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하사의 비보를 듣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분이 있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2020년 그분과 대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자녀가 정체성 문제로 한참 고민하던 무렵 그분은 아침에 자녀의 방문에 노크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하셨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고 한다. 아이가 별일 없이 자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일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사의 고비를 넘어본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이가 처한 현존의 위기 앞에 다른 모든 욕심과 바람을 내려놓고 딱 하나 남는 마음, 그것이 무엇보다 당신이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은 현존 앞에 다른 모든 욕심을 내려놓게 한다. 그리고 그 욕심의 자리를 감사로 채워준다.
내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숨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 그것보다 더 기쁜 행복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당연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숨소리가 바로 사랑하는 이가 내 곁에 현존한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숨 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는 말이다.
누군가에겐 ‘안녕’이란 말이 너무나 당연할 테다. 간절히 빌고 말 것도 없이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안녕’만큼 살 떨리는 살얼음판 같은 말이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가 말한 것처럼 ‘위험사회’라고 했을 때 위험은 전혀 공평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위험은 계급에 따라,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그리고 성정체성 같은 정체성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돼 있다. 따라서 안녕은 누군가에게 공기처럼 주어지는 것일 때, 다른 누군가에겐 하루하루 겨우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안녕’이 하루하루 겨우 주어지는 사람에게 세상은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전쟁터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것이 생명의 위협이다. 지금 연이어 벌어지는 성소수자들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이 세상이 존재를 둘러싼 끔찍한 전쟁터라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누구인지 드러났을 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존재함의 정당성’을 묻는 말들, 그 질문이 사방에서 사정없이 날아오는 총알들이다. 그저 존재함으로 다른 이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존재함의 정당성이 끊임없이 질문될 때 그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난스럽게 드러내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트랜스젠더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바란다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변 하사가 자신을 밝히지 않고 계속 군에 남을 수 있었는가. 오히려 그가 바란 게 바로 이것 아닌가. 수술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유난스럽게’ 보지 말고 자기가 계속 군인으로 있게 해달라는 것 말이다.
21세기 씨가 말라버린 소명의식변 하사는 성적 정체성과는 별도로 군인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가 처음 기자회견을 하던 날 그의 말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감탄하며 들었다. 직업을 대하는 요즘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과 달리 그의 말에는 군인이란 직업에 ‘소명’의식이 있었다. 자기 자리가 거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바란 건, 그의 성정체성에 세상이 유난 떨지 말고 자기 자리에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영어로 소명은 ‘calling’이다. 우리말로 ‘부르심’이란 뜻이다. 말에서 느껴지듯이 원래 종교적 의미로 쓰였다. 나라는 개인의 의지나 취향과는 별개로 모든 인간은 신에게서 부르심을 받는 존재다. 신은 자신의 구원 사업을 위해 사람들을 안배하고 그 각각에 맞게 부른다. 우리는 거기에 응답한다. 소명에서 사람은 ‘응답’으로 주체가 된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소명은 더 이상 신이 부르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정치공동체, 즉 나라(국가가 아니라)다. 우리가 흔히 ‘나라의 부르심’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라가 부른다. 나라라고 부르는 정치공동체가 자기를 실현해가는 길, 그 길에 사람들을 부르고 사람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큰 이야기에 동참하게 된다. 이 큰 이야기를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 나라가 부르고 역사가 부르며 사람은 그 부름에 응답할 때 모두가 만들어가는 역사라는 큰 이야기에 동참하는 주체로서 삶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 부르심이 제대로 된 부르심인지 아니면 반사회적 유혹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나치가 독일 시민들을 불렀을 때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나라의 부르심이라 믿고 응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행위임을 나중에야 깨닫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기에 ‘나라’와 ‘역사’의 부르심이라는 말만큼 또 위험한 말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이것이 진짜 역사의 부름인지 아니면 사기인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법정에 선다. 그것이 ‘양심’이다. 양심의 부르심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소명의식이 되는 것이다.
변 하사의 기자회견에서 나는 21세기에 와서 씨가 말라버린 이 ‘소명의식’의 소리를 들으며 놀라고 감탄했다. 대부분 직업은 소명의식과 상관없이 돈을 벌거나 출세하거나 명예를 유지하는 것 정도로 여긴다.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부터 군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가르치는 일부터 공무를 수행하는 것까지 그 일을 소명으로 느끼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어졌다. 소명의식이 없으니 직업윤리가 제대로 작동할 리도 없다. 곳곳에서 직업과 관련된 문제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시대에 다른 곳도 아닌 군대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충실히 응답하려는 사람을 본다는 건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가 군인으로 산다면 적어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업무 역량을 향상하려 노력하며, 동시에 군 내부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혹여 군의 명예를 실추하는 부당한 요구가 있을 때 군을 사랑하는 사람이 군을 위해 그 부당한 요구에 맞서 고초를 겪는 일을 감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에 무조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군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지 않은가. 나는 무엇보다 군이 자기들의 조직에 이런 멋진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군이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변 하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많은 트랜스젠더나 다른 소수자는 자신들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 정체성을 감추고 사는 굴욕을 감수한다. 특히 트랜스젠더는 직업 선택에서 많은 제약을 당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트랜스젠더’ 하면 떠오르는 몇몇 직업을 먹고살기 위해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소명’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사회를 위해 분명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쓰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가혹하게 내쳐진다.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 소명이 짓밟히고, 소명에 충실하려면 자신의 정체성을 외면해야 한다.
변 하사는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강요한 이 숙명에 소명으로 맞선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야기에 많은 소수자가 자신들도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마음을 담았다. 맞다. 이는 21세기에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노예 해방’ 운동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상투적 존재로만 살아가기를 강요하고 거기에 맞설 때 안녕할 수 없는 ‘숙명’. 안녕과 소명을 박탈당한 이 노예의 숙명에서 해방해 정치공동체를 가지고 각자의 양심에 비춰 소명에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노예 해방 말이다.
우리 마음을 비추던 해방의 별 하나를 잃었다. 별이 떨어진 뒤 이 칠흑 같은 어둠에서 다시 숙명의 힘을 느끼며 절망한다. 그래서 더욱더 서로의 안녕을 염려한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숙명의 힘에 또 누군가가 바스러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숨 쉬고 숨소리를 들을 때다. 아침에 아이의 방문을 열며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 부모 모임의 어머니처럼 말이다. 내가 숨을 쉬고, 사랑하는 이가 내 숨소리를 들으며 기뻐하고 감사한다. 밤이 깊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숨소리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기쁘게 하고 감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려주자서로의 숨소리를 들려주자. 절망과 탄식의 때인 지금은 서로에게 들려주는 숨소리가 희망의 노래이며 숙명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서로에 대한 맹세이자 해방의 격문이지 않겠는가. 신도 나라도 역사도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를 부르자.
우리 숨결이 서로에게 안녕이고 축복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를 축복하는 것도 저주받고 단죄되는 이 시대에 나와 당신의 안녕을 빕니다. 그 누구보다 소명의식이 빛났던 군인, 변희수 하사의 안식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엄기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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