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는 모양부터가 재미나서(세 글자 모두 ‘ㄴ’과 ‘ㅜ’를 이리저리 돌려 맞추면 만들 수 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단어다. 한글은 대개 그리 재밌는 조형을 지녔다고 반박한다면, 덧붙여 이런 이유도 가능하다. 누구나는 너도 이르고 나도 이르는 말인데, 그때의 너와 나는 어떤 모습, 어떤 채로 있어도 상관없다. 가난하거나, 소수이거나, 힘이 없거나. 그 어느 존재라도 ‘누구나’ 하고 부르는 순간 ‘네, 저요’ 하고 손을 들 수 있다. ‘누구나’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당신이 제 모습대로 있어도 소외되지 않는 자유를 담지한다.
‘누구나데이터’는 사명에 충실한 회사다. 비영리·사회단체·대안운동이 좀더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컨설팅하고 분석 도구를 제공한다. 비영리단체끼리 디지털 홍보와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공동체를 꾸린다. 혁신가들 사이에 많이 쓰는 그 단어, ‘임팩트’(사회적 영향)를 굳이 붙여 적어본다면? ‘임팩트를 확산하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임팩트를 확산하는 기업’이라는 요상한 표현이 된다. 아무튼 사회 변화를 한층 빠르게 하는 게 목표다. 그래서 이 글은 결국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홍보인 것인가? 설마.
자유를 담지한 그 지칭 ‘누구나’를 다시 떠올린다. ‘너와 내가 존재하고 싶은 대로 있을 자유’와 세상은 종종 불화한다. 불만을 품고 좀더 나은 세상을 꿈꿨으며, 그리하여 바꿔보려던 어느, 누구나가 있다. 그는 이내 깨닫는다. 뜻만으로 쉽지 않다는 것. ‘잘해야’ 한다는 것. 세계가 변하려면 내가 꿈꾸는 세상을 설득해야 하고, 사람을 모아야 한다. 많은 비영리단체가 하는 일이다.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의미는 분명한데, 들어주는 이는 별로 없다.
무엇을 잘못한 걸까. 우리 자리는 쪼그라든다. 혼란과 자괴감이 깃든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들어야 한다. 이제는 완연히 사람들 생각과 행동이 모인 그것, ‘디지털 데이터’에 눈뜬다. 21세기 디지털 세계와 데이터는 절박하나 장벽이 높기로는 마치 의학이나 법학 같아서, 난무하는 온갖 전문 용어에 일단 털썩. 데이터 분석 비용을 듣고 다시 한번 좌절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결국 돈, 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변화마저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분노에 사무친다. 혹은 무력한 스스로를 냉소한다. 누군가가 되지 못한 누구나한테 변화의 벽은 자주 너무 높다.(이 문단을 적으며 굳이 <한겨레21>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누구나데이터는 체념으로 맺을 뻔한 이 길목 어디쯤에서 토닥인다. 우리도 ‘잘할 수 있다’고. ‘정말요?’ 위로받고 싶은 강아지 눈망울이 되어 이 회사 대표랑 마주 앉는다. 누구나데이터는 다시 한번 사명에 충실한 회사다. 누구나는 자유를 품은 단어, 대표마저 김자유(27)다.
김자유, 누구나데이터 대표.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거부 선언을 했고,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일했다. 대안공동체(주거공동체 ‘빈집’)에서 살았다. 녹색당 홍보 담당자였다. 지문 날인을 거부하고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는 생활 운동도 했다. 그러니까 사뿐사뿐 주저함 없이 자유를 막는 온갖 것에 부딪힌 것 같다. 물론 이건 밖에서 봤을 때 얘기다. 이 과정 내내 실은 고민했고, 수정했고, 다시 해봤고, 여전히 고민한다. 지금 스물일곱 김자유의 생각과, 과거 또 어느 나이 김자유의 경험을 교차하며 듣는 일은, 그러므로 무척 진심인 자유의 지향점을 되새기는 일, 그걸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피는 일,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들 사이에서 답 찾기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김자유 인터뷰는 누구나데이터 사무실이 있는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3월7일(일요일) 오후 3시간30분쯤 했다. 떠올리고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피로해 보였고 손수건으로 마른 얼굴을 닦기도 했으나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라고 반복해서 말해줬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상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돕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마주 앉은 인터뷰어는 (영악하게도) 한층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맡겨놓은 양 답을 구한다. 김자유는 눈을 끔벅, 다시 말을 고른다.
스물일곱 김자유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름부터 그렇다. 2014년 초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개명했다.
