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태일이 엄마”를 찾던 이웃 종철이 아버지가 조용하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이소선은 조용히 전태일을 불렀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너도 잠을 제대로 못 잤구나.”
“그렇죠. 벌써 50년, 이곳에서 저는 기다렸어요. 언젠가 내가 굴리다 다 못 굴린 그 덩이를 다 굴렸다는 소식을 듣기를 말이죠. 노동자들이 일어나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너무 기뻤어요. 해마다 내 무덤 앞에 와서 환한 얼굴로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던 노동자들이 기억나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기운이 없어 보여요. 다들 힘들다고 해요.”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전태일이 먼저 입을 뗐다.
“어머니, 제가 세상을 뜬 뒤 어머니가 저와의 약속을 지키려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서 미안했어요. 장남으로 어려운 살림 꾸려가는 어머니를 돕지도 못하면서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고 떠나면서도 제가 못다 한 일을 꼭 이뤄달라고 했는데… 어머니를 믿었어요.”
“태일아, 네가 피를 토하면서도 약속하라고 했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냐, 그러면 사람이 아니지. 그 약속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어. 그러다가 세상을 봤고 큰 공부를 했지. 너를 여기 묻고 집에 가서 며칠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그분이 내 손을 잡고는 전태일은 예수처럼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거다. 그러니까 전태일이 수많은 전태일로 부활할 거라고 했어.”
“누가 그러더라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 곁에 누웠을 때 마흔한 살에 태일이를 잃고 꼭 41년을 더 사시다 가셨다고, 그 41년 동안 250번을 잡혀갔다고. 어머니가 당한 고초, 너무 힘들었을 텐데. 어머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살도 오래전에 다 녹아버리고 몸이 없으니 어머니를 안아주지 못했어요. 그게 슬펐어요.”
“경찰들에게 둘러싸이고, 중앙정보부에도 끌려가고, ‘빨갱이라고 불라’고 매질당할 때도 나는 이를 악물었어. 나는 태일이 엄마다. 목숨까지 버린 자식 앞에서 비겁하면 안 되잖아.”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태일이 밝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삼이가 어머니 비석 만드는 날 그랬지요. 검은 바탕 비석에 어머니가 마이크 잡은 사진을 새겨 넣은 걸 보고는 어머니가 여기 모란공원 사람들하고 매일 밤 집회할 거라고 말이죠. 참, 어머니는 사람들 웃기고 울리고 너무 말씀을 재밌게 하세요.”
“태일아, 내가 뭔 말을 잘하냐. 배운 것도 없고 무식쟁이 할머니인데…. 내가 싸우면서 겪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사람들이 박수 치고 좋아하더라. 그럴 때 꼭 한마디 부탁했어. 노동자가 단결하면 두려울 게 없다, 절대 갈라지지 말고 하나가 돼서 싸워야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태일이 바라던 세상이 온다고 말이지.”
“맞아요. 모여야 힘이 나죠. 저는 그게 사랑인 거 같아요. 우리가 사는 이유가 그런 건데…. 어, 저분이 이 아침에 벌써 오시네.”
이제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어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는 때였다. 김미숙씨가 박래전을 지나서 성유보를 지나서 노란 자전거 탄 김용균 앞에 멈춘다.
“애고, 날이 밝기도 전에 용균이 엄마가 왔네. 저 엄마가 밤에 잠도 못 잘 거야. 저 엄마를 보면 내 생각이 나. 용균이도 너처럼 꽃다운 나이에 죽었잖아. 두 동강이 난 아들을 봤잖아. 얼마나 끔찍했을까. 저 엄마도 나처럼 평생 용균이를 가슴에 안고 살아갈 거야.”
“어머니가 평화시장 노동자들 국수 끓여 먹이면서 노조 만들고, 노동자들 투쟁하는 곳마다 응원해주고, 나중에는 학생들 투쟁하는 데나 재야인사들 투쟁하는 데도 같이 합류해서 싸웠잖아요. 그러다가 의문사한 엄마들, 아버지들하고 의문사 진상 규명하라고 싸우고. 참, 우리 엄마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그게 다 똑같아. 저 사람도 자식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잖아. 그 사람들이 불러서 간 게 아냐. 나는 너하고 같이 간 거야. 얼마나 많은 사람 눈을 감겨줬냐. 그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 목매어 죽고, 분신해서 죽고, 병들어 죽고, 사고당해 죽고…. 죽음의 행렬이었어. 저걸 멈춰야 하는데, 제발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싸우자고 눈물로 호소하고 다녔어.”
“그러니까요. 왜 아직도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게 당연하죠? 우리나라가 경제 대국이고 국민소득도 높다는데 왜 아직도 장시간 노동에다가 저임금으로 사람들 고혈을 쥐어짜는 거죠? 제가 만들고 싶었던 ‘태일피복’, 3천만원이 없어서 포기한 그런 업체가 왜 안 되는 거죠? 근로기준법 지키고 노동조합 활동 보장해주면서도 이윤을 올리는 그런 기업이 왜 안 되는 거죠?”
“가진 사람들이 너무 탐욕스러워. 정치인들도 탐욕을 부리는 이들과 한패야. 그러니까 안 되지. 노동자 알기를 노예나 머슴 부리듯 한다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 없이 마른 수건 짜듯 쥐어짜기만 하다가 버리잖아. 그러니 자꾸 죽지.”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때 내 모든 것을 던져서 먹구름 뒤덮인 하늘에 작은 구멍 하나 낸 거거든요. 그 구멍으로 사람들에게 파란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구멍을 여러 사람이 넓히고 넓혀서 세상 사람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구멍이 다시 좁아지고 있어요. 먹구름 덮인 하늘을 이고 땅에서 서로 싸우며 살 것 같아서 걱정돼요.”
그때다. 사람들이 서리 맞은 풀을 밟고 오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어느새 동쪽 산 위로 해가 많이 올라 있었다. 발소리들은 전태일 앞에 멈추고 깃발을 세운다.
“안 되겠다.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거야. 사람들이 뭔 얘기 하나 잘 들어보자.”
“그래요. 밤에 얘기해요.”
어느새 새들이 날아서 주위에 내려앉는다. 김미숙씨도 와서 노동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전태일과 이소선은 종일 사람들 얘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 앞에서 사람들은 오늘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갈까, 그게 궁금해진다. 오늘은 50년 전 그날이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표지이야기-전태일 50주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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