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서울시립승화원 공영장례식장에 고 이진덕(가명), 고 박인정(가명) 두 위패가 세워졌다. 위패 앞에 나물, 대추, 감, 배, 국과 밥 등이 놓였다. 유족은 오지 않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자원봉사자 7명 앞에 섰다. 무연고 장례를 지원해온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의 박진옥(48) 상임이사(이하 직함 생략)다. 고 이진덕(47)씨는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여관에서 살다 2021년 2월3일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추정됐다. 고 박인정(66)씨는 서울 노원구에 살다 2월21일 병원에서 직장암으로 숨졌다. 자원봉사자가 향을 피운 뒤 무릎을 꿇고 술을 올렸다. 박진옥이 축문을 낭독했다. “외롭고 힘겨웠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히 가시는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 잔 올려드립니다.” 가족이 없는 박인정씨 유골은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가 5년 뒤 합동 매장된다. 가족이 주검을 국가에 위임한 이진덕씨 유골은 시립승화원 유택동산에서 산골됐다. 이날 모인 낯선 추모객들은 산골한 자리에 국화 꽃잎을 뿌렸다.
서울시립승화원 공영장례 전용 빈소는 2018년 만들어졌다. 서울시가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공영장례서비스를 시작한 뒤다. 그전에는 나눔과나눔이 푸른색 이삿짐 박스에 병풍과 제기, 제물 등을 담아 와 승화원 빈 유족대기실에서 장례식을 했다. 2016년부터다. 그때까지 무연고자 주검은 애도의 시간 없이 지자체에서 운구해 봉안했다. 서울시가 나눔과나눔이 만든 공영장례 모델을 받아 응답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여전히 나눔과나눔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공영장례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장례 지원을 한다. 자원봉사자를 조직하고 유족을 위로한다. 서울시에서 받는 지원은 상담 전화비뿐이다. 나눔과나눔은 2020년 660명 장례를 치렀다. 2019년 429명보다 크게 늘었다.
“오늘 이진덕님은 저랑 한 살 차이네요. 그분이 2월생이니까 저랑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을 수도 있어요. 장례 치르고 집에 가면 쓰러져 자요. 지난해엔 정말 힘들었어요. 8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떤 날은 두 번씩 장례를 치렀어요. 어떤 장례는 훨씬 더 마음이 쓰여요.”
어떤 장례는 잊히지 않는다. “처음 유골함을 안았을 때가 아직 생생해요. 2016년 2월이었어요. 죽음의 이미지는 차갑잖아요. 유골함을 딱 받았는데 뜨거운 거예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그분의 마지막 온기 같았어요. 끌어안게 되더라고요. 처음 치른 아기 장례는 잊히지 않죠. 2016년 3월인데 관이 사과 상자만 했어요. 실감 나지 않았어요. 아기가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던 거예요. 베이비박스에서 어린이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진 20개월 아기였어요. 부모가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베이비박스에 두고 가는 경우도 많아요. 국가가 아이를 치료해주지 않을까 해서요. 그 아기 유골은 여전히 무연고 ‘추모의 집’에 있겠네요.”
2020년 발표한 2019년 무연고 사망자 수는 2536명이다. 2016년 1820명보다 39% 늘었다. 장례 비용 등이 부담돼 가족이 주검 인도를 포기한 건수는 2016년 622건에서 2019년 1583건으로 2.5배 늘었다.(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와 전국 17개 시도에서 제출받은 자료)
“무연고 사망 통계를 내는 데 몇 달이 걸려요. 국회의원이 요청하면 보건복지부가 지방자치단체에서 자료를 받아 취합하거든요. 복지부 소관이 아니니까요. 이 가운데 홀로 숨진 고립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아요. 통계는 2014년부터 나왔는데 매년 똑같아요. 무연고 사망자가 해마다 증가하니 문제라고요. 누가 문제인지 모르나요. 누가 왜 홀로 죽는지 파악해야 대책이 나오죠.” 그는 이 통계에서 사회적 의미를 읽는다. “통계를 보면 무연고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연령층이 매년 올라가요. 2014년에는 50대 후반 남성이었어요. 지금은 60대 초반이에요. 이게 뭘 의미할까요? 물론 1인가구가 많아지고 사회적 단절이 심해진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특정 세대가 사회적 단절 속에 늙어간다는 뜻이기도 해요. 저는 그 집단이 1997년 아이엠에프(IMF)와 경제위기로 넘어졌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고립돼야만 무연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이웃이 있어도 무연고자가 될 수 있다. 이제까지 법적 직계 가족과 배우자만 주검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수십 년 함께 살아도 법적 배우자가 아니면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조카나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당사자가 숨지기 전 장례집행자를 정할 수도 없었다. 무연고 장례를 치르며 나눔과나눔은 이런 현실을 기록했다. 2019년엔 국제 심포지엄도 열었다.