“필명을 자유로 썼어요.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요. 문득 이럴 바에 이게 내 진짜 이름이면 왜 안 될까 싶었어요. 다만 개명 직전에 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이 ‘자유’와 연결된 게 맞더라고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의 자유냐, 자유 보수 이런 거냐’ 하면서 놀리기도 했는데. (근엄하게) 아니고요. 인권에서 자유권 이야기할 때 그 자유입니다. 합리적 이유 없이 행동과 존재를 제약당하지 않을 자유,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 자유.”
자유를 향한 움직임의 씨앗은 대개 그렇듯 불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열다섯 살(이른 생일 때문에 학교를 한 살 앞서 다녔다) 김자유 속에도 불만이 가득 찼다. ‘공부, 공부’ 하는 학교와 집에 걸맞은 학생이 되기 위해 과목별 단과 학원으로, 김자유도 끌려다녔다. “내적 소용돌이를 겪었다.” 청소년이라면 누군들 아니 그랬겠는가. 다만 대개 꾹 눌러 참았다. 옆의 애들도, 그 옆의 애들도 그러니까. 김자유는 안 그랬다. 운이 좋았다. 불만에 붙일 단어를 찾았다. 어쩌면 움직임은 불만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학생인권을 얘기하며 학생회장이 됐어요. 주변 환경이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학교도 집도 공부만 강조하는 딱딱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첫 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인권’이라고 큼직하게 적어주셨어요. 너희가 살면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인권, 그 단어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지금까지도 세상을 보는 틀이 됐어요. 학생회장이 돼서 학교를 바꿔버리겠어! 나름대로 혼자 소명 의식을 가진 거죠.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부터 수첩을 들고 마치 교장 선생님이 된 것처럼 교육과정, 학생 복지, 교칙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적었어요. 다른 학교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교육운동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보러 다녔어요. 그렇게 1년 동안 준비한 유세 연설을 하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제가 좀… 세게 얘기했거든요. 학교의 교육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선생님은 당황하시는 분들 반, 응원해주시는 분들 반.”
당선했다. 친구들은 “인권 학생회장” 하고 불렀다.
그치지 않았다.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의장(2011년 3월~2012년 2월)을 맡았다. 이윽고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운동에 동참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11년 11월 대학 거부 선언을 하며 <한겨레21>과 인터뷰한 김자유의 말은 당차기 그지없다. “수능을 치르는 것을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제886호 ‘학력사회의 내부 망명객들’) 10년 지나 그 말을 다시 꺼내 든다. 머쓱하단다. “좀 재수 없게 들렸을 것 같아요. 마치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와의 관계, 독립 문제 같은 현실 앞에 힘들어하는 친구도 많이 봤어요. 그 시점에 나는 이미 교육운동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할 수 있었던 말이에요.”
불만은 꿈이 돼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에 장래희망을 ‘교육감’이라고 적었다. 학생의 자유를 교육감이라면 되찾을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교육감을 찍찍 긋고 ‘교사’ 이렇게 적어놓으신 거예요. (웃으며) 지금도 화나네요. 학생의 꿈을 말이에요. (그래서요?) 다시 찍찍 긋고 명확히 적었죠. 교. 육. 감.”
대학 거부 선언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답답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남들보다 크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좀더 담대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순응하고 마는 저는) 부딪히는 사람한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아요.
“사회 통념이나 다수가 그렇다고 하는 방향이 있더라도 혼자 생각하기에 이치에 맞지 않으면 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편인 것 같아요. 근데 그건 시대의 영향도 컸어요. 고등학교 입학하고 김상곤 교육감이 경기도에서 진보적인 정책으로 당선하는 모습을 봤어요. 내가 속한 학교에 대해 변화를 말하고 그게 이뤄지는 모습을 본 거잖아요. 나 말고도 당시 많은 청소년이 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작게나마 학교가 변하는 모습도 봤고요. 어느 하나 짚기는 어렵지만 변화를 보거나, 경험한다는 게 정말 중요했어요.”
#2. 열아홉, 스물일곱교육운동가를 꿈꾸던 열아홉 김자유의 스물일곱 살 직함은 스타트업 대표, 데이터 컨설턴트다. 변화의 가능성을 확신했고 목표를 정해 매진했더라도 부딪히며 변한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스스로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다른 자리에서 또 새로운 걸 배운다. 김자유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활동가 2년차에 방향을 튼다. 단체의 온라인 홍보를 맡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육운동가를 꿈꿨는데 온라인 홍보를 맡게 됐어요. 조직이 싫어지지 않았나요.
