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처음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블록체인 스타트업들과 흥망성쇠를 같이하는 전문매체에서 기자로 일한다. 얼마 전 동료 여성 기자가 한 명 더 생겼지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우리 회사의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당장 한두 달 뒤 미래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압도될 때마다 궁금했다. 규모와 성장 속도가 비슷한 다른 조직의 여성들은 이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김미진(35) 위커넥트 대표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처음 느슨한 인연을 맺은 것도 2017년이다. 대화는커녕, 서로의 게시물에 댓글을 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저기 어디선가 5년 후 혹은 10년 후 내가 겪을지 모르는, 또 내 친구들은 이미 겪고 있을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 시간이 있었다.
김미진 대표가 2018년 창업한 위커넥트는 탄력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하는 기업을 발굴해, 일과 삶의 양립이 필요한 ‘경력보유여성’ 구직자들과 이어준다. 필요하다면 없던 직무도 만들어 기업과 구직자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김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꿔 불렀다. 단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여성들이 가진 경험과 전문성에 시선을 두자는 의미를 담았다.
김미진 대표는 200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다. 가정환경 때문이었다. 대신 국내 한 대기업 해운 부문 계열사에 취업했다. 유조선부 사원으로 일하며 “시대는 10년쯤 뒤이지만,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주인공들과 꽤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06년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다. 경제학 공부가 잘 맞았다. 선배 따라 우연히 들어간 철학 동아리에서 정희진이 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그동안 경험한 것들이 언어로 정리되니까 뇌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래, 나는 그럼 여성주의자로 살아야지’ 마음먹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하다보니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컨설팅 기업과 교육 전문 기업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하다가, 한국 나이로 29살이던 2014년, 더 늦기 전에 소셜임팩트(혁신적 아이디어로 사회시스템에 긍정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 분야를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돈을 잠깐 놓더라도, 서른이 되기 전에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당시 김 대표는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강좌나 커뮤니티 모임을 찾아다니며 자기계발에 몰두했다. 즐겨 쓰던 커뮤니티 서비스 ‘위즈돔’을 만든 소셜벤처기업에서 6개월 일할 인턴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미 5년 정도 사회생활을 한 이가 인턴에 지원하자 회사에선 당황했다. 그러나 김 대표 입장에선 기간이 정해지는 쪽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앞으로 커리어(경력)를 어떻게 이어갈지, 내가 중시하는 가치가 뭔지 탐색하는 시간으로 삼으려면 고민에도 기한을 두는 게 나았다.
결과적으론 인턴이 아닌 정규직 마케팅 담당자로 채용됐다. 처음 경험한 소셜벤처 분야는 “돈(급여) 빼고는 다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스타트업 급여엔 한계가 있지 않나. “스스로 설정한 목표에 맞게 권한을 갖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어요.”
딱 6개월 경험해보려던 소셜벤처가 자신의 사업으로까지 넓어진 건 입사 이듬해 생긴 문제의식 때문이다. 2015년 위즈돔의 공동대표를 맡아 신사업 기획을 총괄하며,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외부 기관과의 회의에 나갈 일도 늘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만나는 다른 조직의 리더 대부분이 ‘나이 좀 있는 아저씨들’이었다. 여성인데다 결혼도 하지 않은 대표는 김미진 혼자거나, 있더라도 매우 소수였다.
‘그 많던 일 잘하는 여성 실무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주변 여성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경력 단절 문제를 직시하게 됐다.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 혐오 살인사건도 머리를 때렸다. 잊고 지낸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끔 했다.
“30대는 대부분 사람이 뼈와 피와 영혼을 갈아 넣으며 일하는 시기잖아요. 중요한 일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어젠다가 뭔지 보니, 나를 포함한 주변 여성들을 위한 일을 하는 거였어요.”
당시만 해도 여성이 일 앞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운동의 방식으로 풀려는 곳은 많았다. 하지만 돈 되는 사업으로 풀려는 곳은 많지 않았다. “수혜자를 지정해 지원하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큰 변화를 만들려면 결국 돈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봤어요. 돈이 된다는 건 사회에서 당연하고 가치 있는 거라고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잖아요.”
일하는 여성이 겪는 문제를 영리기업을 통해 풀고 싶었던 김 대표는 2017년 또 한 번 학교에 갔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원의 사회적기업가 경영학 석사(SE MBA) 과정에 진학했다. 김 대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시니컬하게(냉소적으로) 말하게 된다”며 “여자들은 꼭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공부부터 한다”고 했다. “보험까진 아니더라도, 안전한 선택을 하는 거죠. 저도 그랬고요.”