“사실혼 관계인 배우자들이 제일 안타깝죠. 처벌받을 테니 유골 가져가게 해달라 애원하는 분도 있어요. 매년 10월 무연고 합동 위령제를 하는데 조카들이 와서 엄청 울어요. 디엔에이(DNA)상으로 모자 관계라도 법률상 모자 관계가 아니면 어머니 장례를 못 치러요. 어릴 때 큰집으로 입양 간 형의 장례를 법적으로는 사촌이 되는 바람에 치를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수십 년 정을 나눈 동료나 이웃의 장례를 못 치러 무연고로 보내야 했던 분도 있어요.”
2020년 보건복지부가 지침을 개정했다. 나눔과나눔이 기록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사실혼 관계 등일 경우 연고자로 지정받을 길이 열렸다. 나눔과나눔이 제안해온 ‘가족 대신 장례’가 첫발을 뗀 거다.
“2020년 ‘가족 대신 장례’가 열 차례 있었죠. 올해는 벌써 다섯 번입니다. 하지만 법 개정이 아니고 ‘지침’이라 한계가 많아요. 일단 장례를 바로 못해요. 직계가족이 없는 게 확인되거나 가족이 주검을 위임해야 ‘가족 대신 장례’ 절차를 밟을 수 있어요. 다른 법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죠. 의료법상으로는 여전히 직계가족이 아니면 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못 받아요. 주검 인도도 못 하고요. 연고자나 장례주관자로 지정되면 구청에서 발급한 공문을 들고 다니며 일일이 설명해야 해요. 바뀐 지침엔 고인이 생전에 유언장에 유언집행자를 지정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다른 법과 충돌하기 때문에 유언장을 공증해주겠다는 변호사가 없어요. 한국 법의 근본 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요.”
공영장례, ‘가족 대신 장례’ 등 나눔과나눔이 제안했던 변화는 현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1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던 그를 포함해 4명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장례를 치르자고 모인 게 시작이다. 2011년 1월 김선희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6월 공식 발족했다.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장례 지원을 하다 2016년 2월부터 승화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홈리스 추모제 등도 벌였다. 박진옥은 2013년부터 상근으로 나눔과나눔에서 일했다.
“처음에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존엄한 삶의 마무리’라는 당위는 있었는데 모든 게 막연했죠. 한국에 공영장례 모델이 없었으니까요. 처음 비영리민간단체 신청할 때 서울시 담당 공무원이 받아주지 않았어요. ‘듣보잡’인 거죠. ‘장례가 어떻게 공영일 수 있냐’ 그래요. ‘가난한 사람들한테 뭐 뜯어먹을 거 있어서 그런 일을 하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희는 질문했어요. ‘돈 없어서 치료 못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돈 없어서 가족 없어서 장례 치르지 못하는 게 왜 당연한가.’”
나눔과나눔은 2014년 비영리민간단체 지정을 받았고 3년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 사업으로 선정됐다. 당시 지원은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만 받을 수 있었다. 사람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숨졌다.
“나머지 달에는 저희 예산으로만 장례를 꾸렸죠. 2011년에만 해도 구청에서 보낸 공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시신 처리 협조’. 지금은 ‘장례 협조’로 바뀌었죠. 처음엔 후원자도 다 지인이었어요. 지금은 후원자가 350명이에요. 오늘 술 올린 자원봉사자는 매주 와요. 2020년 여름엔 대학생 한 분이 여동생이랑 방학 내내 왔어요. 예전에는 결혼하고 자식 낳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 2030세대는 오히려 더 ‘내 문제’로 공감하는 거 같아요.”
“살아 있는 사람 도와야 하는 거 아니냐.” “무연고 죽음은 그가 살아온 결과 아니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박진옥은 나눔과나눔의 활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는 나눔과나눔의 활동을 “인기척”이라고 부른다.
