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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개혁, 채찍보다 당근이 낫다

‘미디어 바우처 제도’는 언론 저항과 논란 최소화할 수 있는 ‘포지티브 언론 개혁’
등록 2021-05-23 23:06 수정 2021-05-25 10:07
2021년 5월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미디어 바우처 도입의 필요성’ 토론회. 한국언론진흥재단 유튜브 영상 갈무리

2021년 5월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미디어 바우처 도입의 필요성’ 토론회. 한국언론진흥재단 유튜브 영상 갈무리

‘홍수가 나면 물이 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방에 물이 넘치는데 안심하고 마실 물 한 잔을 구하기 힘든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리키지요. 정보의 홍수 시대에 믿을 만한 정보는 오히려 찾기 힘든 지금이 바로 그렇습니다. 포털에선 질 낮은 기사들이 클릭 경쟁 중이고,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는 허위 조작 정보가 넘쳐납니다. 좋은 뉴스 찾기가 갈수록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먹고사는 고민 해결해줄 공적 지원

프랑스 경제학자 쥘리아 카제는 디지털 이후 뉴스 콘텐츠의 질적 하락이 두드러졌다고 말합니다. 원인은 전통적 뉴스 미디어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있습니다. 미디어 환경 변화로 언론사들이 오랫동안 의존해온 광고 중심 수익 모델은 붕괴하고 있지만 새로운 수익 모델은 아직 눈에 띄지 않기 때문입니다. 콘텐츠 유료화는 실패했고 구독자는 가파르게 줄었습니다. 유튜브는 여전히 남의 운동장입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를 위기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저널리즘은 지금 위기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좋은 뉴스를 만들려면 기자를 채용하고 현장에 보낼 비용이 필요합니다. 이 비용을 보전할 만한 수익이 없다면 지속가능한 저널리즘도 공염불일 뿐입니다. 뉴스 미디어의 ‘먹고사는’ 고민을 해결해줄 공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최근 관심이 집중되는 ‘미디어 바우처’ 제도가 대표적 방안 가운데 하나지요.

미디어 바우처는 다른 용도로는 쓰지 못하고 언론사나 언론인 후원에만 쓸 수 있는 쿠폰입니다. 정부가 매년 시민들에게 일정액의 바우처를 나눠주면, 시민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언론에 해당 액수만큼 후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정책을 시행한 나라는 없지만 여러 곳에서 연구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2020년 시카고대학 연구팀이 성인 1명당 매년 50달러(약 5만5천원) 정도 바우처를 주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한국에선 최근 더불어민주당 김승원 의원이 만 18살 이상 성인 3천만 명에게 연간 3만원씩 신문을 구독하거나 좋은 기사를 후원하는 데 쓸 수 있는 미디어 바우처를 나눠주자고 제안했습니다. 재원은 매년 1조원에 이르는 정부 광고비에서 마련합니다. 미디어 바우처를 받는 언론사는 편집규약을 제정하고 윤리강령을 준수해야 하며, 정규직 언론인을 1명 이상 채용하고, 경영공시를 투명하게 하는 등의 의무를 갖습니다.

언론이 더는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언론에 대한 공적 지원을 말하면 ‘쓰레기 같은 언론에 왜 국민 세금을 지원해주느냐’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미디어 바우처는 질문의 전제를 바꾸고자 합니다. 언론이 더는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저널리즘’과 ‘높은 수익’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언론사가 좋은 뉴스를 만들 유인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좋은 뉴스를 만들어도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쁜 뉴스를 만들려는 경쟁만 치열했지요. 그 결과가 낚시성 제목과 어뷰징(검색을 통한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해 동일한 제목의 기사를 반복해서 전송하거나 인기검색어를 올리기 위해 클릭 수를 조작하는 것) 기사입니다. 하지만 미디어 바우처는 좋은 저널리즘에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좋은 뉴스를 만들려는 언론사들의 경쟁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 바우처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언론을 만들어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지금 언론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광고주라는 이름의 자본권력입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밥줄’이니까요. 미디어 바우처는 광고에 의존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언론이 광고주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줍니다.

정치권력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재원이 국고에서 나오지만 정부가 자기 입맛에 맞는 언론에 자의적으로 지원금을 몰아주는 게 아니라 시민 개개인이 결정권을 갖고 직접 옥석을 가리기 때문이지요. 언론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오직 원래 봉사의 대상인 시민만 섬기면 됩니다.

저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같이 나쁜 언론을 응징하는 데 집중하는 ‘네거티브형 언론 개혁’보다 미디어 바우처 제도처럼 좋은 언론에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 ‘포지티브형 언론 개혁’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습니다. 언론의 저항과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채찍보다 당근’이라고 할까요.

미디어 바우처 제도가 성공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충족돼야 합니다. ‘시민들이 과연 좋은 뉴스를 골라낼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주고 싫어하는 상대를 시원하게 때려주는 정파적 언론을 원하는 시민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높은 슈퍼챗(후원금) 수익을 올리는 극우 유튜브 채널들을 보세요. 미디어 바우처가 고품질의 저널리즘보다 진영논리에 매몰된 함량 미달의 언론을 대량 양산할 수 있겠다는 우려가 듭니다.

진영논리 상쇄하도록 보편 지급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 과몰입’ 시민들이 과잉 대표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운 다양한 시민이 적극적으로 후원에 참여해 진영논리를 상쇄할 수 있도록, 미디어 바우처를 일정 연령 이상의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해야 합니다. 평소 언론에 관심이 적은 이들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도록 소득공제 같은 혜택도 추가해야 할 겁니다. 좋은 뉴스가 노출되기 어려운 포털 뉴스의 이용 환경을 개선해 시민들이 좋은 뉴스를 지금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후원 대상이 되는 언론사의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합니다. 미국의 미디어학자 로버트 맥체스니는 미디어 바우처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비영리 언론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광고를 수주하는 미디어, 언론이 아닌 분야 사업체를 거느린 미디어 기업은 제외하는 거지요. 바우처 제도는 광고와 수익을 포기하고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미디어의 자립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언론 구조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미디어 바우처 제도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안입니다. 시행하기 전에 풀어야 할 숙제가 많지만, 치밀한 준비와 섬세한 디자인을 한다면 언론 생태계를 혁신하는 효과적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당사자인 언론과 시민들도 머리를 맞대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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