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심해서 해야지요.” 선거가 끝나고 난 다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흥미로운 반응을 보았다. 굳이 정치적으로 분류한다면 어느 한 진영에 열광적으로 속하지 않는 이들이다. 여의도 정치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쟁점이 되는 모든 사안에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의견을 신중하게 하던 사람들이다. “말하는 것은 피곤하고 위험하다”는 게 그들 반응이었다.
한국 공론장의 큰 문제점으로 소수의 목소리 큰 사람들에 의해 극단적인 의견이 과대대표된다는 것을 꼽는다. 과격한 목소리끼리 경쟁이 과열되면서 점점 더 공론이 이분법적으로 극단적이 되고 말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있다. 이 과대대표 문제를 돌려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선악 이분법에 따라 과격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론장을 떠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과대대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가 왜 떠나는지 좀더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보다 말하는 것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질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들은 안전에 위협을 느꼈다. 어떤 사안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곧바로 비난받았다고 한다. 기계적 중립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건 결국 저쪽 편을 드는 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저쪽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결국 그게 그 이야기”이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분노하며 떠나갔다고 한다.
이들이 느끼는 안전에 대한 위험은 두 차원이었다. 하나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관계’에 치명적이다. 그동안 잘 쌓아올린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우리 관계가 그것밖에 안 되는가?”라는 허탈감과 무상함을 느낀다. 실존에 대한 위협이며 위험이다. 나아가 존재에 대한 위험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의견에 의해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모임에서 분위기가 자칫 험악해지거나 조리돌림을 당하는 일도 있다. 존재에 실제적인 위협을 느낀다. 그러므로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됐다.
또 하나의 위험은 인간됨의 가장 기초에 대한 위험이다. 이들이 보기에 인간됨이란 생각함에 있다. 생각이란 ‘모든 것’에 거리를 두는 일이다. 심지어 자기 의견과도 거리를 두며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견에 거리를 두는 순간 비난받게 된다면 이것은 성찰의 종말이며 비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게 위험한 일이 된다.
입을 닫아버린 이들은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많이 검토하는 신중한 편이며,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이다. 생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비추어보는 것, 즉 성찰(Reflect)을 의미한다면, 거리를 두는 족족 비난받는 현재 상황은 이들에게 둘 중 하나를 강요한다. 하나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생각한 것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된다. 이 중에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들이 보기에 지금 이른바 공론장에서 넘쳐흐르는 이야기는 과잉된 이야기다. 김곡 작가가 책 <과잉존재>에서 표현한 대로라면 지금 사람들은 말하는 게 아니라 ‘과장’한다. 생각에 기반을 두고 말하는 것은 경계를 지우는 일이다. 무엇과 무엇을 구별하고 구별된 것을 분류하고 그 분노가 정당한지를 돌아보는 일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분류와 정당화 작업이 끝나야 비로소 말하게 된다. 그렇게 말했을 때 말은 경제적이며 동시에 엄격해진다. 이런 신중함에서 본다면 말의 품격은 ‘절약’에 있다.
반면 지금 공론장에 넘쳐흐르는 이야기에는 절제와 절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과장된 과잉만 있다. 동의할 때도 100% 동의하는 게 아니라 150% 동의해야 한다. 태어난 지 100년도 안 됐지만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나도 백만 년 만에 만났다고 말한다. 사실 이게 말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논문이나 전시회 등 업적을 증명할 때도 요구하는 100%만 딱 채우면 비난받는다. 어느 정도 일했다는 말을 들으려면 업적의 200%, 300%를 해내야 한다. 늘 넘쳐흘러야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김곡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과잉이란 경계를 넘쳐흐르며 경계 자체를 지워버린다. 넘쳐흐르기 때문에 구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구분할 수 없게 한다. 구별할 수 없으니 말이 불가능하다. 나아가 성찰이란 구별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는 노력인 사유도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구별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필요해지면 거기서 가능한 건 ‘과장’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말을 이전 규칙에 가두려는 권력에 맞서 경계를 위반하고 탈주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이미 이 과장의 문제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을 쓴 일본의 정신의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사이토 다마키가 일본 청소년의 하위문화를 분석하며 말했다. 청소년들이 말할 때 ‘과장’하는 접두사를 상당히 많이 쓴다는 것이다. 한국말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냥 맛있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 앞에 꼭 ‘개’나 ‘핵’을 붙여서 강조한다. 내가 보기에 이건 ‘상당히’ ‘많이’ ‘굉장히’ 등과 같이 부사로 강조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한계 안에 있는 감정/정서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정서 자체가 인플레이션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앞의 것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과장하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과장한 것만 남게 된다. 사이토는 이것을 의미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한다고 표현한다.
