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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이름을 얻을 때까지

노동자들의 수많은 고통 ‘찾아내고 분류하고 측정해온’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책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펴내
등록 2021-05-28 20:14 수정 2021-06-01 15:01
어둑어둑한 새벽, 서울 마포구에서 폐기물을 수거하는 환경미화원들이 차량 뒤에 매달려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어둑어둑한 새벽, 서울 마포구에서 폐기물을 수거하는 환경미화원들이 차량 뒤에 매달려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쓰레기 수거 중에 음주 차량에 치여 사망한 김씨, 쓰레기 수거 차량 압축기에 말려들어가 죽은 황씨, 신속하게 청소하느라 차량 뒤에 올라타고 가다가 떨어져 죽은 정씨.”

동료의 죽음을 묻는 다소 무람없는 질문에, 환경미화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환경미화원의 노동환경과 산업재해 현황을 조사하면서 “그 자리에 없는 동료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다. 김 부소장은 환경미화원이 산업재해로 숨질 확률(10만 명당 32.1명)이 경찰관(19.9명)이나 소방관(9.9명)보다 크다는 미국의 한 연구 결과(2008년)를 떠올렸다.

환경미화원 산재 사망률이 경찰관·소방관보다 높아

환경미화원은 원래부터 위험한 직업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쓰레기 더미 속에 있던 날카로운 못에 발을 찔려 파상풍에 걸리는 이유는 “바닥이 단단한 안전화가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안전화를 지급해도 환경미화원이 운동화를 고집”하기도 한다. “수거차량에서 자주 뛰어내려야 하고 골목을 뛰어다녀야 하니까 운동화가 편하다. 빨리 일해야 하니까 (차량) 뒤에 매달렸다가 뛰어내린다. 무릎도 성치 않다.”

환경미화원만이 아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노동자들은 모두 몸과 마음의 아픔을 참으면서 일한다. 때로 너무 오래도록 아픔을 참다 못해, 영원히 집으로 퇴근하지 못한다. 2020년에만 주말도 없이 하루에 12시간 넘게 택배 150~200건을 나르던 노동자 10여 명이 숨졌다. “밤새 코로나19로 늘어난 물량을 처리하다가 숨진 택배노동자가 우리 집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각종 매니큐어와 리무버, 접착제 안에 든 휘발성 유기화합물과 중금속에 노출되는 네일아티스트는 안구건조와 코막힘 같은 알레르기 증상, 피부 가려움, 두통 등의 증상에 시달린다. ‘신속 배달’을 위해 배달 플랫폼 노동자는 오토바이 곡예 운전을 하다가 넘어지고, 다치고, 죽는다. 통신·에어컨 설치 노동자는 전봇대나 지붕 위, 실외기가 놓인 아파트 외벽에서 곡예하듯이 일하다가 떨어지고, 끼이고, 죽는다.

이러한 ‘일터에서의 사고와 질병, 그에 맞서온 이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 포도밭출판사)이 6월 중순 출간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녹색병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지난 20년 동안 현장에서 만난 ‘일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담았다. 그 가운데는 이미 산업재해(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고통도, 아직 법적으로 무엇이라 이름 붙이지 않은 일상의 아픔이나 불편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 책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탓이다. “우리는 노동이 신성하다는 이야기는 흔히 하는 반면 노동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도 누군가는 일을 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누군가는 어깨를 못 쓰게 되고 누군가는 암에 걸리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 것이 현실임에도 노동의 위험과 고통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간호사, 택시운전사, 제빵기사, 소방관, 학교 급식 노동자, 가축 위생 방역사 등으로 일하며 겪는 고통을 알게 된다. 불편하지만 아픔은 나눠야 반이 되고, 아픔을 나누려면 아픔이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

환경미화원처럼 우리 곁에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과 산업재해 이야기를 담은 책이 6월11일 출간된다. 포도밭출판사 제공

환경미화원처럼 우리 곁에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과 산업재해 이야기를 담은 책이 6월11일 출간된다. 포도밭출판사 제공

고통이 드러날수록 반응하는 사회

2021년 4월22일 경기도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숨진 이선호(23)씨의 아버지 이재훈씨는 젊은이들에게 “위험하고 힘든 일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421.html). 아버지는 고통을 감추려는 대신, 아들의 죽음을 사회에 알릴 용기를 냈다. 2016년 열아홉 살 서울 구의역 비정규직 김군이, 2018년 스물네 살 발전소 비정규직 김용균씨가 숨졌을 때 그 부모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부모처럼 “노동자의 고통을 애써서 드러내려는 노력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을 쓴 이들도 누구보다 잘 안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겪는 아픔과 고통들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고통들은 더 깊숙이 감춰지는” 탓이다. 하지만 고통이 드러날수록, 사회는 반응한다. “고통의 이름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고 법과 정책에 등장하면 사회는 더 이상 이 고통을 모를 수 없게” 되고 “감추어져 있던 고통에 이름이 생기면 사회가 아픔을 나누고 일의 위험을 줄일 방법을 의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근골격계질환, 감정노동 같은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그동안 감춰졌던 노동자들의 수많은 고통을 “찾아내고 분류하고 측정해서 이름을 붙이는 일”을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녹색병원 사람들이 20년째 하고 있다.

일하다 아프거나 죽는 사회를 바꾸려면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열다섯 살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숨지고,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원진레이온 노동자 수백 명이 숨진 뒤 산업재해 인정을 위해 함께 싸워온 노동안전보건 전문가들이 뭉쳐 1999년 아예 직업병(산업재해) 전문의료기관인 원진녹색병원(현재의 녹색병원)과 연구소를 세웠다. 이들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환경과 건강을 조사하고 살폈다. 법과 제도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일하다 아프거나 죽는 사회를 바꾸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앞장서 고민했다. ‘대형마트 노동자에게 의자를!’ ‘피자 30분 배달제 폐지’ ‘택배 박스에 손잡이 구멍 뚫기’ ‘환경미화원에게 샤워 부스 제공하기’ 같은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여전히 김용균이, 이선호가, 또 다른 누군가가 일하다가 다치고 숨지는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 제시하는 답은 간명하다. 바로 노동 ‘존중’이다. “우리는 일이 위험해서 다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안전하게 일하면 다치지 않는다. 우리가 안전보다 이윤을, 존중 대신 차별을 선택할 때 그 노동의 현장에서 누군가가 다치고 죽는다.” 국가가 모든 노동자에게 차별 없이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자가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기업이 만들고, 시민이 노동자를 자신에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존중이 가능해진다.

“저 노동자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나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내 아들딸이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묻고는, 답한다. 모든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노동은 존중되고 일터는 안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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