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한 달 전 2019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 베이징에는 폭설이 내렸다. 밤새도록 쏟아지는 눈을 보며 동네에 사는 몇몇 지인이 만나 조촐한 송년모임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때맞춰 내리는 축복과도 같은 폭설에 흠뻑 만취했다. 베이징은 ‘밤의 밑바닥이 하얘지는,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서 인용)이 되었다.
그날 밤, 중국 소식에 밝은 한 지인이 자기도 ‘들은 얘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후베이에서 괴질이 돌고 있대요. 2003년 사스와 비슷한 증상이라 하고 상당히 많이 퍼지고 있다고 해요.” 우리는 모두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사스 때처럼 감염병을 은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름 중국 정부에 최소한의 신뢰를 가졌다.
지난 일요일 아이들은 후베이에 사는 중국 할머니네 집으로 설을 쇠러 갔다. 불안했지만 손주들을 보고 싶어 하는 두 노인네 애간장을 태울 것 같아서 아이들을 기차에 태워 보냈다. 마음 한편으로 ‘설마 감염병을 감추고 설날 대규모 이동을 허락했겠느냐’는 ‘상식적인’ 믿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역대급 ‘반전’이 일어났다. 중국 호흡기질환 감염병 권위자이자 사스의 영웅 중난산 공정원 원사가 “중국 우한에서 사람 간 전이되는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격 발표했다. 1월23일 중국 정부도 소문으로만 떠돌던 괴질의 실체가 사스 같은 사람 간 전이 감염병이라고 발표했다.
곧바로 우한의 전격 봉쇄가 결정됐고, 오늘은 아이들이 가 있는 후베이의 거의 모든 지역이 봉쇄된다고 예고됐다. 그저께 밤부터 어제 온종일 피 말리는 아이들 구출 작전이 시작됐다. 후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모든 기차표와 비행기표가 순식간에 동났고, 한국돈으로 100만원이 넘는 일등급 좌석도 깡그리 매진됐다. 다행히 어제 오후, 누가 물린 비행기 좌석표를 로켓의 속도로 샀다. 아이들은 봉쇄 몇 시간 전에 기적적으로 베이징으로 무사귀환했다. 새벽 아이들을 만나러 간 베이징 수도 공항은 아수라장이었다.
1790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부근의 작은 왕국 사부아의 장교였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불법 결투를 벌이다 재판에 회부돼 ‘42일간 자기 방에 감금’이란 벌을 받는다. 그 뒤 그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인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썼다. 42일간 자기 방에서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여행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할 골방조차 없는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라면 혹 모르겠으나 그런 골방만 있으면 우리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게 다 갖춰진 셈이다. (…)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세상 모든 사람이여, 나와 함께 떠나자!”
일기의 그날만 해도 그 상황이 2020년 1년 내내 지속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코로나19가 세상을 삼키고 ‘비접촉 대면 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도 ‘자기 방으로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메스트르의 자기 방 여행은 42일로 끝났지만, 우리 여행은 1년 내내 계속됐고 내년에도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은둔할 골방조차 없는 비참한 처지의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자기만의 저택이나 외딴섬에 들어가서 ‘호화로운 고독’을 즐기지만,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돈 한 푼 들지 않는 ‘자기 방 여행’도 즐기지 못한다.
앞집에 몇 명이 함께 세들어 살던 청년들은 ‘감염 위험원’이라는 이유로 베이징 외곽으로 쫓겨났다. 이집 저집 가사도우미를 하며 병든 남편과 대학 다니는 아들을 수발하던 왕씨 아줌마도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앱’ 업체에 취업했지만, 졸지에 거리로 쏟아져나온 수많은 비슷한 처지의 실업자와 벌이는 경쟁에 지쳐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지 모르겠다.
발원지는 가장 안전한 국가로코로나19를 핑계로 모든 시설과 장소에 ‘안면인식’을 도입한 중국에서는 이제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시시각각 체크되고, 구직자는 온라인에서 ‘리나’(Lina)라는 인공지능 면접관 앞에서 면접을 본다. 리나의 눈에 들려면 항상 웃어야 하고, 리나가 좋아하는 얼굴 각도를 만드는 게 유행이 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코로나19 발원지임에도 가장 ‘선제적으로’ 방역을 실시한 중국은 지금 코로나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 언론에선 연일 ‘중국식 모범 방역 모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전염병 선진국’이 된 것처럼 자화자찬한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는 철저하게 제압되고 가둬진다.
러시아의 전제군주 니콜라스 1세의 폭정을 보다 못해 한 신하가 “폐하, 이런 폭정을 하시면 국민 여론이 안 좋습니다”라고 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니콜라스 1세가 침을 퉤 뱉은 뒤 발로 자근자근 밟으며 “이게 바로 여론의 운명이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했다간 ‘침’ 같은 운명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를 처음 폭로했던 리원량 의사는 끝내 죽었고, 인터넷에 ‘우한일기’를 써서 실시간으로 우한의 상황을 알렸던 작가 팡팡은 ‘매국노’라는 욕을 먹었다. 중국이 내부적으로 ‘코로나 민족주의’ 성벽을 쌓았고, 전세계에 ‘혐중 정서’가 코로나 못지않게 확산되고 있다.
며칠 전 베이징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문득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가 생각났다. 그때는 온 베이징이 폭설로 새하얗게 뒤덮여, 우리는 마냥 아름답고 행복한 2020년을 상상하고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설국> 첫 문장). 2021년 우리는 과연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한겨레21>에 ‘북경만보’를 연재하는 박현숙씨는 코로나19 확산 초기 중국 상황을 통렬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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