“그즈음 교육운동에서 내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어요. 나는 (교육운동의 중심인) 교사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니잖아요. 학생인권과 학생자치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나서는 학생이라는 정체성도 희미해지고요.
그러다 주변 상황을 봤어요. 시민단체 전반적으로 홍보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연해요. 시민운동가는 정책이나 운동 전문가이지만 모금이나 홍보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모금하려고 시민단체를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렇다면 홍보도 그저 변화의 최전선에서 정책 만들고 운동하는 동료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운동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장 눈앞에 닥친 새로운 일을 해나갔다. 어릴 때부터 “이과형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포스터 하나를 만드는 일, 캠페인 누리집을 만드는 일이 취미 수준이어선 안 됐다. 잘해야 했다. 몰입했다. 꾸준하게. 어느덧 “외부에 의뢰해 맡기는 것보다 더 좋다”는 얘기를 동료한테 들었다.
녹색당 전국 사무처에서 온라인 홍보를 맡았다. “지금은 누구나 하고 있지만” 녹색 바탕 위에 논평 한 문장을 적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논평 카드 방식을 ‘발명’했다. ‘3분 녹평’이라는 영상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작은, 동시에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면도 있는” 녹색당에서 홍보 경험은 특정한 (잠재)지지자와 다수 대중 사이에서 마땅한 설득 대상을 찾는 고민의 연속이었는데, 김자유는 굳이 따지면 “작아도 견고한 지지(당원)를 늘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편이다. 민간 데이터 컨설팅 기업인 데이터리셔스에서 일했다. 데이터 분석 기술을 다듬었다. 점점 세분화·전문화되는 데이터 분석 기술에서 어느 정도가 지금 사회단체에 필요한 적정한 기술인지 자문했다. “있어 보이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데이터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하는 단체가 접근할 만한 수준의 기술을 퍼뜨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자리를 바꾸며 생각을 쌓았다.
#3. 스물일곱-스물일곱누구나데이터는 4년차를 맞았다. 처음에는 구글 분석 도구(구글 애널리틱스)를 활용해 일대일로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했다. 국경없는의사회나 세이브더칠드런 같은 큰 단체들이 고객이었다. 온라인으로 모금이나 참여 활동을 했다면 동참해준 사람들의 유입 경로나 성향 등을 살펴보고(성과 분석), 비슷한 잠재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매체를 통한 어떤 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인지 제안한다. 안정적일 수 있었다. 다만, 이대로는 ‘누구나’가 안 됐다. 자금과 인력이 부족한 작은 단체도 활용할 수 있도록 ‘캠페이너스’라는 누리집 제작 도구를 개발했다. 한 달 1만5천~3만5천원을 내면 비슷한 데이터 분석 기능이 장착된 누리집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데이터 분석의 문턱(어려움과 비용)을 낮추는 데 집중한다. 고객을 만나면 최대한 쉬운 단어만 골라 쓴다. 더 많은 ‘누구나’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한다. 이건 당연한 것과 부딪혀온 그의 삶과 일치하나? (다소 무례하게) 묻는다.
왜 가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고객 분석은 중요할까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다가 우리 가치를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운동이 ‘우리는 옳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에 그치지 않고 진짜 변화를 만들려면, 사람들을 설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와 투자가 필요해요. 공급자 입장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선명하게 할수록 대중과 멀어진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야말로 실증적인 데이터를 보는 것이 도움돼요. 결국 판단은 우리가 하지만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고 경험이나 감에 의존해서는 안 되죠. 막상 데이터를 분석하고 나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한층 정교하고 명확해지기도 하고요.”
지문 날인 거부운동은 정보인권 운동이고, 살았던 주거공동체 ‘빈집’은 탈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공간이었어요(‘김자유를 바꾼 것’ 참조). 데이터를 활용하고 비영리단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누구나데이터의 방향과 부딪치지 않나요.
“궁극적으로 충돌한다고 생각해요. ‘더욱더 능력을 갖춰서 경쟁에서 승리합시다’ 하는 건 결국 자본주의적인 논리잖아요. 다만 현재까지 할 수 있는 설명은 기술 기반으로 홍보와 소통이 옮겨가면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격차는 그동안과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는 점이에요. 이 격차를 가만히 두고 갈 수는 없었어요. 비영리단체나 대안운동의 지향점 자체는 가장 앞선 것인데, 그런 것을 퍼뜨리려면, 그러니까 바람직한 사회 변화를 좀더 빨리 이끌려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을 우리 스스로 더 많이 익혀야 해요.
