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카야스동맥염이라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어.”
이렇게 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순간, 나는 아픈 이야기를 모으는 커다란 바구니가 된 기분에 휩싸인다. 바구니 팻말에는 ‘크게 아파본 사람, 아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등급: 꽤 안전’이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 속에 간직해온 아팠던 경험을 바구니에 하나둘 넣는다. 지난겨울 독감에 걸려서 시험 기간에 수업을 놓쳐 속상했던 이야기부터, 어릴 적 대형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는 이야기, 자신 혹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아파서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과거의 일이라서 현재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었고, 아직 말을 꺼내놓는 것조차 힘겨운 기색이 역력해서 ‘저 사람은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일부만을 드러내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도 있었다. 정말이지,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팠던 경험을 먼저 공유해주는 사람들이 참 고마웠다. 그들이 말을 꺼내는 의도는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고 무겁게 느끼던 짐을 덜어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희귀 난치병’이라는 인생의 큰 굴곡을 맞이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일상에 적응해야 하는 나를 알아주려는 뜻이기에 고무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듣고 위로받았다. 나에게 공감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 사람들도 말을 마치면 후련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꺼내준 사람에게도 긍정적 영향이 있는 듯해 다행이었다.
아픔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같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와의 관계가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저 사람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 배려해줄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이후 나에게 해주는 행동과 말에 밴 배려를 더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도 있다. 내 상처에 대해 배려받으리라는 희망이 생겨서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상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 안정감은 소통에서 거리감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프면서 가끔 환자라는 위치가 편리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전에 느꼈던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 때. 혼자가 아니어서 외롭지 않고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알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두 아프다. 아픈 경험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런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홀로 아프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혼자 아파하도록 놔두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런 감정이 연대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게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믿음. 연대는 많이 아프고, 상처받고, 주저앉아 우는 데서 오는 고통을 겪어본 감정을 기억하고 나누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 같다.
저스틴 비버와 뫼(MØ)가 피처링한 메이저 레이저의 노래 <콜드 워터>(Cold Water)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난 널 놓지 않을 거야/ 내가 오늘 밤 너의 생명줄이 되어줄게”(I won’t let go/ I’ll be your lifeline tonight)
너무 아픈데 아무도 나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무치게 외로웠던 밤도 있었다. 나는 왜 혼자 이렇게 아플까, 참 불쌍하다, 덧없는 자기 연민에 쓸려 내려가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었던 날의 눈물도 아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사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절실했다. 주변에 잘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당시에는 마음이 너무 너덜너덜해서 나의 너절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혼자 아파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혼자 아프지 않도록 구명줄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조금 들었다.
신채윤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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