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순간이다. 당시 주변에선 삼달다방에 방문해보라고 했다. 장애계 활동가가 운영하는데 그곳에 가면 ‘사람’이 있다고. 제주도에는 사람이 많고 예쁜 카페도 많은데 뭐 하러 다방까지 가서 커피를 마신담. 한 귀로 듣고 넘겼다.
2020년 가을, 그러니까 5명 이상 모임 금지가 발동되기 전 제주도 여행을 또 하게 됐다. 이땐 발달장애인 자식을 둔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모임의 총무가 숙소를 삼달다방으로 잡았다고 알렸다. 이름만 다방일 뿐 게스트하우스라는 걸 알고 난 뒤라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실망도 했다. 편한 호텔을 놔두고 게스트하우스라니. 이번 여행에선 숙소 욕심은 버리고 의미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 또한 장애계 일원으로서 장애계 사랑방 같은 삼달다방에 방문한다는, 그 의미에 집중하자!
그런데 웬걸, 빠져버렸다. 삼달다방에. 공간의 매력에. 더 적확히 말하면 그 공간이 주는 의미와 안식과 위로에. 게스트하우스라고 하면 그냥 싼 맛에 잠자고 오는 곳이라고 기대도 안 했는데, 제일 먼저 나는 ‘예쁘다’고 느꼈다. 구석구석 온 데가 다 예쁘다는 느낌. <신박한 정리> 신애라가 보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온갖 소품들에 둘러싸인 공간인데 그 하나하나의 소품이, 인테리어가 자세히 보면 다 예뻤다. 게다가 그 소품 하나, 인테리어 하나씩에 다 역사가 있고 사연이 있었다.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들도 편안해했다. 호텔이나 펜션을 잡으면 아들이 마음껏 소리 지르고 뛰놀게 할 수는 없어서 수시로 입을 단속하고 뛰는 걸 단속해야 하는데, 삼달다방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우리 아들 같은 이들을 위해서 지어진 공간이니까. 방방 뛰고, 울고 떼쓰고 돌아다녀도 그 누구 하나 발달장애인의 특이한 행동에 시선을 주지 않는 곳. 당연히 편하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제주도를 생각하면 삼달다방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늘 인터뷰는 삼달다방을 지키는 방장, 이상엽(55) 대표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어쩌면 그 공간에서 이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엽 대표의 호는 ‘무심’(無心)이다. 사람들은 그를 무심으로 부른다. 나 또한 그를 이 대표가 아닌 무심으로 호칭하기로 한다. “오랜만입니다.” 호들갑 떨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나와 달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무심의 태도는 늘 한결같다. 사진기자와 난 삼달다방의 정수라고 할 만한 문화동으로 먼저 안내받았다.
문화동에 들어서면 대학 시절 엠티(MT) 장소에 온 느낌이 난다. 공간을 감싼 분위기도 풍기는 어떤 향기도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무심은 김현식의 엘피(LP)판을 올려놓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공간이 음악으로 채워지고 나는 그를 바라본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서울에서 대기업 간부까지 지낸 사람이 어느 날 제주도로 내려와 사회적 소수와 모두를 위한 다방(게스트하우스)을 차렸다는 사실뿐이다. 무엇이 그를 지금의 길로 이끌었는지 알려면 그에 대해 많은 걸 물어야 한다.
“초중고 시절엔 야구선수가 꿈이었어요. 1977년 흑백 티브이(TV)를 샀는데 최동원 선수가 대학야구 하는 걸 처음 봤어요. 설렘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고등학교 야구부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는데 가난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어떤 가난일까? 나도 친구들에게 가난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가난은 ‘진짜 가난’이 아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진짜 가난’의 모습은 일상의 모든 것에 스며들어 슬픈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무심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서울 대림동에서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가루를 만들어내는 분쇄공장을 운영했는데, 무심은 주말마다 방학마다 새까만 연기를 들이마시며 공장에서 등짐을 지고 삽질을 했다.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어요. 매일 아침부터 낮까지 일하고 오후 3시가 되면 학교에 갔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학교 안 가고 그냥 공장에서 일하면 안 되겠냐고. 학교 가면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무심은 결심했다. “가난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아버지하고 공장에서 삽질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공부를 해야겠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해 고등학교 3학년 땐 장학금을 받았고 아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는다. 당시엔 “어떻게 자식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그 심정을 이해한다.
