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호 표지이야기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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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영동선 승부역부터 양원역, 비동승강장(비동역)을 거쳐 분천역까지 낙동강 상류를 따라 걷는 세평하늘길은 이런저런 로망을 충족하는 길이다. 1980년대 후반 출생한 수도권 아이들의 로망은 영상이나 소설이 구성했다. 보고 들었으나 겪지 못한 장면과 시대와 정서를 향한 그리움에 애끓는다. 낙동강 세평하늘길은, 못 겪은 장면(외국 영화에서나 본 협곡)이며, 못 겪은 시대(전후 반짝 성했다가 쇠락한 기찻길)다. 못 겪은 정서(분천역 산타마을이 자극하는 가난한 산촌의 성탄)다. 그리워 종종 찾는다.
5월1일 경북 영주역에서 아침 8시30분 기차를 타고 1시간15분쯤 걸려 승부역에 닿았다. 가는 길에 승무원이 안내 방송을 자꾸 틀려서 잔잔한(열차 한 칸 72석, 승객은 넷뿐이라 뭘 해도 잔잔하다) 웃음을 자아냈다. 역무원은 두 번까지는 ‘방송이 틀려 죄송하다’고 했지만, 세 번째 틀리고부터는 말을 맺지 못하고 황급히 방송을 마쳤다.
승부역에 내린다. 등산복 차림의 두 중년 남성이 청순하게 ‘급식체’를 읊는다. “오지네.” “오지지.” 오지, 그건 세평하늘길을 유명하게 만든 홍보 포인트다. 근처에 그나마 번화한 경북 봉화 춘양부터 승부역까지 직선거리는 고작 15㎞ 안팎, 그러나 직선은 이 땅에 아무 의미가 없다. 배바위산, 황악산, 죽미산, 지게산, 화장산, 월암산 등이 첩첩해 모든 길은 곡선이다. 춘양에서 승부역까지 자동차로 가려면, 1시간30분이나 걸린다. 그런 땅에 이른 시점부터 기찻길은 용케 있다.
1956년 1월16일 승부역은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의 석탄과 이 동네 나무(춘양목이라 부르는 금강송)를 나르기 위해 지었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영동선(지을 당시 영암선)의 생김은 경탄스럽다. 석탄과 나무에 대한 그 시절 열정은 더 경탄스럽다. 과장 보태, 산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라곤 세 평뿐이라서 세평하늘길이라고 이름 붙었다. 2013년 세평하늘길로 다듬기 전까지 사람 다닐 길 또한 자주 끊기고 철로와 겹쳤다.
우비를 챙겨 입고 걷는다. 중년 남성들은 금세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길은 시작과 끝을 빼면 사람 볼 일이 많지 않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관광객을 태워 나르던 관광열차(백두대간협곡열차 등)도 멎었다. 적막하다. 기척 내는 거라곤 새와 물, 나뿐이다. 촤아악(물소리), 삐이익(새소리), 삐비빅(다른 새소리), 툭툭(빗소리)에 휩싸인, 스스로가 그렇게 멋질 수 없다. 홀로 대자연을 처연히 걷는 나그네라니!
다만 주의해야 한다. 부슬비일 때만 가능한 일이다. 물길 이편과 저편을 잇느라 자주 나타나는 다리는 물 위 1m쯤으로 매우 낮다. 큰비가 오면 잠긴다. 4년 전 가을, 처음 세평하늘길을 찾았을 때 전날 내린 비로 다리가 잠겼고, 양말을 벗어 던진 채 계곡을 건너보려다가 실패했다. 다른 길을 찾으려다 또 실패했다. 머리카락에 정체 모를 풀을 덕지덕지 붙인 채 물가에 주저앉아 망연했다. 이 모든 얼간이스러운 푸닥거리를 떠나, 폭우에 이 길은 무척 위험하다.
승부역을 출발해 3㎞쯤 지나면 ‘구암’(거북바위)이 나온다. ‘꽤 멀리서도 거북의 형상임을 알아볼 수 있는 바위’라고 안내문이 전한다. 아무리 봐도 거북이로 보이지 않는다. 그로부터 500m 걸으면 연인봉이 나온다. 압도적인 돌언덕에 나무가 드문드문 붙은 봉우리 두 개를 보고, 어떻게 두 사람을 떠올렸나. 은유는 조금 할 수 있는데 직유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좌절할 때가 있다. 사람을 은근히 놀리거나 본심을 감춘 채 말하는 생활 습관에서 은유는 익힐 수 있다. 직유 능력은 이름 붙이려는 노력과 면밀한 관찰력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도시 대부분 풍경과 사물에는 이미 이름이 있었고 설명 붙일 필요가 없었다. 직유는 나무나 돌이나 물이 가득한, 이런 풍경에 살아야만 훈련된다(고 핑계 댄다).
