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11일, 짧은 언론 기사가 하나 떴다. 경기도 평택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지적장애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중국 동포 정아무개(35)씨가 구속돼 검찰에 넘겨졌다고 했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근무하던 정씨는 그해 3월8일 아침 6시10분, 지적장애 1급인 김아무개(38)씨가 칭얼대자 그의 머리를 손과 발로 여러 차례 때렸다. 김씨는 충남 천안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1일 만인 3월19일 숨졌다. 정씨는 상해치사와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1월 수원지법 평택지원 형사1부(재판장 김세용)가 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는 또 다른 짧은 기사가 보도됐다.
짧은 기사는 의문을 남긴다.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 이미 시설에서 보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과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시설에서 만날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장애인 활동지원사인 정씨는 평택 장애인거주시설에서 근무했고, 그 시설 거주자인 김씨를 돌봤으며, 김씨를 수차례 폭행해 숨지게 했다.
<한겨레21>은 사건 발생 장소인 ‘시설’에 주목했다. 인근 마을로부터 거리가 있는, 송전탑 아래 위치한 이 외진 시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피해자 가족과 그들의 변호인에게서 가해자 정씨의 수사·재판 기록 650여 쪽을 입수했다. 이 기록에는 정씨가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 동료 활동지원사, 시설 원장의 진술이 담겨 있었다. 피해자가 폭행당해 병원으로 실려간, 급박했던 그날의 기록도 보였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에게서 보건복지부, 경기도 평택시·시흥시·안산시, 경기도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서 조사한 자료도 확보했다.
모두 1천여 쪽에 이르는 이 기록을 살펴보니, 시설에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피해자를 숨지게 했던 활동지원사 뒤에는 시설 원장, 지방자치단체, 정부가 숨어 있었다. 현재 원장 부부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수집한 기록에 근거해 피해자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시설, 시설을 둘러싼 국가의 행적을 역추적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_편집자주
“수십 년 세월을 골방에 갇혀 시설에 처박혀, 차별과 억압 피눈물 속에 살아온 동지여…”
장애인권운동 현장에서 많이 부르는 <장애인차별철폐 투쟁가>의 첫 소절이다. 한국 사회에는 장애인을 지역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시설이 전국 곳곳에 있고, 그곳에서 여전히 장애인 수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 관련 ‘시설’에는 장애인복지관과 주간보호센터 등 집에 거주하며 지역사회에서 이용하는 시설도 있지만, 통상 시설이라고 하면 ‘거주시설’을 가리킨다. 장애인권 활동가들은 거주시설이라는 법적 용어보다 ‘수용시설’이란 용어를 더 많이 쓴다. 그 말이 시설의 성격을 좀더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실시한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생활인 실태조사’를 보면, 장애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입소한 비율은 14.3%에 그쳤다. ‘스스로 입소를 결정했다’고 응답한 이들 역시 가족에게 부담되기 싫고, 집에 혼자 있는 것이 힘들거나, 가족 안에서 여러 갈등으로 인해 시설로 밀려온 경우였다. 시설에서 일상은 개인의 기본적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이다. 예컨대 기상·취침 시간과 식사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경우가 각각 응답자의 55%, 75.4%였다. 현대사회에서 필수품이 된 휴대전화를 쓰지 못하는 생활인이 71%, 자신의 통장조차 타인이 관리하는 이가 61.7%였다. 또한 응답자의 절반 이상(58%)이 10년 이상 시설에서 생활했고, 4명 중 1명은 20년 이상이라고 답했다. 장애인권운동에서 시설을 ‘형기 없는 감옥’이라 부르는 게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한국에서 장애인시설을 비롯한 근대적 수용시설은 전후 구호사업의 하나로 생겨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부상자·무연고자·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필요했고, 대부분 구호사업은 외국의 원조단체나 선교단체에 의존해 이뤄졌다. 이들이 세운 고아원이나 부랑인을 위한 생활시설이 우리나라 수용시설의 초기 물적 기반을 형성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이 단체들이 대부분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그들이 보유했던 자원은 지역의 토착 유지나 종교단체에 넘어갔다. 정부는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을 제정해 사회복지법인 제도를 마련하고, 민간 자원을 활용한 수용시설 정책을 펴게 된다. 장애인 역시 이런 시설로 편입돼갔고,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면서 장애인은 수용시설의 가장 주요한 대상이 된다.