큰 사고도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공장에서 일했는데, 하루는 외부 해체 작업 중 건물이 붕괴했다. 내부 작업을 하던 그는 건물 잔해에 파묻혀 허리가 골절됐다. 8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복학 뒤에도 막노동과 신문 배달로 학비를 벌며 대학을 졸업했다.
삶의 궤적이 가난과 연결돼 있다는 무심. “그런 ‘가난의 과정’이 사람에겐 좋은 자양분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말에 괜히 내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198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청계산 자락에 묻어드렸어요. 당시는 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묘까지 한 시간 정도를 걸어가야 했는데 중간에 보육원이 있었어요. 자주 오가다보니 관심이 생겼죠. 처음 몇 달간은 아이들과 공 차며 놀다 왔는데 보육원 교사들이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해서 아예 대학에 보육원 아이들의 학습을 지원하는 ‘늘사랑’ 동아리를 만들게 됐어요.”
‘늘사랑’ 동아리 창립은 무심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를 넘어 타인으로, 사회적 인식의 확장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 서로 잇고 연결하는 지금의 역할이 행동에 옮겨진 첫 경험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뒤, 우림건설에 입사했다. 2015년 퇴사할 때 직책은 문화홍보실장(사회공헌팀장). 무심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대기업에서 20년이나 버틸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윤진철 사무처장은 “언젠가 그에게 왜 회사에 계속 다니냐 물었더니, 사회활동가 일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니까 다닌다고 얘기하더라”라며 웃었다. 그렇다. 고정수입은 또 다른 활동가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데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니다. 무심은 기업에 다니는 동안 사람과 가치를 잇는 일에 집중했다. 자본을 가진 기업과 가치를 지닌 사회활동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회사에 사회공헌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기업이 사회에 건강하게 돈을 쓰면 그 건강한 힘이 기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우림건설은 문화를 매개로 소외계층과 소통을 시작했다. 책 나눔 프로젝트, 200회 넘는 명사 초청 강연, 시와 음악이 흐르는 콘서트 등을 통해 감성경영을 하는 모범기업 이미지를 갖게 됐다.
무심은 기업에 다니는 동안에도 활동가로 살았다. 장애인, 인권, 빈곤아동, 여성을 주체로 진행한 공공문화 기획을 수백 건 맡아 진행했다. 삼달다방 방장 외에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여러 복지재단의 이사라는 직함들은 그의 스펙이 화려하다는 방증이 아니라 그만큼 왕성한 활동가로 살아왔다는 세월의 증표이다.
“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방식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무언가를 하는 느낌입니다. 그것을 위해 저는 그런 역할을 해왔던 것 같아요. 링거 역할. 잇는 역할. 활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응원해주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런 사람을 응원했을 때 사회가 더 건강해진다는 믿음도 있고요. 사회가 건강해져야 사회 안의 구성원도 건강해지니까요. 그들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게 내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었던 거죠.”
활동가로 있으면서 지금의 아내와도 만났다. 박옥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총장. 무심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주저 없이 아내를 꼽는다. “아내의 밝은 에너지가 좋았고 평생을 동지처럼 가치를 공유하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죠. 제 첫사랑 얘기를 들어준 사람하고 결혼했습니다. 하하하.”
“세월호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무심은 말했다.
2013년 10월 인천에선 강정평화상륙작전이라는 ‘강정 책마을 십만대권 프로젝트’가 열렸다. 세월호에 책 3만여 권과 사람을 싣고 인천항에서 출발해 제주항에 도착하는 이 행사에서, 무심은 선상 문화공연 기획을 맡았다. 세월호 구조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은 물론, 선원들과도 막역하게 지내며 공연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뇌 속에 박혀 있는 배가 가라앉으면서 쇼크가 크게 왔습니다. 슬럼프에 빠졌죠.”
