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하 <입트페>) 열풍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저자 이민경 작가를 비롯해 온라인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만난 네 명의 20대 여성이 펴낸 <입트페>는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 창립으로 이어졌다. <입트페>가 40쇄를 훌쩍 넘기고 일본에서도 출간되는 동안 봄알람은 임금 성차별, 임신중지, 성매매, 대리모 등 다양한 여성 의제를 발 빠르게 내놓았다. 2020년 3월에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책 <김지은입니다>로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우유니(디자인), 이두루(편집·운영), 이민경(기획·집필) 단 세 명의 구성원으로, 아니 이 세 명이었기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이다.
출판편집자 출신인 이두루 대표는 2019년 봄알람 법인화와 함께 대표직을 맡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여름, 미국 전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에 관한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관객과의 대화에서였다. 부하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발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이후 많은 페미니스트가 <김지은입니다> 구매로 연대의 뜻을 표하던 시기였다. 분노하면서도 격앙되지 않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명료한 언어를 지닌 그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3·8 세계 여성의 날에서 하루 지난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 봄알람 사무실에서 이두루 대표를 다시 만났다.
<김지은입니다>를 출간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2020년 말 여러 언론사와 대형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지만, 출간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지은씨와 함께하는 활동가의 소개로 저자를 만났어요. 책을 내고 싶은데 출판사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만 법정 공방이 있을 수 있으니 ‘우리한테 지금 얼마 있더라?’ 하고 회사 계좌를 확인했죠.(웃음) 물론 봄알람의 명운이 달릴 수도 있는 일이라 멤버들에게 공유했는데 금세 ‘해야지’ 결론이 났어요. 이건 나와야 하는 책이고 너무 중요한 책인데 저자가 출판사를 찾고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출판사인 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거든요.”
두 달간의 출간 작업이 극비로 진행됐고, 홍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면서요.
“큰 온라인 서점에서 배너 광고를 할 계획이었는데 ‘광고 불가 도서’ 판정을 받았어요. 너무 놀랐죠. 출간 작업을 하면서 외부 요인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저자의 글이 지닌 힘은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김지은입니다>가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 첫 번째 칸에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독서인구는 물론 누구에게나 알려지는 책이 될 거라고 계속 상상했어요. 그런데 뚜렷한 사유도 없이 ‘부적절한 책이라 광고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부정적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김지은씨를 지지하더라도 이 고통스러운 사건의 기록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원순 전 시장 사망 이후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의미로 <김지은입니다>를 구매하는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었죠.
“2020년 7월 초, 안희정 전 지사 모친상 때 청와대에서 조화 보내고 그런 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기사로 났어요. 그런데 그 일에 분노한 사람들이 책을 사면서 하루 만에 분위기가 크게 바뀌더라고요. 그리고 며칠 뒤 박원순 사건이 일어나면서 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김지은입니다>를 주문한 거예요. 저자가 어렵게 토해낸 경험의 기록이 그 분노의 순간에 하나의 구심점이 되고, 책을 선택한 독자가 그 사태를 이해하는 척도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을 통해 이루려 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지은씨의 회복이죠. 이 책이 승리의 기록이자 사회의 자산이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저자예요. 전 국민이 오랫동안 이 사람에 대한 심한 모략의 말들을 봐왔잖아요. 가해자가 유죄임이 밝혀졌어도 그 말들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다음 삶을 살아가려면 그분의 말이 세상에 나와 아주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출간 뒤 저자를 만났을 때 얘기하더라고요. 책의 마지막 챕터 명이 ‘살아서 증명할 것이다’거든요. 사실은 그 문장을 쓰면서도 자신이 없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읽고 나니까 공언한 셈이 됐다고.”
이 대표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지은씨의 회복”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순간 왠지 목이 메었다. 출간 전후의 우여곡절에도 흔들림 없이 저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지킨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해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졌다.