대학원을 간 데엔 학습을 통해 인풋(input)을 위한 물리적 기간이 절실한 까닭도 있었다. 은퇴 시기가 그만큼 늦어지더라도 7년마다 1년씩 ‘타임오프’ 기간, 즉 안식년을 갖는 게 그다음 7년간 개인이 일하며 발휘하는 창의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그래픽디자이너 슈테판 자그마이스터의 테드(TED) 강의 영상도 김 대표 등을 떠밀었다. 김 대표에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지 딱 7년 되던 때였다.
처음엔 여성 리더가 부족한 원인을 이공계 진출 부족에서 찾았다. 소녀들을 위한, 엄마와 언니들이 함께 만드는 과학실험실을 콘셉트 삼아 ‘걸스 사이언스 랩’을 만들겠다고 학교에 들고 갔다가 한 달 만에 접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가 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다시 처음 고민으로 되돌아갔다. “주변에 유능한 여자 동료가 이렇게나 많은데, 이들이 외부적 요인으로 일을 멈추거나 리더가 되지 못하는 건 분명히 차별이다.” 그럼 뭐부터 해결해야 할까 고민해보니, 아이 때문에 일을 그만뒀지만 다시 일하려는 사람들이 조금 더 쉽고 빠르게 일터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경력단절여성에 대해선 사회에서도 ‘일자리 취약 계층’이라는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 그만큼 덜 논쟁적이란 의미다. 20대에서 50대까지 아이로 인해 공백이 생긴 여성 가운데 30대가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위커넥트는 3040 여성의 경력 공백 문제를 먼저 격파한 뒤, 일하는 여성 전체로 대상을 넓혀가는 전략을 짰다.
“더 많은 30대 여성이 일자리를 찾고 리더의 자리로 올라간다면, 그들을 보고 성장하는 제트(Z)세대 여성에게도 분명 좋은 참고 모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 적게 받는 것 빼고는 다 만족스러웠던’ 소셜벤처에서의 경험은 위커넥트의 문제의식을 뾰족하게 만드는 데도, 해법을 찾는 데도 큰 밑바탕이 됐다. “소셜벤처기업들이 얼마나 임팩트(사회적 영향) 지향적으로 사고하고, 진정성 있게 일하는지, 그렇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탁월한 역량을 가진 이들을 데려오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는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가치 지향적인 소셜벤처는 경력보유여성에게 매력적인 일자리가 될 잠재력이 컸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다보면 관심사가 개인에서 사회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고객 인터뷰 과정에서 발견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 비슷한 경향이 있지만, 특히 여성은 아이가 태어나면 관심 갖는 어젠다가 세 개 생기더라고요. 환경, 교육 그리고 여성. 그렇다면 (엄마들이) 분명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가치를 만들어내는 조직에서 일하는 데도 관심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웠어요.”
유연한 일자리는 때로 불안정한 일자리의 다른 말이다. 그러나 경력자를 전일제로 데려올 여건이 안 되는 작은 기업에도, 일과 가정 모두를 챙겨야 하는 경력보유여성에게도 분명 필요하다. 플랫폼 역할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지점을 찾아 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거라면, 김미진 대표는 바로 그런 플랫폼을 만들어 승산을 보고 싶었다.
처음엔 구인 중인 지인의 회사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 추천해주는 것부터 시작했다. 워드프레스로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들고, 포토숍도 할 줄 몰라 파워포인트로 만든 카드뉴스를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려 채용 대상자를 모았다. 2018년 9월 베타 서비스, 2019년 10월 정식 서비스를 출시했다.
2021년 3월14일 기준, 462개 기업과 3900여 명의 구직자가 위커넥트 플랫폼에 가입했다. 지금까지 채용 의뢰가 1027개 들어왔다. 경력보유여성 255명이 실제 취업에 성공했다. 이 중 70%가 입사 6개월 이후에도 근속했다.
파트너사(위커넥트를 통해 구인) 키튼플래닛의 최종호 대표는 “경력보유여성이 주는 안정감과 경험이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스타트업의 조직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파트너사 관계자도 “회사 입장에선 경력이 많은 분을 찾아 채용하는 데 드는 재정적 부담을 유연한 근무 조건으로 줄일 수 있고, 파트너(구직자) 입장에서도 본인 경력을 활용하는 유연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위커넥트는 당장 재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채용 중개뿐 아니라, 커리어 계발을 위한 콘텐츠와 온·오프라인 강연 프로그램 등도 제공한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부터 건강 문제, 가족 돌봄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다양한 이벤트마다, 여성들이 강점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지속가능하게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한 솔루션을 다각도로 제안”(김미진, 2020년 10월, ‘위커넥트가 처음이세요? 위커넥트에서 커리어테크 하는 방법’ 중에서)하기 위해서다.