방황의 시간은 꽤 오래 이어졌다. 무심은 내면의 동굴에 들어가는 대신 세월호 관련 광화문 행사를 기획하거나 유가족들과 함께 걷는 ‘참여’의 방식을 통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15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월호의 최종 목적지였던 제주도에 삼달다방을 지었다.
“2020년 삼달다방에서 416합창단이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자가 40명이고 관객이 25명인 공연이었는데 (웃음) 유족 한 분이 ‘이렇게 제주도를 올 수 있게 됐네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삼달다방 문화동은 이 콘서트만으로도 그 가치를 충분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달다방은 3개 동으로 구성됐다. 먼저 문화동. 이곳은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공간이자 모두의 사랑방이다. 영화제, 콘서트, 북토크, 사진전 등 수백 회에 이르는 인권 관련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안락한 쉼의 공간이기도 하다. 문화동에 들어서면 벽마다 가득 찬 만화책 수백 권이 눈에 띄는데, 엘피판을 모아놓은 음악존에서 원하는 가수의 음반을 선택해 레코드판에 올려놓고 2층 다락에 올라 편안하게 누우면 ‘여기가 천국이지’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옆엔 게스트하우스인 무지개동이 있다. 누구나 편하게 묵고 갈 수 있도록 배리어프리(장벽 없는) 디자인으로 설계됐다. 공용공간인 거실을 지나면 복도 양옆으로 방이 늘어섰는데 각 방에 담긴 의미가 남다르다. 인권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사진활동가(오렌지가 좋아)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오렌지가 좋아’ 방, 탈성매매 여성들을 응원하는 뜻을 담은 ‘숫사자’ 방, 부양의무제 폐지의 상징인 분홍 종이배를 널리 알리기 위한 ‘분홍 종이배’ 방, ‘초코’라는 유기견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이름 붙인 ‘초코는 달콤해’ 방이 있다.
무지개동 옆에는 이음동이 있다. “처음엔 무지개동과 문화동만 있었어요. 어느 날 중증장애를 가진 친구가 제주에서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어달라며 500만원을 보낸 겁니다. 그래서 장기 숙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별도의 독채를 만들었어요.”
독채는 제주도 한달살이 등 장기투숙을 원하는 사람, 또는 잠자는 공간을 제외하곤 생활의 모든 게 공용공간에서 이뤄지는 게스트하우스 시스템이 불편한 가족 단위 손님이나 활동가들을 위한 곳이다.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환경도 다 조성돼 있다. 출입구와 화장실 등엔 문턱이 없거나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선’ 수준의 문턱이 있다.
이음동 옆에는 큰 컨테이너가 있다. 지금 이곳은 누가 무엇을 하든 무방하고 비우며 채우는 ‘무방’으로 만들어지는 중이다.
“원래 창고였던 이 공간을 장애·비장애 공익활동가들과 아티스트를 위한 레지던시 공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주에서 긴 시간 머물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기타를 튕기며 뒹굴뒹굴 쉬거나 예술 활동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주목할 건 삼달다방은 무심 혼자가 아닌 많은 이가 십시일반 손을 보태 공간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시간 되는 누군가, 힘 좀 쓰는 누군가, 기술 있는 누군가, 그림 그리는 누군가, 글씨 쓰는 누군가, 쉬러 온 누군가가 이곳에서 기꺼이 나무를 자르고 시멘트를 바르고 색칠과 도배를 하고 정리를 도왔다. 그렇게 공간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며 하나씩 채워졌다.
“여기는 사람들 덕에 운영되는 공간이에요. 가구도 가전도 책도 소품도 많은 이가 하나씩 가져다놓고 따로 보내며 그렇게 채워졌죠. 공간 자체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요? 디자인 콘셉트요? 그냥 짓고 싶은 대로 지어요. 여기 무지개동 천장을 보면 무지개 빛깔의 카펫 같은 인테리어가 예쁘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거 사실 버려진 귤상자예요. 나무 귤상자 150개를 뜯어 오가는 사람들이 일일이 다시 색칠해 붙인 거예요. 한 번 쓰고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닌 다시 살아가는 느낌으로,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주인공이 아닌 이어주는 사람으로요즘 무심은 막바지 무농사에 한창이다. 원래 삼달다방 터는 무와 양배추 농사를 짓던 곳이라, 그도 8월이면 월동무를 심어 이맘때 수확해 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눠왔다.
