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짧게는 지난 5월부터, 길게는 수년 전부터 논의하고 준비해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신청’이 10만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달성했다. 10만 명의 동의를 받으면 관련 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돼 법 제정을 위한 국회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첫 번째 큰 고비를 무사히 넘었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순간 뭉클해졌다.
사실 준비 단계에서 걱정이 먼저 앞서기도 했다. 연초부터 갑작스럽게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하면서 예전 같은 방식으로 시민들을 직접 만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취지를 알리는 홍보 활동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캠페인과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님을 비롯한 유가족들과 운동본부 활동가들의 언론 인터뷰 등 제한적인 활동만으로 과연 기한 안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우리의 바람은 더없이 간절하고 뜨거웠지만 결과를 섣불리 호언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국민동의청원 10만은 평범한 많은 시민의 지지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우리 뜻을 지지하는 시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사했다.
2018년 1월 동생이 갑작스럽게 ‘과로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후, 평범했던 가족의 일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동생은 유명 인터넷 강의 업체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2년8개월 동안 살인적인 야근과 직장 괴롭힘에 시달렸다. 사고 이후 나는 대책위와 함께 언론에 사건을 폭로하고 회사를 고발했다. 대책위 활동과 정치권, 정부 당국,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는 2018년 7월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했다. 또한 유족과 대책위에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과로를 조장하는 장시간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법정 노동시간 준수와 야근 근절을 약속했고, 법정 노동시간 준수를 위한 근무환경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기로 했다. 기업문화를 개선하고 직원들의 심리치료 및 지원은 물론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결과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다짐했다. 사법 당국은 이를 정상참작해 회사에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올해 3월 정의당이 동생의 회사를 또다시 고발했다. 주 60~7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 과로 관련 정신질환 진료를 받은 직원 수가 2017년과 비교해 2019년 3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포괄임금 악용, 상습적인 임금 체불, 위법한 취업규칙을 고용노동부에 신고하지 않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등 필수 기재 사항을 빠뜨리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고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지난날 회사의 약속은 모두 면피를 위한 쇼에 불과했을 뿐 개선은 없었다.
공짜 노동, 과로사에도 회사는 여전히 불법행위2019년 10월 근로복지공단은 동생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동생의 죽음이 개인 잘못이 아닌 회사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 같아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다가도, 또 한편으론 동생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데 모두 사후 약방문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다. 동생의 죽음 이후 나는 이전에 미처 몰랐던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공짜 야근을 조장하는 포괄임금제,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산재 피해 입증 책임을 전가하는 산재신청제도, 형식적인 근로감독, 회사가 법을 어겨 얻는 것이 법을 위반해서 입는 손실(처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매출 증대를 위해 법 위반을 당연시하는 현실이 바로 그런 문제점이다.
한국은 아직 과로사·과로자살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고, 공식 통계 자료도 없다. 그러나 높은 자살률과 최장 노동시간으로 악명 높은 한국 사회에서 과로사와 과로자살은 단순히 개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명백한 사회문제다. 공짜 노동, 과로사, 주 52시간을 넘기는 야근이 만연한 노동환경에 대해 모두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회사는 보란 듯이 여전히 불법을 저지른다. 관리·감독을 해야 할 정부기관은 이를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사법기관은 솜방망이 처벌로 불법을 저지른 기업에 면죄부를 준다. 사업장의 90%가 법을 어기고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재범률은 97%에 이른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로 비대면 소비가 늘고 물량이 모두 배달에 집중되면서 택배노동자 14명이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 방역 활동에 나선 일선 공무원들 역시 수개월째 이어지는 과로 속에 3명이 사망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터에서 노동자가 다치고 죽는 사고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반복되는 일터에서의 죽음을 멈추게 하려면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는 사고가 발생한 경우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
하지만 국민동의청원 10만 달성의 첫 고비를 넘긴 이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12월9일 끝난 정기국회 본회의 상정은커녕 소위원회 안건으로조차 채택되지 못했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에서 단 15분 논의된 것이 전부였다.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진 더불어민주당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저울질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뒤늦게 이른 시일 안에 법을 제정하겠노라 약속했지만, 말만 앞설 뿐 여전히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 12월10일 결국 보다 못한 김미숙님과 고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님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를 외치며 서울 여의도동 국회 본관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농성을 시작한 날은 김용균의 2주기 기일이었다. 슬픔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피해자를 거리의 투사로 내모는 우리 사회는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가.
이 글을 쓰는 12월13일 현재, 서울에는 종일 눈이 내렸다. 뉴스에선 내일부터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친다는 일기예보가 들려온다. 이 추위에 차디찬 바깥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꽁꽁 얼어붙은 채 단식농성을 이어가느라 행여 몸이 더 상하시지는 않을까 걱정이 깊어진다. 연일 심각해지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여느 때 같으면 송년 분위기로 인파가 가득했을 세밑 주말의 도심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이제 약 보름 뒤면 2021년이 된다. 새해에는 더는 일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번 임시국회 기간에 반드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끝까지 관심을 기울여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향미 에스티유니타스 과로자살 웹디자이너
고 장민순씨 언니
*장향미씨는 과로자살 노동자의 유족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민청원 운동에 대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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