기찻길과 물길은 걷는 내내 옆으로 나란하다가, 교차하길 반복한다. 교차할 때는 자연스럽게 강을 가로지르는 녹색 철교가 생긴다. 철교는 곧장 터널로 이어지기도 한다. “터널 뒤에 뭐가 있지? 갑자기 기찻길이 없어졌어.” 혼잣말한다.(아무도 없으므로 창피하지 않다.) 이렇게 배부르게 기찻길을 볼 수 있다니, ○○ 같다.(직유 능력의 한계가 여실하다.)
두 시간쯤 천천히 걸어 양원역에 도착했다. 주민 엄기배(61)씨가 서성이고 있다.(사실 미리 연락해놓았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도시로 나갔다가 어머니와 같이 살러 돌아온 지 10년쯤 됐다. 양원역에 애정이 깊다. “막냇동생이 대통령한테 편지를 써서 만들어진 역”이다.
꽤 알려진 양원역 사연은 이렇다. 양원역이 있는 원곡마을은 이 산골에 그래도 제법 사람이 몰려 살던 곳이다. 울진부터 봉화까지 이어지는 열두 고개 가운데 마지막 고개를 넘어온 보부상이 머무르는 데이기도 했다.(실제로 1960년대까지 이 지역에 보부상이 있었단다!) 영동선은 놓였는데, 마을에 역은 짓지 못했다. 경북 안동으로 고등학교에 다닌 막냇동생을 데리러 아버지는 매일 승부역까지 마중을 가다가, 막냇동생에게 대통령한테 편지를 좀 써보라고 했다. 구구절절한 동네 사람들 사연을 담았다. 엄씨의 말을 전하자면, “기차 안에서 원곡마을이 보이면 주민들은 비장하게 짐을 던져두고 승부역에서 내린 뒤 몸만 걸어 내려와 짐을 찾아간다. 기차를 피해 걸어서 오가자면 전투를 치러야 한다. 큰아버지는 승부역에 내려 걸어오는 길에 철교에서 열차를 마주치자 철로 밑에 바짝 누워 목숨을 구했다. 피하지 못해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다.” 놀랍게도 대통령이 동생 편지에 답신했고, 열차가 원곡마을에 잠깐 멈추게 됐다. 주민들은 지게를 짊어지고 모래를 날라 대합실을 지었다. 양원역이라고 이름 붙였다. 1988년 일이다. 그래서 ‘최초의 민자역사’란다.
네댓 평 되는 민자역사에 앉아 얘기를 잇는다. “슬픈 얘기가 많은 곳이죠.” 화전민의 땅이다. 척박하고 가난했다. 논이 없는 동네라 밭에서 나는 콩이나 옥수수를 갈아서 끼니 삼았다. 문득 벽을 가리키는데 그가 적은 시가 있다. ‘한 많은 사연이 산자락 강굽이에 길이길이 묻혔구나’ 철없이 묻는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르신들은 왜 여기서만 사신 거예요?” “여기서 태어나고 한 번도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신걸요. 당연했으니까.”
로망은, 현실에 발 붙지 않거나, 현실을 추억으로 윤색했거나, 현실을 모르거나, 최소한 현실을 피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 협곡과 가난한 기찻길 옆 동네 같은 것을 로망으로 여긴 일이 문득 부끄럽다. “그래도 지금 돌아와 사는 2세대는 잘 살아요. 무엇보다 어디를 가봐도 여기만 한 풍경이 없죠.” 그가 눈치채고 토닥인다.
다시 걷는다. 비동역을 지나고부터는 하늘도 물길도 갑자기 넓어진다. 세 평이 만 평으로 확장한다. 물 건너편 숲을 보며 실감한다. “5월은 연두였어.” 연두~ 연두~ 연두~ 의미 없이 읊조리면서(힘들어서 그런 것, 맞다) 걷다보면 찻길이 나온다. 다시 30분쯤 걸으면 분천역에 이른다. 산타 테마 역으로 유명하다. 산타 모형이 느긋하게 벤치에 앉아 있고 산타 복장을 한 아이들 모형은 손 허리 하고 춤출 채비를 갖췄다. 관광지로 단장한 역 주변은 화려하고 한산하다.
길 막바지에 이르면 ‘우리 인류의 영원한 어머니이신 대자연을 아끼고 존중합시다’라고 적힌 안내문이 보인다. 괜히 비틀스의 <대자연의 아들>(Mother Nature’s Son)을 찾아 듣기로 한다. 계곡에 앉아 대자연을 노래하는 시골 소년! 로망에 젖는다. 별수 없는 일이다.
봉화=글·사진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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