서 시작됐다. ‘신용산’이라는 지명도 일제가 둔지방 일대를 군사·철도 기지화하면서 생겼다. 용산성당과 효창공원이 있는 원래의 용산은 ‘구용산’이 됐다.

일제강점기 용산병영은 단순한 군사기지 성격을 넘어서 한반도 식민통치의 무력 근거지이자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특히 용산기지의 조선군 사령관이던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각각 7, 8대 조선총독이 되어 무단 식민통치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만주사변 당시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독단으로 조선 주둔 병력을 만주에 파견해 확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어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도 대륙 침략의 거점 구실을 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용산기지의 역할은 더욱 확대됐다. 1942년부터 일본군의 전황이 날로 악화하자 급기야 일제는 조선인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청년이 입영했는데, 다름 아닌 용산기지에서였다. 그들은 용산기지에서 훈련하고 대한해협을 건너 태평양 전선 곳곳에 투입됐다. 지금 용산기지에는 전선 출정식 때 이용한 ‘보행용 다리’가 한미연합사령부 뒤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다리를 건넌 수많은 조선 청년이 다시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항복 접수를 위해 남한과 북한에 각각 진주했다. 용산기지는 미국 7사단 병력이 접수하고 일제강점기의 용산병영이 아닌 임시기지로서 ‘캠프 서빙고’라고 새롭게 불렸다. 이즈음 한반도 운명을 좌우하는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소련군 대표단 수행원들도 용산기지의 옛 일본군 장교 숙소에 머물렀다. 혼돈의 해방 정국 속, 일제가 남긴 용산기지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지낸 것이다. 잘 알려졌듯, 신탁통치 논란은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좌우 대립 구도로 재편해 남북 분단과 전쟁으로 귀결됐다. 우리는 역사 전환기에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다. 용산기지는 그 실패를 성찰할 장소 가운데 하나다.

1945년 9월4일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기 전 미 해군의 정찰기가 서울 하늘에서 용산기지 북쪽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김천수 제공

1945년 9월4일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기 전 미 해군의 정찰기가 서울 하늘에서 용산기지 북쪽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김천수 제공

한국전쟁 초전 실패의 상징적 장소

3년간의 미군정기가 끝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동시에 대한민국 국군도 창설됐다. 이듬해 우리 국군은 용산기지에 주둔한 미군이 그간 맡았던 38선 경비 임무를 인수했다. 그해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KMAG) 일부를 ‘캠프 서빙고’에 남기고 모두 한국을 떠났다. 거대한 용산기지가 비워졌다. 당시 을지로에 있던 우리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용산기지로 이전했다.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수도경비사령부와 국군의 핵심 사단인 국군 7사단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1년간 우리 국군은 잠시 용산기지의 주인이었다. 이곳에서 국군의 초석을 다졌다. 용산기지가 결코 외세 주둔의 역사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발자취도 또렷이 새겨 있다.

1949년 말 용산기지의 육군본부 지하벙커에선 1950년 봄 북한이 38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판단서’가 나왔다. 이곳에 장도영 정보국장, 박정희 상황실장 그리고 김종필 상황장교도 있었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전쟁지휘소이자 대북 안테나의 심장부였다.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하기 전날 육군본부 장교클럽 개관파티가 벌어진 곳도 용산기지였다. 초전 실패의 상징적 장소로 회자되는 곳이다. 전쟁 상황이 긴박히 전개되는 가운데 비극적인 한강대교 폭파도 용산기지에서 결정됐다. 전쟁 기간 용산기지는 북한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다가 우리 군과 미군이 되찾고 다시 중국군이 차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처럼 용산기지에는 6·25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활동한 공간이기도 하다.

6·25전쟁에서 유엔군 깃발 아래 국군과 함께 전쟁을 이끌었던 미8군사령부는 정전협정 직후 용산기지로 들어왔다. 1957년에는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유엔군사령부까지 일본 도쿄에서 용산기지로 이전했다. 용산기지는 그야말로 동아시아 냉전의 최전초기지가 됐다. 이 시기 용산기지엔 한국의 전후 경제 재건과 원조에서 컨트롤타워 구실을 한 경제조정관실(OEC)도 함께 있었다. 당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가수가 활약하고 땀 흘린 장소도 용산기지 안 미8군 무대였다. 이후 경제가 발전하고 한국 국력이 성장해 한-미 군사관계가 수평적으로 발전하면서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됐다.

한국 팝문화를 선도한 미8군 무대

6·25전쟁 이래 용산기지의 역사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엔이 함께해온 역사이며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차지했다. 유엔사·연합사 지하벙커를 비롯해 현재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 1천여 동은 그 역사적 실체다. 한 동 한 동이 절대 흘려 볼 수 없는 건물이다. 이곳에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이야기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현대사다.

김천수 <용산기지의 역사를 찾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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