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산허리를 왼쪽에 끼고, 오른쪽으로 산세를 내려다본다. 운무가 감싸안은 장산과 매봉산, 그 산자락이 어깨를 겨루며 뻗어 있다. 여행자는 양탄자처럼 펼쳐진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강원도 정선의 ‘운탄고도’다.
강원도는 면적 대부분이 산지다. 백운산, 가리왕산 등 높이 1천m 이상의 명산 22개가 모인 정선에 ‘하늘길’이 깔려 있다. 하늘길은 해발 1100m 넘는 백운산 자락에 약 40㎞ 길이로 조성된 트레킹 코스다. 2008년 강원랜드가 영월국유림관리소와 협약을 맺고 강원도 정선의 두위봉 임도를 재정비해 만들었다. 과거 석탄을 운반하는 제무시(자동차회사 GMC에서 만든 4륜구동 트럭. 지엠시 발음이 변함)가 오가던 길인 운탄고도를 비롯해 고원숲길(1~3구간), 무릉도원길(1~2구간), 둘레길(1~4구간) 등 10개 종류로 구성됐다.
지도를 펼쳤다. 트레킹 초보자 맞춤 코스를 짰다. 고원숲길에서 시작해 운탄고도를 걷다, 샛길로 빠져 둘레길로 이어지는 순서다. 길이는 약 7㎞다.
4월26일 오전 10시, 곤돌라를 타고 출발 지점인 해발 1340m 하이원리조트의 하이원탑에서 내렸다. 영상 7도의 선선한 날씨. 높은 고도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목덜미를 감쌌다. 산들이 어깨동무하는 수묵화 같은 풍경을 내려다보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시작은 고원숲길 2구간이다.
하늘로 곧게 뻗은, 20~30m 높이의 신갈나무가 폭 50㎝ 남짓한 길 양쪽에서 줄지어 여행자를 맞았다. 나무 끝에 걸린 하늘을 바라보다, 발밑의 땅을 훑어봤다. 자색 꽃이 눈에 띄었다. 고개를 푹 숙였으나 뒤로 말린 6개 꽃잎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얼레지다. 3~4월 높은 지대 비옥한 땅에 피는 얼레지는 고원숲길 일부 구간(1~2구간)에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고원숲길은 야생화가 질서 없이 흩어진 듯 피어 있어 아름답다. 노란 양지꽃과 산괴불주머니, 하얀 홀아비바람꽃, 꿩의바람꽃 등이 발치에서 여행자를 맞는다.
이 구간은 출발지부터 도롱이연못까지 1.5㎞ 남짓 거리다. 내내 내리막길이어서 숨이 차오를 일이 없다. 보물찾기하듯 야생화를 찾다보니 1시간여 걸렸다. 산은 높이에 따라 자라는 식물이 달라지는데, 붉은색 주목과 회백색 사스래나무 같은 높은 고도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희귀 나무도 연이어 만났다.
도롱이연못이 나오면 운탄고도에 다다랐다는 의미다. 해발 1133m 능선에 있는 도롱이연못은 1870년대 탄광 갱도의 지반침하로 생긴 생태연못이다. 못을 둘러싼 잎갈나무가 데칼코마니처럼 수면 위로 비쳤다.
연탄이 국민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시절, 강원도 정선 사북과 고한 지역에는 민영 탄광 가운데 생산규모가 가장 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와 태흥광업소를 비롯한 영세 탄광들이 성업했다. 과거 광부들은 안전모 램프 불빛에 의지한 채 지열 30도를 웃도는 작업환경에서 일했다. 도롱이연못에서 1.1㎞ 떨어진 화절령 인근에 살던 광부의 아내들은 그런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도롱뇽을 발견하면 무사고의 표지로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이 못에는 여전히 도롱뇽이 서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 4월 초에도 도롱뇽 알이 목격됐다. 못가에 세워진 시비를 읽다보면, 못에 얽힌 사연에 자연스레 마음이 가닿는다.
“우리 아빠 굴속에서 나올 때쯤 되면/ 우리 엄마 앉았다 일어섰다/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 / 해 저물어 저만큼 캄캄한 굴속에서/ 새까만 얼굴의 광부 아저씨들이 나오면/ … / 우리 엄마 나를 꼭 껴안고 길게 한숨을 쉽니다”(김남주 시인의 ‘검은 눈물’)
운탄고도는 길에 발을 디디는 느낌부터 고원숲길과 다르다. 평탄하고 단단하며 폭이 서너 배는 넓다. 과거 석탄을 옮기던 제무시 트럭이 다니던 길이어서 그렇다. 1957년 함백역이 개통됐다. 동쪽 만항재 인근에서 함백역까지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산림청이 조성한 임도, 1962년 2천여 명의 국토건설단이 닦아놓은 길을 이어 ‘운탄도로’가 만들어졌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불과 5~6년 만에 지역 탄광들이 차례로 폐쇄됐고, 제무시 트럭도 더 이상 오가지 않는다. 여행자는 길 위에 세워진 표지판을 읽고 그 과거를 더듬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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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그 길에서 만난 전봉준(76)씨였다. 그는 강원랜드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길을 재정비하던 중이었다. 전씨는 강원도 태백과 이 인근에서 15년 정도 광부로 일했다. 그는 폐광 정책 이후 사북·고한 지역 회생 정책을 촉구한 1995년 3·3투쟁 때는 물론, 60여 년 전 이 길의 과거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여기 석탄차가 왔다갔다 했어요. 1960년대 여기에는 열차가 안 들어왔거든. 그땐 이 길이 형편없었죠. 지금은 (재정비해놓은 덕분에) 고속도로나 한가지죠.”
해발 1100m 넘는 고지대이면서도 평평한, 걷기 좋은 산길의 뒤편에 이런 현대사가 있다. 과거 광산의 흔적은 ‘1177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개발한 최초의 갱도로, 2015년 12월 복원됐다. 사북·고한 지역 탄광 개발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운탄고도를 끝까지 걷지 않고 둘레2길로 넘어가려면 이정표를 잘 살펴야 한다. 이정표는 길을 잃지 않을 만큼, 서 있다. ‘만항재 말고, 팰리스호텔 방향으로’. 지도에서 본 한 가지만 기억했다. 느릿느릿 걷다보니 정오가 됐다. 볕이 따뜻해지니, 쌀쌀함이 덜해졌다.
산허리를 따라 운탄고도를 2시간여 걷다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코스인 둘레길 2구간이다. 여행자의 아쉬움을 달래주듯, 하늘길은 마지막 선물을 안겨줬다. 지도상 4번 전망대에 서면 첩첩으로 쌓인 산세가 파도처럼 울렁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장산(해발 1410m)부터 매봉산(1271m)까지 눈으로 산세를 따라가다보면 귓가에 맴도는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1시간도 채 걷지 않아, 오후 2시께 멀찍이 리조트에서 골프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로소 트레킹이 끝났다.
정선=글·사진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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