십대 시절 성경을 비롯해 다양한 경전과 철학서에 매료됐던 그는 비신앙인임에도 순수한 학문적 관심으로 신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취업철이 되자 아무런 자격증도, 흔한 토익 점수조차 없었던 그가 이력서를 낼 수 있는 곳은 한정됐다. “토익을 너무 보기 싫었어요. 이렇게까지 싫으면 안 해야 한다 하다가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죠.(웃음)” 그런데 이 대표의 첫 직장은 연차도 없고 종종 토요일에도 출근하며 사장의 사유지에 직원들이 끌려가 나무를 심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는 입사 1년이 채 안 돼 출판노조에 가입하고 노동 상담을 받은 다음 동료들을 모아 탄원서를 제출한 뒤 퇴사했다. “남의 일이라면 ‘왜 참아?’라고 쉽게 말하지만, 막상 내 일이 되면 투쟁을 좀 피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묻자 그가 말했다. “수목원에 너무 가기 싫었어요. 토익이 싫어서 안 본 것처럼, 안 할 방도를 찾아야 했죠.” 이후 그 출판사에는 연차가 생겼고 이두루 대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전문 출판사로 이직해 4년가량 일했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2016년 어느 날, 사무실에서 우연히 본 <입트페> 프로젝트 제안 글이었다.
봄알람의 첫 번째 책 <입트페>의 출간 과정과 이후 일으킨 반향은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변화의 흐름 한가운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하고 엄청 고양된 상태였어요. ‘강남역 사건’ 이후 모든 여자가 그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끼는 동시에 사회나 주변 남자들과의 인식 괴리를 투명하게 마주한 상황이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대화법을 알려주는 책을 이렇게까지 필요로 한다는 건 뿌듯한 한편 서글픈 일이기도 했어요. 책을 낼 때까지는 출간 총괄을 맡았지만, 그 이후의 반응은 오히려 관찰자 시선으로 지켜봤죠. 한국 여성 의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안에 그냥 저도 있던 거예요. 최근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에서 <입트페>에 ‘10년을 빛낸 책’이라는 상패를 주셨는데, 그걸 보며 다시 생각했어요. 맞아, 진짜 좋은 책이었지, 라고.”
봄알람의 두 번째 책을 낸 뒤 다니던 출판사에서 퇴사했는데, 불안하지 않았나요.
“불안했죠. 그런데 그게 월급 나오는 직장을 그만둔다는 데서 온다기보다는 1년 뒤, 2년 뒤의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게 컸어요. 살날이 무척 길다는 걸 가끔 상기하면 기가 질릴 정도로 무엇이 되어야지,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구체적 계획이 없었어요. 사실 봄알람 일을 하려고 퇴사한 건 아니에요. 당시 일 자체를 성실 이상으로 하는 것과 별개로 밤에는 악몽 꾸고 아침엔 불행에 절어서 깨곤 했거든요. 그러다 ‘이렇게까지 불행하면 그만 다녀야지’ 싶어 차차 업무를 정리했죠. 그 뒤로 계속 봄알람에서 일하고, 조금 더 먼 미래까지 이 일을 잘 굴려 가고 싶지만 항상 불안해요. 하지만 이제 불안한 채 사는 게 그렇게 이상하거나 불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죠. 이런 부분에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재직 편집자로 일할 때보다 업무 영역이 크게 확장됐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본업은 교정·교열과 편집이고 그 밖에 신간 배본과 출고 관리, 회계 정산, 인세 처리, 중쇄 결정, 저작권 관련 업무, 서점의 엠디(MD) 연락, 언론 대응 등 운영 전반을 맡고 있어요. 사무실에는 저와 우유니가 자율출퇴근제로 나와 일하고 민경은 외부 활동을 하며 기획과 저자를 찾아오는 일을 하죠.”
구성원 간 의견이 다를 때는 어떻게 협의하는지 궁금합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누군가 말하면 ‘왜?’ ‘이러이러해서 그렇다’ ‘그래?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하자’는 식으로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편이에요. 각자의 업무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출발해도 좁혀가는 과정이 굉장히 빠르고 합의가 깨끗해요.”
