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후보 결단에서 확정까지 숨막힌 순간들… 고비마다 비장의 승부수 던지며 사선 돌파
‘바보 노무현’에서 ‘승부사 노무현’으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별명이 바뀔 차례다.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과정에서 ‘크게 던져 크게 얻는’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는 모든 것을 던졌고, 위험을 감수한 만큼 크게 얻었다.
11월3일 국민경선을 통한 단일화 제의가 그랬고, 일주일 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제의 역시 큰 승부수였다. 특히 노 후보는 11월18일 이후 단일화 무산의 위기가 높아질 때, 고비마다 내린 결단으로 ‘단일후보’라는 최대의 월척을 낚았다.
던지기만 했을 뿐 정작 손에 쥐는 것 없어 ‘바보 노무현’으로 불린 시절에 비하면 큰 차이다. 또 그의 전리품이 면밀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단일화 요구에 충실히 복무한 결과로 얻은 것이라는 점에서 남달라 보인다. 노 후보의 승부수를 날짜별로 재구성해본다.
#11월18일~20일
‘판’을 키우는 역전극 카드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러브샷을 한 지 이틀 만인 11월18일 국민통합21은 “민주당이 여론조사 방식을 언론에 유출했다”고 비판하며 전면 재협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언론유출은 핑계일 뿐 사실은 이날 아침 조간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지지도 역전극 때문이었다는 것이 압도적 관측이다. 5개 여론조사 가운데 4곳에서 노 후보가 정 후보를 제치며, 서너달 만에 처음으로 2위에 올라선 것이다.
이때 노 후보는 국민통합21의 항의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통합21의 사과 요구에 대해 노 후보는 “사리에 맞아야 사과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유출책임이 없는데 무슨 사과냐. 정 후보가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라며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승부의 맥을 짚어보며 “며칠 더 지켜보자. 지금처럼 팽팽한 긴장관계가 좀더 지속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노 후보는 정 후보와 신경전을 펼치며 ‘판’을 더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판이 깨지는 상황은 피하면서도 최대한 버텨, 관전자들의 긴장도를 극도로 높이자는 의도다. 노 후보는 11월 초 국회 정책위원들을 비롯한 당직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드라마틱한 대역전극을 펼쳐보이겠다”고 장담했다. 노 후보로서는 자신이 구상하는 역전극에 극적 긴장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이틀을 버티다 20일 신계륜 실장이 사과를 한다. 정 후보가 김영배·최명헌 등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과 만나 4자연대를 논의하는 등 단일화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갈 태세를 보이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1일 아침 홍은동
다 잡은 월척을 잃을 수도 있건만…
두 당 협상단은 20일 밤부터 홍은동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에서 마라톤 협상을 벌인 결과 21일 새벽 6시30분께 어렵사리 합의안을 만들어낸다. 합의의 뼈대는 11월17일 이철·이해찬 두 협상단장이 만든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민석 전 의원은 이철 협상단장의 인책론을 제기하며 대신 협상에 나섰지만 애초 합의안이 합리적 선에서 찾아낸 절충안인 만큼 더 진전시키지는 못했다.
여론조사 설문 문항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 단일후보로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로 정해졌다. 나중에 이 문항이 바뀌자 이해찬 의원은 “원안대로라면 우리가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게임인데…”라고 아쉬워한 문항이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역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도 “최근 2주일간 조사한 이회창 후보 지지도 결과의 최저치 오차범위 하한선”으로 정해졌다.
협상단은 오전 9시 기자회견을 준비하느라 면도도 하고 옷도 새로 갈아입었다. 호텔을 막 떠나기 직전 김 전 의원이 신 실장에게 “그래도 후보한테 연락은 해야죠”라고 묻는다.
신 실장은 노 후보로부터 “수고했다”는 짤막한 답변으로 협상안을 추인받았으나, 김 전 의원과 정 후보와의 전화통화는 길어졌다.
정 후보는 김 전 의원에게 3가지 사항의 수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전장치에서 최저치를 평균치로 바꿀 것과 여론조사 설문 문항에 ‘경쟁력’이라는 단어를 꼭 넣을 것, 그리고 여론조사 시점을 TV토론 직후인 토요일 낮 1시부터 실시할 것 등이다. 조사 시점은 나중에 의뢰기관인 갤럽이 돌연 “부담이 커 못하겠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다시 조정됐지만, 토요일 1시면 남편은 직장에 나가 없고 주부들이 주로 있는 시간이라 정 후보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협상은 다시 이어졌으나, 장소가 노출되면서 평창동 올림피아 호텔로 자리를 옮긴다.
#21일 아침 민주당사
지지율 뒤져도 계속된 양보
노 후보는 이때 여의도 민주당사 8층 후보실에서 협상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선대위원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정 후보의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선대위 한 관계자는 며칠간 여론조사 결과 수치를 들이대며 극력 반대했다. 그는 “설문 문항에 절대로 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된다. 경쟁력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마치 이회창 대 노무현, 이회창 대 정몽준의 양자대결과 같은 결과는 낳는다. 그러면 질 확률이 90%고 낮게 잡아도 70%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가 들이민 여론조사는 17~19일에 한 6가지로, 단순 지지도에서는 노 후보가 모두 앞섰지만, 이회창 후보에 맞설 경쟁력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적게는 2.1%, 많게는 6.5%까지 모두 노 후보가 지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노 후보는 “문항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 문항 표현 한두개로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며 실무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 참모는 노 후보를 독대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참모는 “아무리 단일화가 중요해도 노 후보가 지지자들을 정 후보에게 양도할 권리는 없다. 노 후보는 평생 뼈빠지게 모은 정치 자산이지만, 정 후보는 월드컵 바람 한번으로 모은 자산이다. 같은 가치로 평가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단일화 협상이 깨지면 99 대 1로 한쪽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잘해봐야 6 대 4 정도로 나눠질 것이다. 게다가 단일화 실패에 따른 상실감으로 선거판에서 힘이 모아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패하는 김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신계륜 실장은 점심 무렵, 홍은동 호텔에서 평창동 협상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노 후보에게 들렀고, 노 후보로부터 “설문 문항에 경쟁력이라는 말을 넣어도 좋다”라는 허가를 받았다.