구직자가 개인 계정을 만들어 로그인하면,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점검하는 걸 돕는 ‘리스타트 준비’부터 실제 재취업에 성공한 다른 여성들의 실전 꿀팁을 담은 ‘리스타트 실전’, 입사가 결정된 뒤 엄마이자 일하는 사람으로서 챙겨야 할 사항을 정리한 ‘리스타트 카운트다운’ 등 다양한 연재물을 무료로 접할 수 있다.
예컨대 ‘리스타트 카운트다운’에선 입사 전 근로계약서와 연봉계약서를 확인하라는 실무적인 조언부터, 주변에서 ‘그 돈 벌려고 애는 안 챙기고 일하냐’고 물을 때를 대비해 ‘일하면서 얻는 경제적 수익보다 당신이 얻게 될 탁월성이 더 크다’고 미리 북돋아주는 말까지 고루 얻을 수 있다.
2020년 코로나19로 많은 기업이 휘청였다. ‘유연한 일자리’의 양면성도 드러났다. 이는 노동 시장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경력보유여성을 주 타깃 삼은 위커넥트가 언젠가 풀어야 할 고차방정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대재난이 고민의 시기만 앞당겼을 뿐이다.
“기업들에겐 신규 채용보다 감축이 더 급한 과제가 됐어요. 또 돌봄 이슈가 있는 여성, 특히 남편에 비해 임금이 적은 여성들부터 빠르게 회사에서 떠밀려 나왔죠. (유연한 일자리가) 그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해요.”
그러나 어떤 문제이건 단 하나의 명쾌한 솔루션은 있을 수 없다. 애초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8시간을 일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면, 유연함과 취약함이 동의어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코로나19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새 실험을 할 수 있는 작은 조직들부터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 정인선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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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
이른 자립의 경험은 지금의 김미진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부터 집에 사교육비 부담을 지우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부모님을 설득해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지, 바로 취업할지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록금을 손수 마련한 뒤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고3 여름방학에 일을 시작해 3년 반을 내리 일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을 일찍부터 하다보니 남들이 보편적으로 내리는 선택을 안 하는 데서 오는 압박을 덜 받았다. 대학에 제때 가지 않아도, 서른이 다 돼 새로운 분야에서 경력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결혼도 육아도 경험하지 않은 30대 초반의 어린 여성 대표가 자녀가 있는 기혼 여성을 위한 사업을 해서 의외라는 반응을 접해도, 큰 휘둘림 없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위커넥트를 발판 삼아 자립에 성공하는 여성이 늘어날수록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 여성들의 홀로서기 또한 덜 막막한 일이 될 것이다.
4년 동안 SNS로만 교류한 김미진 대표에게 인터뷰를 청하려 긴 자기소개와 함께 문자를 보냈다. 30분 뒤 답장이 왔다. “인선님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저희 인스타그램과 스트라바(운동 기록 앱)에서 서로의 운동 기록을 염탐하고 있지 않나요? 호호.”
김 대표도 나도 달리기에 진심이다. 둘 다 2018년 ‘이러다 죽겠다’ 싶어, 먼저 뛰던 여자 친구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또 적잖은 친구를 러너로 만들었다. 러너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런태기’(러닝 권태기)를 지난겨울 나도 그도 처음 맞았다. 그런 주제에 ‘이제 봄인데 마라톤 대회 안 열리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한번 열어볼까요, 온라인 마라톤 대회?” 그가 제안했다. 마침 인터뷰 다음주 월요일이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곧바로 SNS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각자 3.8㎞를 걷거나 달린 뒤 인증 사진을 ‘#2021세계여성의날’ ‘#함께달리면우린더강하다’ 해시태그와 함께 공유하자고.
3월6일부터 8일까지 70명 넘는 친구가 참여했다. 김 대표는 자신을 ‘서로의 일과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느슨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관심이 많고, 언젠가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꿈꾸는 러너’라고 소개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이들이 사흘간 총 266㎞를 이어 달렸다. 풀코스 마라톤을 여섯 번 뛰고도 남는 거리다. #함께달리면우린더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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