“소방관이 사람을 구하러 화염 속으로 들어갈 때 쿵쾅쿵쾅 소리를 낸대요. ‘내가 당신을 구하러 간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고립감을 느끼면 사람이 빨리 죽음에 이른다고 해요. 저희도 그렇게 인기척을 내는 거예요. 돌아가신 분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들에게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알리는 거죠. 저희가 장례 치러드리기로 약속한 어르신들은 자랑하고 다녀요. 문의하는 분도 많고요. 쪽방촌 방문하는데, 방이 두 사람 앉으면 꽉 차거든요. 한쪽 벽에 제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요. 이분들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뒤가 두려운 거예요.”
장례를 직접 치르지 못하고 떠나보낸 유족이나 불안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인기척’은 필요하다. 그가 주검을 위임할 수밖에 없었던 유족과 대화를 많이 하는 이유다. “그분들은 이야기하며 기억을 정리할 수 있어요.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아픔을 간직한 가족들이 잊히지 않아요. 가정폭력으로 아버지와 오랜 시간 의절했던 딸이 장례에 온 적 있어요. 아버지 장례가 끝나고 제게 문자를 보냈어요. 이제 미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고. 아마 공영장례가 없었다면 장례하지 않았을 거예요. 공영장례가 있으면 유족에게 갈지 말지 선택권이 주어지잖아요. 물론 장례식 한 번 치른다고 깊은 상처를 다 내려놓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계기가 될 수는 있어요.”
그가 공영장례에서 마주한 것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내 문제, 내 이웃의 문제라고 했다. “저도 무연고자가 될 수 있어요. 서울 송파구에서 30년 공무원 했던 분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어요. 그분 마지막 주소지가 서울 불광동 주민센터예요. 삐끗했는데 재기하지 못하면 누구나 무연고자가 될 수 있어요. 공영장례 전용 빈소가 마련된 건 서울시가 전국 최초예요. 초기 모델이죠. 이런 곳이 전국 곳곳에 생겨야 해요. 누구나 기본적으로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에요.”
나눔과나눔은 기록으로 변화를 만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누리집에는 나눔과나눔이 장례를 치른 사람들의 사연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굵직굵직한 참사들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됐다. ‘나눔과나눔’의 ‘Re’member’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Re’member’는 ‘당신을 기억한다’는 뜻이며 ‘다시’(Re) 우리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member)으로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참사 희생자 애도의 날’ 글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사연이 하나하나 기록됐다. “생일을 이틀 앞두고 떠난 배지현님(사고 당시 16세), 곧 태어날 손자를 미처 보지 못하고 떠난 최정환님(사고 당시 55세)….”
“나, 내 가족, 지인의 죽음일 수도 있어요.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져요. 사회적 기억이 우리 현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그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할 수 있어요. 고인들의 음성을 누군가 대변할 필요가 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죠.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도 있고요. 하지만 알아야 해요. 우리 이웃이 어떻게 삶을 마감했는지. 무연고자는 특별한 누군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기록을 보며 내 이웃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돼요. 그런 생각들이 모여 변화를 만들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이전 이력은 나눔과나눔 활동에 도움이 됐다. 그는 숫자에 밝다. 통계의 의미를 읽는다. 꼼꼼하게 기록한다. 4형제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증권회사에서 일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해고됐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사랑의 열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등을 다녔다. 사회복지사와 미국 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IMF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계속 직장생활 했을 거 같아요. 잘했어요.(웃음) 그때 해고 통지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죠. 원래 사회복지나 특수교육 쪽 전공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졸업하고 가장 빨리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죠. 경제학을 전공하고 일반 기업에 다녀보길 잘한 거 같아요. 거시적 관점을 갖게 됐고요, 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어요. 숫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의미를 읽는 법도 배웠죠.
박진옥은 그의 이력을 국제앰네스티 전과 후로 나눴다. 국제앰네스티 활동을 하면서 인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국제앰네스티가 연대를 통한 변화를 지향하거든요. 그 바탕이 기록을 나누는 것이었어요. 저는 존엄한 삶의 마무리는 인권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성향이 좀 그래요. 거의 5년마다 직장을 옮겼던 거 같아요. 일하는 동안엔 열심히 재밌게 하는데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서면 떠나요. 그런데 나눔과나눔에선 벌써 10년이네요. 여기선 매일이 새로웠던 거 같아요.”
매일 새로웠다는 건 매일 고민해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의 마지막 길을 동행한 10년, 쉽지 않았다. 2018년까지 그는 외부 강연 등으로 자기 활동비를 벌었다. 2019년부터는 모든 활동가가 동일하게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나눔과나눔에서 활동비를 받는다.