중증장애인이 시설에서 사는 것이, 비장애인 중심 주류 사회에는 좋은 일일지 모른다. 비장애인 처지에서 시설은 비용과 책임을 최소화하며 장애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최악의 시설과 차악의 시설은 있을지언정, 인권이 보장되는 좋은 시설이란 없다. 자본 축적을 기본으로 하는 기업에서 ‘착취’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환상이듯, 통제적 권력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시설에서 ‘인권침해’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 역시 환상이다. 자신의 일상을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통제받는 삶, 그 자체가 인권침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발적 동의에 따른 입소가 있기에 시설 역시 장애인 주거권 보장의 한 형태로 존중돼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 그러한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저서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뿌리 깊은 억압들은 모두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억압에 동의하게 만드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데 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설 입소에 동의하는 장애인이 일부 있지만,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봉쇄당했다. 일종의 ‘강제된 동의’(Forced Consent)이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2006년 제정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제19조 ‘자립생활과 지역사회 통합’에서 “이 협약의 당사국은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선택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님을 인정”하며, “장애인은… 특정한 거주 형태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고 규정함으로써 탈시설의 권리를 명문화했다. 대한민국 역시 2009년 1월 이 협약을 비준했지만, 현재 중앙정부 차원의 탈시설 정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누군가는 중증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시설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장애인시설 자체를 없앤 나라도 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장애인시설 거주인 대부분은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이 차지하는데, 1985년 발간된 노르웨이 정부 보고서 ‘발달장애인의 생활 여건’은 “시설에서 발달장애인이 처한 생활 여건은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상황은 활동의 재조직화나 자원 공급 증가에 의해 실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내용과 견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는 1988년 6월 시설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입법 조처, 즉 일명 ‘시설해체법’이 시행됐다. 시설해체법은 장애인의 신규 시설 입소는 1991년 1월1일을 기점으로 종료되고, 기존 시설 생활인들도 1995년 12월31일까지 모두 지역사회에 있는 자신의 주거 공간에서 거주해야 하며, 이에 따른 비용은 모두 중앙정부가 각 자치구에 지원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스웨덴에서도 1990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작업이 시작됐다. 1997년 10월 제정된 ‘특수병원 및 거주시설 폐쇄법’에 따라 1999년 12월31일까지 모든 장애인시설이 폐쇄됐다.
코로나19 사망자 중 시설 거주자 46%이런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한 사회가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갖춘다면 시설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 가입했고,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에는 ‘탈시설 등 지역사회 정착 환경 조성’이 포함됐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 9월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 마련을 정부에 권고했다. 아무런 제도적 뒷받침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시설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institution’은 ‘제도’를 뜻하기도 한다. 요컨대 장애인이 시설에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제도의 문제이지 그들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장애인시설이든 정신요양시설이든 노인요양시설이든, 이런 시설들은 기본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간주된 이들을 적은 비용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서울대 의과대학 김윤 교수는 2020년 3월 <한겨레21>과의 대담에서 이런 시설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은 “감염 측면에선 잠재된 화약고가 전국에 수만 곳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제1304호 참조). 집단 수용시설이 있는 한 감염병은 이를 중심으로 더욱 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피해도 일차적으로 시설에 수용된 이들에게 집중된다. 국제장기돌봄정책네트워크(International Long Term Care Policy Network)가 발표한 ‘케어홈 코로나19 관련 사망률’에 따르면, 전세계 21개국 코로나19 사망자 중 집단시설 거주자가 46%를 차지했다.
이처럼 코로나19 인명 피해가 시설에 집중되고 있기에, 시설 수용 정책에서 중심 대상인 장애인의 피해 규모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영국에선 2020년 3월부터 7월 중순까지 코로나19 사망자 4만6314명 중 장애인이 2만7534명으로 59.5%를 차지했다. 영국 인구에서 장애인 비율이 약 15%임을 고려하면, 장애인의 코로나19 사망률은 비장애인의 약 8.4배에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20년 12월9일 기준 코로나19 사망자 556명 중 장애인이 117명(21%)이었다. 대한민국 인구에서 장애인 비율이 5% 정도인데, 장애인의 코로나19 사망률이 비장애인의 약 5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어쩌면 시설은 싸움의 진정한 대상이 아닐지 모른다. 통합교육을 하려면 특수학교가 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반학교가 변하면서 특수학교 자체가 불필요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꿔야 하는 건, 시설을 필요로 하고 시설을 산출하는 지역사회 자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12월10일 국회의원 68명이 탈시설지원법을 공동 발의했다. 이 법안은 시설에 거주하는 모든 장애인이 10년 안에 탈시설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법의 통과를 위해 장애인운동 진영은 한시적 투쟁 정당인 ‘탈시설장애인당’(drparty.or.kr)을 창당해 활동 중이다. 함께 힘 모아주시고, 연대해주길 요청한다.
김도현 ‘탈시설장애인당’ 당원·<장애학의 도전> 저자
*표지이야기 - 사랑의 집 성진씨의 죽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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