#21일 밤 평창동
“노무현은 내가 죽여버리겠어”
신계륜 실장은 협상장소로 돌아오자마자 국민통합21쪽에 설문 문항 변경이라는 선물을 준다. 이에 따라 문항은 애초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에서 “이회창 후보에 경쟁할”로 바뀐다. 신 실장은 이쯤에서 협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국민통합21의 목적이 설문 변경이지, 역선택 방지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국민통합21 협상단의 태도가 완강했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최근 2주간 조사 평균보다 낮게 나오면 조사 결과를 통째로 무효화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단일화 효과로 이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라 유효한 여론조사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정 후보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단일화를 거부하기 위한 불복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실제로 국민통합21 핵심 관계자는 “최근 이틀 사이에 측근들이 ‘후보단일화 불가론’, ‘여론조사의 비과학성’, ‘역선택 가능성’, ‘설문 내용 불공정성’ 등을 주제로 하는 문건을 수십여개나 후보에게 올려 후보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말했다.
국민통합21 협상단이 합의문 작성에 들어가자 신 실장은 급히 노 후보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노 후보는 “선대위의 결정에 따르라”고 했고, 민주당 선대위는 밤 8시45분 긴급회의 끝에 “무효화될 위험성이 너무 높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에 따라 신 실장은 국민통합21쪽에 “오늘은 안 되겠다”고 협상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김 전 의원은 협상 테이블을 발로 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노무현은 내가 죽여버리겠어”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김 전 의원은 나중에 신 실장 등에게 “그때 내가 너무 격했다”고 사과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양쪽 사이에 팬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일 밤 대학로 냉면집
그것은 지는 게임이었는데…
노 후보는 염동연 정무특보와 단둘이 늦은 저녁을 들었다. 대학로에서 문화예술인들과 만나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한곡 뽑은 직후지만,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염 특보는 “정 후보의 요구를 받지 마십시오. 단일화합의를 깬 책임은 정 후보에게 돌아가는 만큼 3자대결해도 승산이 있습니다. 설사 지더라도 야당하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각종 통계자료와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내용 등도 인용했다. 노 후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면에 몇번 손을 대더니 반도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음날 아침, 염 특보의 집으로 노 후보의 부인 권양숙씨가 전화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노 후보가 어젯밤 집에 들어와서 아침에 나갈 때까지 단 한마디를 안 해요. 답답해 죽겠어요.” 또 한번 승부수를 띄우기 위한 노 후보의 장고인 셈이었다.
승부가 끝난 뒤 염 특보는 “그때 이미 노 후보는 마음을 굳혔나 봅니다. 여론조사가 무효가 되더라도, 정 후보와 지지도 차이를 벌려놓으면 국민이 노 후보로 표를 몰아주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라고 해석했다.
#22일 민주당사
패배마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노 후보는 이날 아침 긴급기자 회견을 열어 “TV토론을 전제로 정 후보가 요구한 모든 사항을 받아들이겠다”고 전격적으로 밝힌다. 불리한 상황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TV토론으로 본 것이다.
노 후보는 이날 오랜만에 안희정·이광재 두 비서와 점심을 함께한다. 노 후보가 초선의원 때부터 함께 일해온 친동생 같은 후배들이다. 안씨는 “지난 10년 노 후보와 함께 해온 세월이 행복했습니다”고 말했고, 이씨는 “솔로몬왕의 얘기에서 나오는 진짜 아기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 역사는 알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노 후보는 “나 아니었으면 돈도 많이 벌고, 골프도 하고 그랬을 텐데, 나 때문에 고생만 했다”고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했다. 고별의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숙연한 분위기였다. 노 후보나 두 비서 모두 패배를 받아들일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23일 밤~24일 새벽
무효화 조항 안전장치 풀어
노 후보는 신계륜 비서실장을 불러 역선택을 막는다는 이유로 만들어놓은 ‘안전장치’를 풀어볼 것을 지시한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여론조사가 무효화될 가능성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신 실장은 노 후보에게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가 질 수도 있습니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에게 뒤질 경우 노 후보가 거꾸로 안전장치를 방패삼아 단일화를 피해갈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노 후보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23일 밤 신 실장은 김민석 전 의원을 만나 노 후보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의외로 무효화 조항은 쉽게 완화됐다.
“2001년 매출액 기준으로 15위 안에 드는 여론조사 기관 가운데 유력한 방송사·신문사와 계약을 맺어 조사한 여론조사 수치 중 가장 낮은 수치 이하로 나올 때 무효화하기로 했다”는 것이 신 실장의 설명이다. 그럴 경우 여론조사가 유효화되는 커트라인은 30.4%다.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이 아래로 나오면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전의 2주간 평균치인 35%가량에 비하면 커트라인을 5%포인트 낮춘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완화는 노 후보가 단일후보로 되는 데 ‘마지막 카드’ 역할을 해냈다.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나와 무효처리됐으나, 리서치 앤드 리서치(R&R) 여론조사는 커트라인을 겨우 넘긴 32.1%였기 때문이다.
글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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