“모델이 없으니까 매 순간 고민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요. 맞게 가고 있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질문이 매번 달라져요. 장례 절차도 매년 바꿨던 거 같아요. 지난해 제일 힘들었어요. 오래 함께하던 활동가 한 명이 그만두고, 다른 한 명은 출산휴가에 들어갔어요. 코로나19 탓에 강의가 끊기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거예요. 신입 활동가 채용까지 혼자서 전환의 시기를 관통하니 마음의 관절이 나간 것 같았어요. 가족의 동의와 지지가 없었다면 저는 그냥 돈 많이 주는 직장 다녔을 거 같아요. 올해 대학에 간 큰아이는 철학을 전공으로 택했어요. 무연고 장례에서 느낀 점을 에세이로 썼더라고요. 아내도 아이들도 삶의 지향점이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요.”
나눔과나눔의 상근 활동가는 그를 포함해 셋이다. 서로 별명을 부른다. 그는 바람모통이, 김민석 팀장은 그루잠, 임정 팀장은 이플이다. 배안용 이사장도 매주 두 차례 장례에 참여하는 준활동가다. 2018년 서울시가 공영장례서비스를 시작하며 서비스 맡을 업체를 선정했을 때 정작 공영장례 모델을 활동으로 보여준 나눔과나눔은 공개입찰에 응하지 않았다.
“나눔과나눔의 핵심은 연대예요. 장례 전문가는 이미 많아요. 공영장례 전에도 저희는 운구, 염습은 하지 않았어요. 저희 역할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애도하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거였죠. 공영장례가 되면서 장례식을 입찰받은 업체가 맡게 됐죠. 저희는 장례 진행을 도우면서 공영장례와 관련된 상담을 받고 고인을 애도해요. 지금은 과도기예요. 나눔과나눔이 만든 공영장례 모델을 공공이 가져간 것처럼 지금 저희 역할도 공공에 넘어가 제도로 만들어져야죠. 저희 꿈은 자기 소멸이에요. 누리집에 약속했어요. 30년 뒤엔 사라지겠다고. 저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져야죠.”
글 김소민 칼럼니스트,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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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나눔과나눔 활동을 하면서 순간순간 버겁고 제가 가는 길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싶어도, 장례 현장에서 함께하는 자원활동가 같은 분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고인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건 행복이었네요.
행복은 단순한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매 순간 즐겁기만 할 수 있겠어요. 행복은 존재 방식이자 삶의 방식인 거죠.
한분 한분을 떠나보내는 건 이별이라는 안타까움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만남이기도 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만나는 자리이기에 행복했고 떠나보내는 과정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무연으로 삶을 마감하신 분이 새로운 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행복이기도 했어요. 아이러니하지만 장례는 이별이라기보다는 저에게는 새로운 만남이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의 흐름을 마주하는 과정 역시 행복이었어요. 때로는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서 분노하지만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어요. 작은 변화의 흐름에 함께할 수 있는 건 저에게 행복입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혼자인 무연고 사망자의 외로움을 바라보면 2021년 문명사회를 사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합니다. 살아가는 것도 걱정이지만 이제는 죽음마저 걱정이 되어버린 우리네 삶을 바라봅니다.” 고 이진덕, 고 박인정씨의 장례식에서 자원봉사자가 조사를 읽을 때 나는 울었다. 내가 고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생전 주소와 나이, 사인뿐이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남 일 같지 않아서일 수 있다. 혼자 사는 나는 얼마든지 무연고자로 죽을 수 있다. ‘가족 대신 장례’가 자리잡지 못하면 조카도 내 장례를 치르기 힘들 테다. 그런데 내가 서러웠던 까닭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떠나버린 사람에게 느끼는 슬픔이었다. 자신이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서로 사람임을 확인해주는 것뿐임을 그 장례식은 보여주고 있었다.
이틀 뒤 나는 다시 서울시립승화원에 갔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 소복 입은 중년 여자가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관을 붙들고 통곡했다. “여보 미안해.” 그 여자는 혼자였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나봐.” 그런데 조금 뒤 그 여자 옆에 한 남자가 섰다. 나눔과나눔 박진옥 상임이사였다. 그가 여자를 부축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친구 아버지의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유족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그를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그 자리에 가보니, 그는 여전히 듣고 있었고 여자는 울음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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