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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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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한국인은 자살생존자

갈등 안은 채 회복 과정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역사 반복,
‘사회적 심리 부검’이 이뤄져야 제대로 된 애도
등록 2020-07-18 14:03 수정 2020-07-19 12:07
박원순 시장이 남긴 유서. 연합뉴스

박원순 시장이 남긴 유서. 연합뉴스

인권변호사 6년, 시민운동가 16년, 서울시장 9년. 그의 역사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란 말이 제 이름값을 찾아가는 역사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시민운동의 길이기도 했다. 변호사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을 변호했고,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의 호소를 사회 의제로 다듬었다. 행정가이자 정치가인 박원순은 의제를 정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산으로 올라간 7월9일, 모든 것은 ‘과거형’이 돼버렸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슬픔은 ‘성추행 의혹’이라는 길목에서 분노와 좌절, 무기력을 마주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을 변론하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불법으로 가장 먼저 제기하고, 서울시 성평등 정책을 공들여 만들었던 그가 성추행 혐의로 피소당하는 역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공소권 없음’이라는 다섯 글자만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초현실적 시간 속에 ‘자살생존자’로 남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애도와 진실규명, 성찰 사이에서 갈등하고, 반목한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박원순의 역사는 빛이 바랬지만, 그가 실천해온 가치와 철학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간이다.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는 것. 고통의 호소를 의제로, 정책으로 만들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 남겨진 우리가 그와 온전히 작별하기 위해 직시해야 할 과제다. “그는 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슬픔을 딛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는가.”(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박 시장의 글, 책 <박원순이 걷는 길>, 임대식 지음, 2015)_ 편집자 주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해요.”

김아무개(70)씨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채 발견된 7월10일 이후 방송에서 쏟아지는 뉴스를 볼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세 번의 지방선거에서 박 시장에게 표를 던졌다. “공이 큰 분이라 슬프고 속상하다.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리면 어떡하냐. 슬프다가 화가 났다가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직장인 홍아무개(41)씨는 “직장 동료나 가족과 박 시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꺼려진다”고 했다. “의혹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랑 입장이 다른 이들과 부딪히는 게 싫어요.” 트위터·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타임라인은 박 시장의 선택을 두고 반으로 갈라졌다. 자기 생각과 다른 글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이번 기회에 페이스북 친구를 정리한다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고인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

박 시장의 죽음 앞에서 한국 사회와 구성원들은 충격과 슬픔, 죄책감, 분노, 혼란 등 감정의 파도에 휩싸이고 있다. 박 시장의 선택에 대한 입장은 엇갈리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자살생존자’(Suicide Survivor)가 된 것이다. 자살생존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가 생존한 사람을 뜻하는 표현 같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을 잃고 남겨진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앙심리부검센터에서 운영하는 ‘따뜻한 작별’ 누리집을 보면 자살생존자에 가족과 친구, 지인·동료뿐만 아니라 ‘고인에 대한 심리적인 책임감·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도 포함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자살생존자로서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의원이 떠날 때 허하게 뚫려버린 가슴이 다시 아파오네. 남은 생의 기간, 나 역시 가슴에 블랙홀 세 개를 간직하고 살게 될 듯하네.”(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추모글·페이스북)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노회찬 전 의원 때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의 개인적 불가피성을 이해하면서도 나로서는 자살이 곧 그 개인적 곤혹감과 자기 분열감, 그리고 사회정치적 평판과 책임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 페이스북 글)

박 시장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노회찬 전 의원의 이름은 자연스레 소환됐다. 세 사람 모두 이유는 달랐지만 민주·진보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로 비극적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죽음 뒤에 벌어지는 양상도 비슷하다. 자살생존자로 이뤄진 한국 사회가 갈등과 트라우마를 안은 채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역사가 반복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 감정 또는 죄책감은 물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증오와 곧장 연결된다. 다른 한편 자살에 대한 혐오나 공포는 쉬이 노 전 대통령과 그의 팬들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 2012년 대선이나 2013년의 NLL 소동에서 보는 것처럼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간교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이 그 죽음의 후과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려야 한다.”(천정환, <자살론>, 2013)

‘공소권 없음’ 다섯 글자만 남는 죽음

극단적인 선택이 던진 충격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애도의 시간이 지난 뒤 고인에 대한 ‘해석 전쟁’으로 번진다. 망자는 말이 없기에 그 전쟁은 여야 공방이나 진영 간 대결 등 사회 갈등으로 격화될 수밖에 없다. 박 시장의 죽음 뒤 공론장에서 제대로 논의돼야 할 위력과 성폭력이라는 쟁점도 여야 대결로, 세대·젠더 갈등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밝히고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시간이 흐르며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모든 게 덮어져 종결되는 형태는 책임 있는 죽음이 아니다. 의미가 모호한 죽음에 의해 격화되는 정치, 사회 갈등과 ‘공소권 없음’ 다섯 글자만 남는 죽음은 우리 사회에 아무런 교훈을 던지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린다. 죽음으로 매듭짓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들은 소중한 존재를 잃은 자살생존자의 회복을 위해서 ‘심리 부검’(사망자 유족과 전문가의 면담을 통해 사망의 다양한 요인을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겨진 이들이 충격적인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 죄책감과 분노, 고통을 덜고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심리 부검의 목적이다. 중앙심리부검센터는 심리 부검이 “건강한 애도를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트라우마 한국사회> 저자인 심리학자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유명 인사의 극단적 선택은 일반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 선택의 원인과 진실을 밝히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나쁜 선례, 나쁜 신호로 남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극단적 선택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일이 흐지부지되면 후유증이 상당히 남게 된다. 개인의 문제로만 시선을 돌리면 사회가 건강해질 수 없다. 왜 문제가 발생했는가, 재발 방지 대책은 무엇인가 등에 생각이 미쳐야 고인을 제대로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교훈을 얻고 건강해질 수 있다.” ‘사회적 심리 부검’이 제대로 돼야 제대로 애도할 수 있고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

서울시는 7월15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발표했다. 리얼미터가 7월14일 1천 명에게 한 여론조사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를 보면 박 시장 성추행 의혹 진상 조사 필요성에 대해 64.4%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고인이 없는 자리에서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만만찮은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심리 부검’이 될 수 있다. 박 시장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그가 앞서 남겨놓은 글을 다시 꺼내 되새김질해봐야 할 때다.

“그는 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슬픔을 딛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는가.”(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박 시장의 글, 책 <박원순이 걷는 길>, 임대식 지음, 2015)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우울감 등 주변에 말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거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살예방 상담전화(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1577-0199), 희망의 전화(129), 생명의 전화(1588-9191), 청소년 전화(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앱 ‘다 들어줄 개’,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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