감정의 강도만 남는 곳은 극단적 이분법의 세계다. 여기에는 ‘명도’만 강하면 된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이 두 가지 구별만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 구별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하거나 (즉 거리를 두거나) 다른 구별을 제기하는 것은 ‘현안’의 시급성에 비춰 본질을 흐리는 일로 비난받는다. 사실은 그냥 기분 나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그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닥치고 지지’뿐이다. 대개 근거를 가지고 이성적인 척하지만 이것은 기분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 제기와 토론 자체가 봉쇄당한다. 그러니 기분에 따라 좌우되고 싶지 않은 ‘거리두기’를 하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입을 다물게 된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과장만 존재하는 말의 공간에선 넘쳐흐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문제시된다. 상대의 말에 넘쳐흐르게 공감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말에 넘쳐흐르게 반박해야 한다. 그래서 공감에도 내용이 없다. 그저 호들갑스러운 공감했다는 신호(Sign)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뭘 공감했는지를 물으면 불같이 화낸다. 공감했는데도 왜 뭐라 하냐고 피곤하다고 반응한다.
내가 공감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고 구분하는 작업은 정지돼 있다. 아니 지금 공감이라고 말해지는 건 대부분 이 구별과 구분이 정지된 것, 정지할 것을 의미한다. 구별하려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가능하며 동시에 강요받는 것이 ‘생각 없는 공감’이다. 생각하는 순간 원하는 공감은 망쳐진다. 이런 맥락에서 ‘경청’을 강조한다. “그저 들어주세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저 듣고 공감해주세요.”
천만의 말씀이다. 경청의 핵심적 가치는 ‘그저 듣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신경을 써서 듣기 때문에 말하는 이도 구분/감지하지 못하는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하는 이가 자기의 사정과 감정과 판단으로 인해 감지하지 못하는 ‘균열’을 드러내게 하고 그 균열에 말을 붙이는 것이 경청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경청하면 “그렇군요. 잘 들었습니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심각하네. 같이 한번 이야기해보자”라며 말하기 이전보다 더 진지해진다. 이렇게 하지 않고 돌아섰기 때문에 ‘달짝지근한’ 경청의 자리 이후 사람들이 더 외로워지고 우울해진다. 내 이야기는 정말 들렸는가.
이 외로움과 우울을 틀어막는 유일한 방법은 더 과장되게 사는 것이다. 종교적 비유로 따진다면 1년 12달 24시간 부흥회가 열리는 게 지금 한국 사회 공론장이다. 누구나 거기서는 두 손을 하늘로 뻗어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만 외쳐야 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고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을 쏟아내야 한다. ‘믿음’이 강할수록 말을 짧게 하고 그 짧은 말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 여기 빠져들지 못하고 “그런데”라고 말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지표다. 그래서 이 믿음이 부족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가 아니라 ‘회개’다.
‘누구나’(여전히 아닌 사람도 많지만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말할 수 있고 실제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말하면서도 이게 정말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며 말에서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 그 결핍을 메꾸는 행위인 말을 말답게 하려는 사람들은 이 과장에 질려서 아예 말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 사유를 보존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말하지 않음’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지금까지 진보언론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공론장에 ‘몫 없는 이들’의 몫을 높이는 데 주로 역량을 쏟아부었다. 여전히 이 작업은 필요하지만 최근 담론 공간의 구조적 변화는 과대대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을 요구한다. 떠난 이들, 아예 말하지 않기로 작정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정치권과 언론이 반성하자마자 “바로 내가 말할 준비가 되었소”라며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과대대표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요즘 하는 작업은 말하지 않는 것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걸 택하는 조건을 찾는 것, 거기에 공론장의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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