페미니즘 출판사이기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민감성이 더 요구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편집과 교정은 독자가 글을 따라가는 데 허들이 없도록, 걸리는 부분을 없애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조금 낯설더라도 ‘모부’나 ‘여남’으로 쓰는 시도를 해요. 그건 저희가 작은 규모의 페미니즘 출판사고 우리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렇게 읽고 쓰는 경험을 일부러 하게 하는 거예요. 그 외에도 소수자성이나 무언가를 배제하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으려 계속 주의하는데, 한편으로는 주의만 하고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도 해요. 예를 들어 <유럽 낙태 여행>에선 ‘낙태’보다 ‘임신중지’가 적절한 표현이지만 왜 이 단어를 썼는지에 대해 책날개에 밝혀놓았어요. 독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의도를 알 수 있도록 저희도 계속 고민하면서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최근 에세이 시리즈 ‘출구 총서’의 첫 번째 권으로 허새로미 작가의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를 출간했습니다. 성차별이 심한 원가족에서 독립해 행복을 찾은 여성의 이야기고, 출간 예정작으로는 <결혼 탈출>이 있던데요.
“페미니즘에는 운동이나 투쟁의 영역만 있는 게 아니고, 결국 중요한 건 여성 일반의 삶이잖아요. 남성에게만 너그러움의 자원이 집중된 사회에서, 그런 것 없이 살던 여성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는 못 참겠으니 나가겠다’고 말하는 삶의 사례를 ‘출구’라는 이름으로 내보내려고 해요. 일상에서 여성을 소진하는 감정노동이나 관념을 만났을 때 모두가 공평하게 숨죽여 참는 사회에 사는 것과 그냥 ‘×까라’ 할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많은 사회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봄알람을 시작했을 때는 ‘내일 문 닫아도 된다’는 마음이었지만 지난해부터는 오래오래 생존하고 페미니즘 출판사로서 성공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변화는 무엇에서 비롯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만든 책과 활동이 가치 있다는 경험이 쌓였거든요. ‘봄알람 책은 실패가 없다’ 같은 독자 리뷰도, 부담스러운 신뢰지만 분명한 동력이 되죠. 무엇보다 지금 기획·편집·디자인을 담당하는 세 구성원의 역량과 팀워크에 믿음이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밸런스 좋게 모였나, 가끔 생각할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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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원래 취미도 많고 이것저것 공부하거나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과중한 업무 속에 직업인으로 생존하려다보니 인간의 기능이 엄청나게 단조로워지더라고요.
페미니즘 회사에 다니면서, 사회가 남성에게 얼마나 너그럽고 여성에게 야박한지 절실히 느꼈어요. 그래서 계속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언젠가 뭘 하나 해야 한다면 여성 권리 향상 운동이 아닐까. 그땐 ‘페미니즘’이라고 하지도 않았죠. 그러다가 2015년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지나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었고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그런데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마치 면허를 갱신하듯 꾸준히 나를 들여다보고 제대로 운행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해요.
퇴사 주인으로서의 감각을 얻었어요. 삶을 스스로 꾸리느라 불안한 와중에도 어떤 일을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훨씬 편안해져요. 장기적으로 내 일의 가치를 신뢰하면서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느낌이죠.
서울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봄알람 사무실 한쪽에는 고양이 화장실이 놓여 있다. 우유니 디자이너가 가끔 반려묘를 데리고 출근하기 때문이다. <김지은입니다> 출간을 가족에게도 비밀로 했다는 후일담에 “저희 고양이한테도 말 안 했어요!”라며 언급됐던 그 고양이다. ‘여성의 날’에는 회의 뒤 ‘봄알람 명절’임을 기념해 회식했다는 얘기에 메뉴를 묻자 이두루 대표가 말했다. “비건 인도 카레요. 우유니가 비건이라 같이 먹을 때는 다 비건식을 먹어요.”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분위기는 구성원 수가 적더라도 쉽게 형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스트 집단인 이들은 책으로 말하고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한다. 문득 벽에 걸린 <입트페> 일본어판 팀에서 봄알람에 보낸 그림과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새로운 언어, 용기, 강인함, 유연함 그리고 연대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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