이번 인터뷰이를 섭외하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체인저스 특집이라고 하자, 무심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은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잇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는 거라고요”라는 항변이 절로 나왔다.
“저는 삼달다방이 사람을 잇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남녀노소, 장애 비장애, 성적 정체성을 떠나 사람이 존재 자체로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길 희망해요. 그렇게 세상의 주인공인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편하게 쉬고 재충전한 뒤 사회로 나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이 이 사회가 건강해지는 데 기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잇는 사다리 같은 사람이고 싶어요.”
앞으로 계획도 있을까? 단순 관광이 아닌 ‘사회적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탈시설 장애인이나 탈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 의미를 필요로 하는 이들과 삶의 이야기를 담아 함께 여행하는 게 참 좋더군요. 지나온 삶을 되새기고 앞으로의 시간을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싶어요. 이 과정에서 청년들이 함께 결합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학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같이 노동하고, 일하고, 밥 먹고, 놀고 그러면서 서로 친구가 되는 거지요”
삼달다방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주길 소망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주=글 류승연 작가,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582/
아내
무심을 바꾼 인생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는 ‘아내’를 꼽는다. “아내를 만난 후 처음 보는 세상에 눈떴어요~”라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건 아니지만, 그가 지금까지 ‘잇는 사람’으로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아내 덕이다.
아내인 박옥순(5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총장은 장애계에선 널리 알려진 활동가로, 2020년 12월 한국장애인인권상 ‘인권 실천’ 부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이름과 직함 대신 ‘오케이’로 부른다.
무심과 오케이는 1991년 만나 1999년 결혼했다. 첫사랑 얘기 잘 들어준 밝은 에너지의 누나와 여성 장애인 활동을 지원하며 신뢰가 싹텄고 시간이 흐르며 신뢰는 사랑으로 무르익었다. 무심은 오케이 덕분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예전에 어떤 자리에서 각자 존경하는 사람을 꼽아봤어요. 저는 아내라고 했더니 다들 웃는 겁니다. 농담인 줄 알았나봐요. 저는 아내를 존경합니다. 단순히 부부로서가 아닌 사회구성원으로서 삶, 그 자체를 존경해요. 그가 30년 동안 활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그 진정성을 잘 압니다. 아내 덕에 저는 사람으로서 가치를 존중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죠.”
아내는 적극적인 활동가로, 남편은 그런 아내를 포함한 활동가 모두를 지원하는 조력가로,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공통된 삶의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부부의 삶에 절로 응원이 나온다. 무심과 오케이 파이팅! 삼달다방 파이팅!
문화동에 늘어선 테이블 위에 크고 작은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다. 각각의 판자 위엔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그려졌는데 무심은 “작가님도 하나 그리고 가시죠”라고 했다. 인터뷰 전날 삼달다방을 방문한 탈시설 장애인들이 그린 그림이라 했다. 이 판자들이 새롭게 지어질 ‘무방’의 벽면을 장식할 인테리어 소품이 될 것이었다.
“아이고 저는 됐어요”라며 사양한 이유는 네다섯 살 어린아이 수준에도 못 미치는 그림 실력이 창피했기 때문인데,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렇게 후회를 했다. 나도 판자 하나를 집어들어야 했다. 그림 실력이 창피하면 크레파스로 가나다라 한글이라도 쓰고 와야 했다.
왜냐면 나 또한 이 사회의 일원이니까.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개인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끌어주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니까. 당신들 곁엔 내가 있고 내 곁엔 당신들이 있다는 증명을 공간에 남기고 와야 했다.
‘무방’이 다 지어지기 전에 제주도를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나도 흔적 하나를 남기고 와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삼달다방에 무엇이든 남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졌다. 누군가는 책을 남겨 한 공간을 서재로 만들어버렸고, 누군가는 글씨를 남겨 공간을 방문한 이들을 반겼으며, 누군가는 생필품을, 누군가는 소품을, 누군가는 먹거리를 자꾸만 다방에 남겼다. “외로워하지 말아요. 내가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요.” 그렇게 모두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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