정보인권 문제도 걱정을 많이 해요. 개별 조직에 요구하거나 시장에 맡겨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법률로 규제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규제를 더 풀어주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점점 정보인권 운동의 힘이 약해지는 것도 무척 걱정스러워요.
이런 대답조차 “아직 썩 만족스럽지 않다”고 김자유는 자주 말했다. 고민하고 있다. 다만 하나, 나도 너도 누구나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향해야 한다는 지향점만은 분명하다. 데이터 기반 사회이므로 거기 이르는 길목, 기술의 활용 역시 자유롭고 공평하며 민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한테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모든 의사결정을 앞두고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우리는 뭘 하는 곳이지?”다. 매출은 지속가능성을 위해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의 변화, 문제 해결이 먼저다. 변화를 돕는 일은 행복하다. 2월 누구나데이터는 카카오임팩트에서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카카오임팩트 펠로우십’ 지원금을 받았다. 넉넉지 않은 스타트업이라 단비였을 터…. 지원금은 120개 비영리단체가 ‘무료로’ 캠페이너스와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데 쓰기로 했다. 부를 쌓는 대신, 행복한 일을 했다. 자유의 특권이다.
whoru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582/
부정과 긍정
부정과 긍정의 기묘한 순환고리. 김자유는 지문을 날인해 주민등록증 만드는 일을 부정했다.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은 2000년대 초반 시작된 정보인권 운동이다. 국가가 개인의 생체정보를 과도하게 쥐고 통제하는 데 반발한다. 주민등록증 없는 삶은 고생스러워 보인다. “가방에 항상 기한 지난 청소년증을 가지고 다녔고요, 학교장이 발급한 생활기록부도 가지고 다녔어요. 주민증 없이 신분 증명이 가능하다고 해석될 법한 법규칙 조항도 가지고 다니고요.” 그런 걸 주민증 대신 주섬주섬 꺼낼 때? “‘이 사람은 뭐지?’ 하는 눈으로 보죠.” 창업에 이르러 행정 업무를 하자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지문 날인 거부운동을 그쳤다. 수고했고, 실패했다. 경험만은 긍정한다. “많은 걸 느끼게 돼요. 나는 분명히 그들 눈앞에 존재해요. 그런데 지문이 아니면 내가 나임을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 참 이상한 거예요.”
주거공동체 ‘빈집’은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부정한다. 집과 생활의 기반이 되는 물건을 공동으로 나눠 쓴다. 저렴하다. 누구든 들어와 살 수 있도록 열어뒀다. 김자유는 5년쯤 여기 살았다. 활동가, 직장인, 아르바이트노동자, 일용직노동자… 다양한 이들이 한데 부대꼈는데, 좋았단다. “정말 성숙한 민주주의가 필요한 일이에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힘들죠. 사람들이 나와 얼마큼 다른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것 자체가 소통에서 다른 태도를 지닐 수 있게 해줘요.” 당연한 것을 부정한 뒤 겪은 경험을 긍정하는 기묘한 긍정왕은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다른 자리에 닿았다. 배울 수 있었다. 변할 수 있었다.
추가 질문을 일요일에 전했다. 전자우편을 보냈다. 따로 전화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바로 답장을 달라는 건 아니었다. 일요일은 자유로워야 할 주말 아닌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답변이 왔다. 이름에 얽힌 그의 농담을 떠올렸다.
“나도, 세상도 자유로우면 좋겠어요.” “자유는 넓고 추상적이지만,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단어예요.” “그런데 친구들은 너는 김자유가 아니라 김속박이다, 그래요.”
덧붙이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우리는 날씨마저 기막히게 좋은 휴일, 그의 일터에서 마주앉아 삶 얘기, 일 얘기를 하고 있다. 사람 없는 일터의 고요가 싸늘하다. “그래도, 지향점은 자유니까요”라고 김자유가 덧붙였는데 얼마간 변명이 될지 모르겠다. 그한테는 일 하나하나 꼼꼼히 잘해내려는 태도가 뚝뚝 묻어났다.
이쯤 발을 빼기로 한다. 나는 주말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이나, 또한 주말 추가 질문을 전자우편으로 보낸 것 등을 일로 느끼지 않았다. 즐거웠다. 잇속(흥미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기쁨, 묵은 질문에 답을 찾는 쾌감)도 충분히 챙겼다. 그러므로 그와 만나는 동안 나는 자유로웠다. 그한테 역시, 이 인터뷰가 자유 시간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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